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너희들을 자유롭게 하리라. (Veritas Liberabit Vos.)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다. 자유롭게 사유하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영혼들은 언제 어디서 봐도 아름답다. 삶의 진실과 지혜를 찾아나서 ‘구김살 없이’ 이를 구현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어원학에서 ‘아름답다’는 단어의 유래가 ‘알음(知)답다’라는 주장이 직관적으로 커다란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 이치다. 그런데 그냥 자유 말고 ‘자유주의자’라고! 살면서 여기저기, 자신을 자유주의자로 일컫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마음 속 깊이 상반된 두 갈래의 갈등이 교차한다. 도대체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기나 하며 그러는지 아니면 몰라서 그러는지. 자유주의란 서구문명 내부의 19세기적 패권담론이며, 당시 그들에 의해 ‘타자’(他者)로 간주되던 비서구의 입장에선 유혈과 착취의 ‘제국주의’를 지칭하는 말이다. 오늘 21세기적 신자유주의 또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 역력히 드러났듯이, 협박과 강요의 ‘신제국주의적’ 속성을 간직한 채 현금의 세계 정치 및 경제 질서를 재편 중이다. 물론 우리 아닌 그들은 자신들을 자유주의자 또는 신자유주의자라고 칭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아닌 우리는, 용어의 정의(定義)상, 그 누구도 자신을 자유주의자 또는 신자유주의자로 부를 수도 또 그렇게 불릴 수도 없다. 만약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또는 제국주의적 사유체계에 부역하는 세력, 곧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 당대를 사는 사람이 당대를 가장 모를 수 있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세계사적 광풍이 몰아치면서, 우리 역사 또한 7,80년대 반공자유주의 시절의 허위의식, 반공지상주의는 거의 걷혀진 상태고, 이를 대신하여 시장지상주의라는 이름의 짙은 안개가 드리워지면서 다시금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이른바 ‘상식’과 담론의 이름으로 우리들의 뇌세포 구석구석을 ‘역의식화’시키는 문화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들, 신구의 허위의식들 간 임무교대라고 할까.
오늘 조국과 민족의 역사 앞에 노무현과 문국현, 그리고 이명박을 기소하고자 한다. 이들 3인은 이른바 ‘세계화’니 ‘선진화’를 선동구호로 내걸고서 오늘의 허위의식 곧, 신자유주의에 부역하는 정파세력들을 각각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자들이다. 사대주의자들도 세월 따라 진화한다. 오늘의 ‘신사대주의자’들이며, 각각의 공소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노무현이다. 한때 서구 좌파 사조에 경도되었다 자신의 입장을 수정한 속칭 뉴라이트(New Right) 부류다. 그 수장 격은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하는 안병직 등이다. 위대했던 87년 민주항쟁에서 ‘빛나는 새 세상’을 세우겠다며 함께 싸웠던, 그러나 어느 샌가 우리 안의 악성종양으로 한껏 자라버린 ‘암세포’로 규정된다. 노무현 스스로 자백하듯 ‘좌파 신자유주의’를 내걸고서, 지난 5년의 임기 내내 한나라당 정강정책을 몸소 구현하다 끝내 사람들(people) 곧, 인민의 일상적 삶을 피폐화시키는데 성공한 기수범(旣遂犯)이다. 또한 끝까지 잘못한 게 없다면서 자신이 집권한 5년이 어찌 ‘잃어버린 세월’이냐고 버럭버럭 악을 써대는 확신범이다.
요즘 인터넷상 다시금 불붙은 소위 노무현 댓글놀이의 핵심은 ‘우리가’ 뽑아놓고도 ‘국민주권’을 도둑맞은 기막힌 세월이라는 거다. 노무현이나 그의 ‘정책 대연정’ 파트너인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세월이 결코 아니다. 속칭 ‘잃어버린 10년’은 노무현 집권 5년과, 이로 인해 앞으로 거의 꼼짝없이 잃어버릴 5년을 합산한 세월이다.
도대체 개전의 정이라고는 지금으로선 찾아볼 수 없다. 집권이후 코드인사에 심지어 ‘회전문’ 인사였음이 온 세상에 드러났음에도, 노무현은 자신이 청와대 내 장관급 위원장으로 임명하였고 몇 차례 내각의 장관직도 제의했다는 문국현을 두고서, “그는 검증을 거치지도 않았고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최근(10.25.) 거리두기에 ‘용의주도하게’ 나선다. 진작 벤치로 물러났어야 할 형편에 끝까지 끼어들려는 추태가 역겹기 그지없다. 집권 전 ‘노무현답다’는 긍정의 표현이 어느새 ‘노무현스럽다’는 말로 뒤바뀌어 인구에 회자되는 까닭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다음으로 역사의 공개법정에 문국현을 기소한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끼어들어 근래 세상을 혹세무민하는 또 다른 부류의 신자유주의 추종자로, 분류상 자생적(自生的) 신사대주의자로 규정한다. 자신의 입으로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이라면서, 한미FTA에 반대한다는 이유가 고작 의료개방과 교육개방 등이 미진해서 그렇다니, 참으로 포복절도할 노릇이다. 이러한 자발적, 자생적 추종자들의 원조 격은 김영삼 정부 시절 ‘세계화’를 맨 처음 내걸고서 이를 무모하게 추진하다 속칭 IMF 경제위기를 자초한 박세일 등이다.
