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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맨 워킹 - 그들을 처형하라고?
사형제도란 원시적인 희생양 제의의 마지막 형태
 
진중권   기사입력  2002/12/23 [04:06]
▲영화 데드맨워킹 중 한장면  

'데드 맨 워킹'이라는 영화가 있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듣자 하니 데이트 중인 남녀를 살해한 한 사형수와 한 수녀의 만남을 그린 영화라 한다.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끝까지 뉘우치기를 거부하는 파렴치범. 그에게 죄의식을 불어넣어 주려는 헬렌 수녀. 그 사형수는 결국 죽어 가는 순간에야 비로소 눈물을 흘리며 죄를 뉘우치고, 이때 영화는 사형수를 살해하는 잔인한 장면에 그 사형수가 살해하던 잔혹한 장면을 교차시킴으로써 사형제 존속론과 폐지론 사이의 팽팽한 대립을 시각적으로 연출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보지도 못한 영화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 영화의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데드 맨 워킹'이라는 표현은 사형수가 처형장에 입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간수들의 은어라고 한다. 원래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데드'라는 말이 '워킹'이라는 낱말과 결합하여 뚜벅뚜벅 걸어다닐 때, 우리는 마치 눈앞에서 '유령'을 보는 듯한 소름끼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형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미 죽은 사람'의 하얗게 질린 모습이 실제로 유령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헬렌 프리진 수녀가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요청으로 방한을 했다. 하필 대선을 앞두고 있어 시민들의 관심이 온통 선거에 쏠려 있는 이 시기에 헬렌 수녀를 초청한 이유는, 대개 사형이 정권교체기에 사형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김영삼 정권에서도 정권 말기에 사형수들에 대한 집단처형이 이루어졌다. 왜 그러는 걸까? 알 수 없다. 마치 세입자가 다른 집을 얻어 갈 때 자기가 살던 집을 깨끗이 비워줘야 하는 것처럼, 한 정권도 다음 정권에 권력을 넘길 때 사형수 옥사부터 비워줘야 하는 것일까?

그들을 처형하라

실제로 그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조속한 형집행을 요구하고 나선 바 있다. 그는 "97년 이후 사형집행이 한 건도 없었고, 그렇게 하여 밀려 있는 미집행 사형수가 18명에 달한다"며, "원래 형집행은 형 확정 후 6개월 내에 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를 집행하지 않는 것은 법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정권의 결여된(?) 법의식을 비난했다.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이 도발적 발언이 우리 언론이나 지식인 사회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그저 단신으로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 의원이 개탄하는 대로 현 정권 하에서는 아직 한 건도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혁정책부터 남북관계 개선까지 모든 것이 만신창이가 된 이 시점에 그래도 현 정권의 업적으로 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미래의 일은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현 정권 하에서는 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대통령 자신이 한때 사형수였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아무래도 형 집행에 윤리적 부담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이승훈, 사형집행 강조하는 한나라당의 사법관, 대자보 92호

실제로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형수들 사이에서는 안도의 분위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최소한 그의 임기 동안에는 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그 5년도 어느 새 지나고, 사형수였던 대통령의 임기도 끝나가고 있다. 그들이 현 정권의 치세를 무사히 넘긴다고 해도, 정권이 넘어갈 경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최병국 의원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다음 5년간도 이들이 계속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어 보인다.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형제도의 잔인성

이 문제가 내 관심을 끈 것은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빅토르 위고의 <사형수 최후의 날>(1829년)이라는 책 덕분이다. 형 집행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까지도 아무런 가망 없는 특별사면에 기대하는 사형수의 절박한 심리묘사는 까까머리 소년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듣자 하니 빅토르 위고의 문학적 묘사는 사형수의 심리에 대한 과학적 묘사로는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상상력이 그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으로나마 직접 사형수가 되어 보게 함으로써, 그 감정이입의 효과로써 사형제 폐지의 필요성을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음에는 틀림없다.

그 후 내가 다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몇 년 전 독일에 있을 때였다. 어느날 독일의 한 일간지를 뒤적이다 거기에서 우연히 '한국에서 사형수 집단처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고 경악을 했던 경험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김영삼 정권 말기에 있었다던 그 사형 집행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였던 것 같다. 한국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았다면 덤덤하게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형'이라는 그 도발적인 제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처형을 해도 '집단'으로 하는 문화의 야만성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그 기사 덕분에 조국 대한민국이 인권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야만적인 것은 사형제도만이 아니다. 우리의 형벌제도 자체가 불필요하게 잔인하다. 가령 그 기사 중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 "그 나라에서는 종신형이라고 하면 글자 그대로 종신형이다." 거기에서는 종신형이라 하더라도 15년 정도 살렸다가는 그냥 풀어주는 모양이다. 하긴 이미 남에게 위해를 가할 기력조차 없는 파파 할아버지들을 계속 감옥 안에 가두어두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향을 안 한다고 파파 할아버지가 되도록 4, 50년씩 독방에 가두어 놓는 우리의 사법제도. 대체 7, 80 먹은 할아버지들이 다시 무장을 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걸까?

