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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십일조 교리'에서 벗어나라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하느님은 자식에게 돈달라고 떼쓰는 부모아니다
 
류상태   기사입력  2007/09/05 [14:57]
십일조 꼭 내야 하나
 
십일조는 제정일치 사회의 세금이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국가는 제정일치 사회였으며, 십일조는 나라에 내는 세금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의 역할이 분리된 오늘날의 사회구조에서,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조세납부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의무로 넘어왔다.
 
제정일치 사회에서 세금의 기본 구조였던 ‘십일조’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느님께 반드시 바쳐야 하는 필수헌금처럼 된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모르거나, 자발적이어야 할 헌금을 세금처럼 강요하는 교회지도자들의 무지 내지는 이기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한 서구 교회의 경우, 즉 천주교회는 물론 개신교회에서도 한국 기독교식의 십일조제도를 채택하거나 강요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독일교회에서는 본인의 의사를 물어 종교세를 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만 1~2%의 종교세를 거두어 성직자들에게 국가가 월급을 지급한다.
 
그 옛날 제정일치 시대도 아니고, 나라가 특정종교를 국교로 채택하지도 않은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교회에 내는 헌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후원금’일 수밖에 없다. 이 후원금에 십일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부터 모순이다.
 
‘십분의 일’을 내든 ‘백분의 일’을 내든, 모든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조직체에는 운영자금이 필요하듯이, 교회 역시 운영자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교회를 유지하고 관리하며, 교역자나 사무원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고, 봉사나 선교 등의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 경비는 구성원들이 부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일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면,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선택한 단체의 유지와 활동을 위해 일정액의 후원금을 납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인들이 자율적으로 정해야 한다. 교회가 일방적으로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백한 공갈협박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일조를 ‘하느님의 것’이라느니 ‘안내면 도둑질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허위강요하지 말고, 정직하게 “교회 운영과 사업을 위해 소득의 일정 부분을 헌금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해야 한다.
 
교인들이 자율적으로 납부하는 것이라면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건, 오분의 일을 내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십분의 일이나 오십분의 일, 또는 백분의 일만 내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고, 교회는 그 자율적인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물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교우는 내지 않아도 된다.
 
‘온전한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에는 다니지 말라
 
좀 거북하긴 하지만, 교인들이 쉽게 부담을 떨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나는 2004년 대광고를 떠날 때까지는 목사의 신분이었기에 ‘십일조’라는 한국교회의 기준에 따라 헌금했다. 하지만 나는 전체 급여가 아니라 본봉을 기준으로 십일조 헌금을 냈다. 본봉을 기준으로 하느냐 전체 급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헌금액은 크게 달라진다.
 
교사의 경우 본봉은 수당을 합친 전체 금액의 절반이 안된다. (지금은 각종 수당을 본봉으로 돌려 본봉 기준이 높아졌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근무하던 2004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전체 급여를 기준으로 하면 나는 이십분의 일도 안되는 금액을 십일조로 낸 것이다.
 
물론 그런 기준을 정한 것에 대해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하느님 앞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헌금은 기본적으로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후원금’이기에 “본봉을 기준으로 십분의 일을 헌금 하겠다”고 정한 것이고, 여기에 가타부타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그건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지만, 헌금은 세금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내는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강요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 다니지 말라. 교인들을 돈으로 보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교회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식에게 돈달라고 떼쓰는 부모가 아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십일조와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 이외에는 어떤 헌금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교회는 십일조를 포함하여 어떤 헌금도 강요해서 안 되며, 헌금은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십일조에 매일 필요가 없다. 십일조에 대한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에게 한국교회가 또 교회에 십분의 일이나 내라는 건 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것 같다.
 
돈이 많은 사람이야 상관없겠지만, 소득이 적은 사람이 십일조를 굳이 납부하려는 걸 보면 안쓰럽고 불쌍하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하느님을 어떤 하느님으로 믿는 것인가? 자식에게 돈을 달라고 떼를 쓰는 부모를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신 우리 하느님을 그렇게 고약한 분으로 만들어야 하겠는가?
 
한국교회 교우들이여, ‘십일조 교리’에서 벗어나라
 
▲류상태씨의 저서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책 표지     ©삼인출판사,2005
특히 쌓이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 엄청난 규모의 건물(교회)을 짓고,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담임목회자가 시무하는 거대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에게는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제발 헌금 좀 정도껏 하라. 돈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상을 보지 못하고 맹목적인 십일조 교리에 매여 계속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은 하느님의 교회를 타락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신앙적 범죄행위이다.
 
그래도 굳이 십일조를 해야겠다면, 교회를 거치지 말고 하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은밀히 이웃을 도우라. 가까운 이웃들에게 눈을 돌리면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단, 그들을 돕더라도 생색은 내지 말라. 특히, ‘예수님 예’자도 ‘하느님 하’자도 꺼내지 말고 그냥 아무 조건 없이 도우라.
 
하느님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의 운영을 위해, 즉 사람을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다. 십일조를 포함하여 어떤 헌금이건 하느님의 이름으로 강요하지 말라. 그것은 하느님을 돈에 매인 천박한 신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를 모독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짓, 그것을 ‘신성모독’이라 한다.
 
* 본문은 저의 책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의 ‘십일조 헌금은 의무사항이 아니다’(159~162쪽)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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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9/05 [14:5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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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 2009/01/07 [03:36] 수정 | 삭제
  • 마음속에 혼자 불안하던 믿음에 힘을 싣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준 2009/01/07 [03:14] 수정 | 삭제
  • 마음속에 혼자 불안하던 믿음에 힘을 싣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지나가다 2007/10/09 [12:00] 수정 | 삭제
  • 오늘날 십일조는 교회 운영차원과 구제를 위해서 내는 이유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라고 했을 때는 분명히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는 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자의 일이 아니겠는가?
    강요라고 하는 이야기는 강요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고
    축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축복의 시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복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