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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80년에 남아 있는 친일부역의 그림자
[우리힘의 눈] 침략전쟁의 나팔수로 시작한 방송의 역사 바로 잡아야
 
방학진   기사입력  2007/03/11 [22:23]
1919년 삼일운동이후 조선 민중들의 저항에 놀란 일본은 식민지 지배 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제한적이지만 이 같은 합법 공간 속에서 좌우의 독립운동세력들은 저마다 효과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던 중 드디어 1927년 2월 15일 국내 최대의 좌우합작연합전선인 신간회를 창립한다.
 
신간회가 창립된 바로 다음 날인 2월 16일 오후 1시에는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경성방송국이 호출부호 JODK를 부여받아 이 땅에서 처음으로 첫 전파를 발사한다. 대한제국 황실에서 이왕李王직으로 전락한 이왕직 전속 경성 음악대와 중앙악우회 관현악단의 축하공연으로 시작한 경성방송국은 일본어 7, 조선어 3의 비율로 전파를 발사하지만 바로 전날 창립한 신간회 소식은 없었다. 
 
▲경성방송국 전경. 안에는 조선방송협회 마크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대륙을 침략한 일제가 1932년 3월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국가를 세운 바로 그 무렵 경성방송국은 조선방송협회로 이름을 바꿔 이전 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식민 지배를 대변하는 방송을 내보낸다.
 
제1방송은 일본어로 제2방송은 조선어로 방송했지만 제2방송의 설치 목적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심전개발(心田開發-‘마음의 밭’을 개발한다는 뜻으로 즉 피지배 민족으로서의 저항의식을 약화시키고 황민으로서의 마음을 단련해야 한다는 일제의 동화정책의 하나)’, ‘농촌진흥’, ‘부녀교육’ 등 이른 바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방송협회에 전시 특별편성을 지시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2방송에서는 연일 내선일체 강화를 강조하게 되는데 이 때의 임원을 살펴보면 상임이사에는 한상룡, 김연수 등이 상임감사에는 조병상, 김성수, 민대식 등이 그리고 편성과에는 촉탁으로 모윤숙 등이 참여하는 등 당시 유력한 친일인사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1940년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물자절약과 불리한 전황보도 금지 차원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였고, 1942년에는 4월 27일에는 방송전파관제를 실시하여 조선어 제2방송을 중단하기에 이르고, 같은 해 12월 27일 조선방송협회의 조선인 직원들이 VOA(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청취 혐의로 체포되는 VOA단파수신사건이 일어나 조선인 아나운서와 기술자, 라디오 상인 등 150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10명이 실형을 선고받는다.

    이처럼 일제의 충실한 식민지 지배정책에 충실했던 조선방송협회 임원 중 조선인으로 최고위층인 상임이사에 오른 두 인물이 바로 인촌 김성수의 친동생인 김연수와 이완용의 외조카 한상룡(1880~?)이었다.
 
1880년 서울 수표동에서 규장각 부제학 한관수의 3남으로 태어난 그의 외숙이 바로 매국노 이완용이었다. 1896년에 관립 영어학교를 다니다가 2년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이완용의 외조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그는 1903년 민족계 은행이었던 한성은행(오늘 날 신한은행과 합병한 조흥은행의 전신)의 총무로 부임하면서 이후 이 은행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창씨개명의 선구이자 친일매판가였던 한상룡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조선의 식민지화와 더불어 한성은행 역시 일본자본에 예속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두터운 친일인맥을 자랑하는 한상룡은 특히 경술국치 이후 친일파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공채’(1910년 강제 병합 후 합방에 직간접으로 공헌이 있는 조선인들에게 작위를 주고 은사공채라는 액수를 지급해 여기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자로 편안한 여생을 보장해 주었다)를 한성은행에 예치하도록 로비를 벌여 성공하면서 민중들로부터 ‘조선귀족들의 은행’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따라서 1919년 삼일운동이후 반일감정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이완용의 친형인 이윤용이 은행장으로 그리고 전무에는 한상룡이었던 한성은행에서 민중들이 급격히 예금을 빼내면서 경영난에 빠지지만 일본 제일은행의 도움으로 다시 경영이 정상화된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한성은행은 더욱 식민지 매판자본의 첨병이 되고 만다.
 
이 같은 한성은행의 예속화와 매판성은 한상룡의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의한 측면이 크다. 삼일운동 직후 그는 조선군 사령관을 직접 찾아가 민심수습책 중 하나로 창씨개명을 요구할 정도였다. 실제로 조선총독부에 의한 창씨개명 정책이 1940년에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친일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 그는 강제합병을 주도한 일본 정객들인 메가다, 하야시, 이토는 물론 역대 총독인 데라우치, 사이토 등의 동상이나 기념비 건립과 기념사업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대표적인 식민지 매판 자본가였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 전쟁의 충실한 나팔수 역할을 했던 조선방송협회의 상임이사로 한상룡은 손색없는 경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조선방송협회에서 식민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미 군정시절인 1947년 9월 3일 한국은 미국 애틀란타시에서 개최된 국제무선통신회의(ITU)에서 ‘HL’이라는 국가 고유 호출 부호를 할당받는다. 이로써 방송에서 식민의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는 듯하였다.
 
하지만 경성방송국-조선방송협회로 이어지는 식민의 그림자는 여전히 한국방송의 효시로 상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KBS 라디오가 방송80주년을 맞아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고 하면서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호출부호 JODK로 첫 라디오 방송 전파를 발사한 이후, 올해가 80주년이 되는 해’로 ‘KBS 라디오는 이를 기념해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1월 22일자로 ‘한국방송 80년 특별제작 프로젝트팀장’까지도 인사 발령을 냈다. KBS 누리집을 보면 KBS는 버젓이 1927년 경성방송국을 자신의 연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KBS는 1927년 경성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호출 부호 JODK)을 송출하기 시작해 해방 후 1948년 국영방송인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재출범했다. 1961년 TV 방송을 시작했으며 1973년 한국방송공사로 공영방송 체제를 갖춰 오늘에 이르고 있다.” (KBS 누리집 중에서)
 
그런데 이러한 일제 식민지의 그림자는 KBS 뿐 아니라 MBC SBS EBS CBS 등 주요 방송사들의 모임인 한국방송협회에서도 목격된다.
 
1927년을 연원으로 삼아 한국방송 80년 행사를 준비 중인 한국방송협회는 매년 9월 3일을 방송의 날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도는 1927년을 따르고 월, 일은 1947년 9월 3일에서 따온 것이다. 어정쩡한 타협이 왠지 개운치 않다.
 
1977년 한국방송 50주년을 주창한 이래 무비판적으로 흘러온 방송계의 역사 찾기를 이번만큼은 제대로 바로 잡았으면 한다. 현재 주요 방송사 사장을 비롯한 대다수 경영진들이야말로 방송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한국근현대사의 오랜 금기영역이었던 친일과 과거사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기술로서의 방송의 역사는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올해를 ‘방송 80년, 한국방송 60년’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삼아주길 희망하며 나아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념할 것인지 반성하고 성찰하는 해로 우리 방송사에 기록되길 바란다.

* 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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