인간의 심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의 윤리성과는 별도로 사형제도의 문제점으로는 먼저 '오심'의 가능성을 꼽을 수 있다. 죽음은 궁극적인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극한의 현상이다. 오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치적 이유나 그 밖의 동기에서 적대자를 제거하기 위해 행해지는 의도적 오심이다. 가령 과거 군사재판 하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 판결은 결국 좌익 경력을 가진 박정희가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한 사법살인이었다. 유신 시절에 발생한 인혁당 사건 역시 최근 박정희 정권에 의한 사법살인으로 판명되었다. 물론 다행히 집행은 되지 않았지만 5공 시절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사형판결도 신군부의 권력쟁탈을 위한 조작극으로 드러났다.

이런 것이 의도적인 오심이라면 이와 달리 순수한 착오에서 비롯된 오판도 있다. 가령 몇 년 전에 모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어느 치과의사는 결국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만약 그가 교육을 받지 않고 경제적 능력도 없는 하층계급이었다 하더라도 과연 저렇게 풀려날 수가 있었을까? 솔직히 거기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사형수들 중에는 더러 자신의 무죄를 끝까지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열 사람의 도둑을 놓쳐도 단 한 사람의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게 사법의 원리. 그런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형수들 중에 정말 억울한 희생자가 단 한 사람도 없을까?

증거보다는 강압에 의한 자백에 의존하는 수사관행, 또 그것을 유력한 증거로 인정해주는 사법적 관행을 생각해 보라. 오늘 신문에서 한 젊은이가 채팅 도중에 "사람을 죽였다"는 농담을 한 마디 했다가 살인범으로 몰렸다가 풀려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나마 최근 검찰의 강압수사가 문제가 되는 상황이라 가까스로 그런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보다는 엄격한 증거주의를 실천하는 미국에서도 사형제가 부활된 이후 처형된 800명여 중 100명이 후에 무죄로 드러났다고 한다. 아울러 미국의 경우 하층민과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배심원의 판결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는 이런 편견이 우리의 사법부에는 없을까?

사형제가 존속한 이래 이제까지 여러 시대,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억울한 죽음들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 일을 저지른 국가를 사형시켜야 할까?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얘기는 더러 들어도, 이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고소하고, 뚜렷한 증거 없이 극형을 내리는 잘못을 범한 검사나 판사가 그 책임을 졌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다 못해 '업무상 과실치사'로 고소를 당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억울한 죽음이 있으면, 거기에는 또한 윤리적 책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여기에는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범죄를 예방하라?

이제 사형제도의 이론적 문제로 넘어가 보자. 형벌론은 크게 세 단계로 발전해 왔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형벌론은 '보복론'이다. 아득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논리에 따르면 형벌은 범죄자에 대한 신의 분노, 다시 말하면 공동체의 분노의 표현이다. 근대에 이르면 '예방론'이 등장한다. 형벌의 유용성은 잠재적인 범죄자들의 머리에 공포감을 주입함으로써 범죄를 예방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 예방효과를 위해서 그랬던지 실제로 바로크 시대에는 공개처형을 통해 가능한 한 잔혹하고 처참한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오늘날의 형벌론은 주로 '재사회화론'의 형태를 띤다. 말하자면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를 치료 혹은 교화하여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가장 현대적인 형벌론인 재사회화론으로는 사형제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사형제도가 사회에 뱉어놓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뿐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사형제도의 경우에는 처벌의 실행이 곧 처벌의 목적 자체를 배반하는 사태를 낳게 된다. 때문에 사형제도를 정당화하려면 먼지 나는 창고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법관념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 실제로 사형제에 찬성하는 이들이 제기하는 논거도 바로 이 두 가지, 즉 보복론과 예방론뿐이라는 구시대의 형벌론이다. 문제는 이 형벌론들이 휴머니즘 사상이 일반화하면서 언젠가 그 부적합성 내지 잔혹성이 일반에게 의식되었던 것들이라는 데에 있다.

