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용산참사' 재판을 놓고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가 법원에 '의견 표명'을 내기로 다수의 찬성 의견을 모았으나, 현병철 위원장이 석연찮은 이유로 이를 거부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인권위원들 10명 중 7명 찬성 의견, 현 위원장 "다음에 논의하자" 인권위원들의 전언을 토대로 한 7일 <한겨레> 신문에 따르면, 인권위는 지난달 28일 오후 제24차 전원위원회를 열고 용산참사와 관련한 의견 표명 여부를 논의했으며, 특히 회의에선 참석 위원 10명 가운데 7명이 '찬성' 의견을 냈다.
인권위는 당시 용산참사 유가족이 서울고법에 '검찰의 경찰 불기소 처분'에 불복해 재정신청을 한 데 대해 법원에 의견을 낼지 여부를 논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현 위원장은 그러나 "다음에 논의하자"는 말로 일방적 폐회를 선언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이유에 대해선 "용산참사 관련 안건은 사무처가 진행하던 사건으로, 위원들이 안건을 제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절차적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위원들은 "사무처가 진행하는 안건은 이미 예전에 종결된 진정 사건을 뜻하는 것으로, 이번 안건에 절차적 문제가 없다"며 회의 진행을 요구했고, 참석 위원 10명 중 과반수인 7명이 "의견 표명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현 위원장은 갑자기 다음에 논의하자는 뜻을 짧게 밝힌 뒤, 의사봉을 두드리고 폐회를 선언한 뒤 회의장을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는 인권위 위원들이 현 위원장의 '독단적인 행동'에 강하게 반발했다고 전했다. 한 상임위원은 "인권위는 합의제 기구로 위원 과반수가 찬성하는 안건을 다음 회의로 미루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인권위원은 "전원위원회에서 위원장은 회의를 주재하는 역할을 맡으며, 모든 위원들과 똑같이 한 표를 갖고 있을 뿐"이라며 "위원장이 인권위원을 무시한 인권위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인권위원들은 현 위원장 결정에 반발해 회의장을 떠나지 않고 사과를 요구했으며, 현 위원장은 저녁 8시께 회의장으로 와 위원들에게 사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안건은 오는 11일 전원위원회에서 재논의될 예정이다.
"민주적 절차 무시한 독단적 처사, 암담하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 배여진 활동가는 이날 <대자보>와의 통화에서 "인권위원들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현 위원장이 폐회를 선언한 것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독단적으로 처사로 볼 수 있다"라고 강도높은 비판을 가했다.
▲ 지난해 7월20일 서울 무교동 국가인권위윈회 배움터에서 열린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 취임식 모습. ©CBS노컷뉴스 | |
배 활동가는 나아가 "마치 현 위원장은 국가인권위를 자신의 '소유기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인권위원들의 찬성 의견을 무시한) 현 위원장의 결정을 보면 독재같은 느낌이 든다"고 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지난해 12월 MBC <PD수첩> 공판과 관련해 현 위원장이 '반대 입장'을 표명한 사례를 거론, "(현 위원장은) 당시에도 (이번 '용산참사' 결정과)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일련의 상황을 보면 인권의식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고 밝혔다.
앞서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1일 임시 전원위를 열고, 당시 결심 공판을 앞두고 있던 <PD수첩> 관련 사건에 대한 의견을 낼 예정이었으나, 이에 대해 현 위원장은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때문에 당초 찬성이 우세했던 상황이 부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배 활동가는 "가장 기본적인 절차와 인권위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현 위원장이 권력을 남용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들 정도다. 암담하다"라고 맹성토했다.
배 활동가는 '용산참사'의 근본 원인과 관련해서도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전반적 문제점들을 한 번에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재개발 사업의 문제점과 그 안에서의 공권력 문제, 이를 대처하는 정권의 모습에서 총체적 문제점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조국 인권위 비상임위원(서울대 교수)도 <한겨레>에서 "재정신청 제도는 검사의 불기소 처분으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받은 이들에게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이라며 "인권위가 용산참사 유가족의 재판받을 권리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인권기구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현 위원장의 결정을 비판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도 "현 위원장이 이명박 정부에 부담이 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고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권위는 인권의 잣대만을 가지고 정부 기관에 권고하거나 의견을 표명할 때 그 존재 의의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