사형제 존치론자들이 즐겨 내세우는 논거는 '일반예방론'이다. 하지만 언뜻 듣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이 논리가 미신이라면? 실제로 미국의 경우를 보면 사형제도가 다시 도입된 후 흉악범죄의 발생률은 전혀 줄지가 않았다고 한다. 다른 한편, 사형제도를 폐지한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를 보면 그로 인해 흉악범죄가 특별히 늘어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사형제도가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를 내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절도를 사형으로 처벌하던 시절 영국에서 절도가 가장 많이 일어나던 곳이 역설적이게도 그 잔혹한 공포극이 연출되던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범죄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는 별 상관이 없고 적발이 되지 않을 가능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흉악범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는 사형과 같은 극형이 아니라 범죄의 적발률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취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디드로가 지적한 것처럼 사형제도는 이미 목숨을 버릴 것까지 계획에 넣은 범인에게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가령 지존파나 막가파의 경우처럼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 경우 사형제도는 '까짓 거, 나 하나 죽으면 되지' 하는 심리로 외려 살인을 정당화하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 이것은 사형제도가 범죄자를 윤리의 '주체'로 세우는 게 아니라 거꾸로 처벌의 '객체'로 취급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윤리의 '주체'이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은 그저 그것을 댓가로 세상의 모든 이를 죽여도 되는 살인면허장이 되는 것이다.

복수의 감정

그렇다면 남은 것은 보복론 뿐인데, 아마도 이것이 사형제가 아직까지 폐지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게다. 가령 인터넷 공간에서 사형제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면, 곧바로 여기저기에서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험한 소리들이 튀어나온다. 대개 범죄자들의 잔혹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주는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다. 심지어 외려 현재의 처형방법이 너무 인간적이라며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잔혹한 처형들을 부활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적어도 시민들 사이에서 사형제 존폐논쟁은 바로 이 복수의 감정의 문제이다.

실제로 모든 인간에게는 '정의의 감정'이 있고, 또한 복수의 욕망이 존재한다. 특히 잔인한 범죄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가족들은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그들의 감정, 그들의 복수욕은 그 어떤 논리로도 설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령 사형제 폐지론자 자신에게 '네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이 잔인하게 살해되어도 범인을 사형시키는 데에 반대할 것이냐'고 물으면, 누구라도 간단하게 대답하기는 힘들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사형제도가 부당하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그의 감정만은 결코 그 범죄자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형벌의 기초에 보복의 감정이 깔려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감정이 형벌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교육학자 페스탈로치가 지적했듯이 사형제도는 외려 민심을 흉폭하게 만들 수 있다. 사형제도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도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정작 위험한 것은 바로 이 발상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데 국가가 몸소 나서서 처형을 집행함으로써 이 부당한 전제를 몸소 정당화해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국가도 경우에 따라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시민들 역시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믿을 수 있다.

잔혹함과 감수성

몇몇 국가에서 행해지는 공개처형의 장면을 보며 우리는 그것을 잔인하다고 느낀다. 가령 어느 이슬람 국가에서 범죄자를 포크레인의 끝에 매달아 교수형을 시키는 장면을 우리는 잔혹하다고 느낀다. 가끔 텔레비전에 비치는 중국의 집단처형 역시 우리의 감성에는 끔찍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우리의 집단처형의 관행에 대해서는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사형제도가 폐지된 나라의 사람들은 한 날 한 시에 사형수들을 일괄 처형하는 우리의 관행에서 잔혹함을 느낄 것이다.

한때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도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파리의 길거리에서 기요틴 공개처형을 실시했었다. 오늘날의 감성에는 이런 관행이 잔인하게 느껴질 것이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다가 감성이 변하면서 처형을 비공개로 진행하고, 이마저 잔인하게 느껴지자 결국 사형제도 자체를 폐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사형제도의 문제는 곧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느끼지 못하는 무딘 감수성의 문제이다.

가령 한국을 방문한 헬렌 수녀는 "사형집행을 직적 목격한 사람이라면 사형제도에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형은 비공개로 이루어진다. 범죄 현장의 끔찍한 장면은 미디어를 통해 여과 없이 보도된다.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이 잔혹한 장면을 바라보며 시민들의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한껏 증폭된다. 하지만 범죄자를 살해하는 사형집행은 비공개로 이루어지기에 그것의 잔인성을 느낄 기회가 없다. 범행의 공개와 처형의 비공개 사이의 불균형. 이것이 사형제도의 잔인성에 대한 감성을 무디게 한다.

사형의 사회학

사형제도의 문제를 윤리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일면적인 것이다. 가령 사회의 빈부격차가 늘어나면 흉악 범죄는 그만큼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거의 자연과학적 필연성을 가질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범죄의 발생에 범죄자 개인의 책임만 있는 게 아니라 동시에 사회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령 미국에서 사형수의 50%는 흑인이라고 한다. 범죄자의 유전인자가 따로 있다는 인종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형수의 절반이 인구의 10%에 불과한 흑인들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들이 그 사회의 위계에서 하층을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를 보아도 사형수 중에 대졸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졸자는 대개 사회적으로 안정된 계층에 속하고, 이 계층은 자신을 논리적으로 변호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나아가 좋은 변호사를 고용할 경제적 여유를 갖고 있다. 때문에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대졸자들은 적어도 사형이라는 극형만은 피해갈 수가 있다고 한다. 영화 <데드 맨 워킹>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형수도 영화 속에서 그런 항변을 한다고 한다. 인질극을 벌이다가 자살했던 어느 탈옥수의 말대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원칙(?)이 우리의 사법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헬렌 수녀는 "사형제도란 정치가들이 사회적 문제를 손쉽게 처리하는 방식"이라 말했다. 가령 사회적에 흉악 범죄가 발생했을 때, 그런 범죄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환경을 바로잡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며, 아울러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가 아니라 사법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가령 "강력 범죄, 그것은 범죄자 개인의 인간성의 문제이며, 따라서 그의 인격을 파괴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정치가들이 사회문제를 제 편할 대로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형제도란 한 사람을 희생시켜 공동체 전체가 안정을 누리는 원시적인 희생양 제의의 마지막 형태라 볼 수 있다.

사형제도는 또한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권력이 존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권력이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을 지켜야 한다. 가령 오늘날 국가라도 시민의 사생활을 들여다 볼 수는 없는 것처럼, 개인이 국가에게서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 권리가 바로 생명권이다. 수 백년 전에 이탈리아의 법학자 베카리아는 사형은 사회계약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생명은 사회계약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형제도의 폐지는 곧 권력을 연성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사형제도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생명을 빼앗는 행위이므로, 거기에 대한 신학적 측면의 고찰이 필요하다. 사실 성서에는 사형제도 존치론과 폐지론의 근거가 모두 들어 있다. 가령 모세의 율법은 피를 통한 보복을 명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창 9:6).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 21:23-25), 소위 '탈리온의 법'이라는 관념이다.

이것이 사형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찬성론이라면 이와는 좀 다른 형태의 존치론도 있다. 사형제도는 국가의 할 일, 따라서 교회가 거기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가령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마 22:21) 세속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그대로 인정하라는 논리도 있다. 가령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5)

하지만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성서를 관통하는 주요한 정서는 달라진다. 가령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일화, 즉 간통한 여인 앞에서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던 일화에서 신은 더 이상 구약시대의 '폭력적인 정의의 신'이 아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자비로운 사랑의 신'으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사형의 필요성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는 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극복된, 고대의 낡은 법 관념을 토대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국가에 그 권리까지 양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중세에 이단사냥, 마녀사냥의 장면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전형적인 '최후의 심판'의 도상을 차용하고 있어 묘한 느낌을 준다. 원래 '최후의 심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판관이 된다. 그는 정의 그 자체이며 그의 판단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연출하는 최후의 심판에서는 종종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오류를 범하곤 하는 불완전한 인간이 재판관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다.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면 이는 "신적인 심판의 패러디", 한 마디로 신을 흉내내는 인간 원숭이 짓이다. 인간의 목숨을 거둘 권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그 영역을 넘보는 것은 주제넘은 월권이다.

사형제도의 현황

<국제 사면위원회>는 1977년 "사형제도는 극도로 가혹하고 비인도적이며 모욕적인 형벌임과 동시에 생명권을 침해하는 제도"로 규정한 "스톡홀롬 선언"을 발표하였다. 78년 유엔총회에서 "사형폐지를 위한 모든 조처를 강구하도록 하는 국제인권규약을 채택한 바 있다. 사형은 이미 더 이상 현대인의 감성에 맞지 않는 고대적인 잔혹성의 흔적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형제도는 박물관으로 들어가, 인간이 한때 잔인했다는 사실의 고고학적 증거가 되어가고 있다.

1999년 현재 전세계에서 법적으로, 실질적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한 나라는 이미 105개국에 달한다. 아직 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90개국이며, 서구 선진국에서는 미국과 일본 뿐이다. 보통 최근 10년간 사형집행이 없었으면 그 나라에서는 사실상 사형제도가 폐지된 것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지난 5년간 사형집행이 없었다. 다음 정권에서만 없으면 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사형제도 폐지국의 대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어제 신문을 보니 국제 엠네스티가 김대중 정권에 재차 사형제와 국보법 폐지를 권고했다고 한다. 이번에 방한한 헬렌 수녀 역시 한국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사형폐지국이 될 것을 희망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간다는 일본의 경우, 한 동안 형 집행을 안 하다가 올해 9월 집행을 재개함으로써 사형제 존치 의지를 드러냈다. 흔히 사형제도 존치론자들은 미국과 일본을 들어 "선진국에서도 사형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하곤 하나, 적어도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그냥 앞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 본문은 격월간 <아웃사이더> 10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 인터넷 아웃사이더 바로가기 http://eoutsi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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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2/23 [04:0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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