지난 14일 발기인대회를 거쳐 10월 30일 문국현의 ‘창조한국당’이 출범하게 된다. 다른 정당들의 경선절차 비슷한 것조차 원초적으로 흉내 낼 수 없어 단일후보 문국현의 ‘추대’를 놓고 당내 그리고 인터넷상 찬반을 묻는, 참으로 웃기는 집단이다. 일찍이 이승만을 포함하여 ‘체육관 대통령’으로 불리던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이전 시기에서조차, 단독후보를 옹립하는 사당(私黨)적 후안무치한 작태만은 ‘들러리’나마 세워가며 극구 피하려 했던 거다.
단지 CEO출신이라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애 전 과정을 통하여 어떠한 정치적 실체도 아무런 정치적 업적도 없으면서, 단지 CEO 출신이기에 시대적 소명에 적합하다는 건 억지 주장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이른바 권위주의의 마지막 근거지는,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의사결정 방식이나 조직문화 등에서 대기업과 대자본이다. 이건희는 마치 현실세계에 초연한 성자인 양, 삼성 내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독재적 권위를 갖고 수시로 종교적 수준의 선문답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지금 문국현 또한 친(親)기업 일방의 논리를 아주 ‘복잡하게’ 돌리고 뒤집으면서, 그럴싸하게 인민대중을 현혹시키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요컨대 기업, 정확히는 대기업과 대자본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서민대중은 아예 국물도 없다는 거다.
특히, 노무현의 최근 멘트에 대한 그의 반응은 가관이다. “제가 검증이 충분히 되지 않았다면 15억 5000인구의 그런 세계적인 기업의 북아시아 총괄사장이나 이사회 회장을 못했을 거고요." 맞다! 좋게 말해, 글로벌 마인드의 기업가이고, 거칠게 말하면 해외투기자본의 앞잡이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 셈이다.
80년대 중반 미국의 환경 및 여성운동가들은 킴벌리를 1회용 기저귀 양산 등 ‘반환경산업’의 대명사, 곧 ‘공공의 적’으로 지목했었는데. 바로 그 킴벌리 자본이 이른바 ‘글로벌 자본’의 시대에 문국현을 앞세워 지난 십수년간 이 땅에서 행한 일이라는 게 후원이란 미명으로 무슨 환경재단인가, 무슨 여성재단인가에 금도를 넘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니, 그 죄가 중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비공공적’ 경력과 업보를 갖고, ‘공공복리’의 증진을 최고의 목표로 여기는 정치에 나선다고! 한 마디로, 이번 대선의 ‘최대 코미디’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사대주의 세력의 정치적 맹주 격인 이명박을 엄중 규탄함과 동시에 강력 기소한다. 지난 시절 반공자유주의의 충직한 노예였지만, 세상이 크게 바뀐 걸 뒤늦게 실감하고서 다시금 분칠하며 역사의 전면에 나선 사대주의자들로 곧, ‘올드 라이트’(Old Right) 부류다. 수장 격으로는 단연 조갑제나 조선의 김대중 등을 들 수 있고, 미국으로 치면, 부시 일파의 ‘네오콘’에 비견된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따로 없다. 온갖 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학습효과’ 덕택으로 50%대 고공지지율을 굳건히 지키더니 이명박, 거의 기고만장한 상태다. 금년 초 민주화세력을 두고선 “7,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라면서, “돈 없는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그의 정치관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근 “국어나 국사를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로 가르치자”는 역사의식의 빈곤과 연이어 물의를 일으킨 소위 ‘관기’ 발언이나 ‘맛사지 걸’ 발언 등 천박한 여성관에 더하여 며칠 전(10.25.)에는 “(나를 지지하는 그 사람은) 훌륭한 노조간부더라. 전북도민이 설마 택시노조 간부보다 못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하는 연설 대목에선 반노조에 지역패권의 음습한 모습까지 드러낸다. 배타적 종교관은 익히 알려진 터이고, 약자와 소수자를 한 없이 억압하는 한심한 철학의 소유자다. 시시각각 ‘대재앙’의 순간이 닥치고 있다. 이명박이 앞으로 만들자는 세상이 지금까지 노동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배제로도 부족해서, 지난날 보안법이나 반공법 등을 적용하며 노동을 옭아매고 처단했던 박정희 식 개발독재 방식까지 더하자는 것 아닌가. 철저히 ‘정글자본주의’를 지향하고, 특권부유층만을 위한 이른바 ‘20 : 80’의 분열된 세상을 세우겠다는 거다. 아직은 단지 예비, 음모 차원의 미수범(未遂犯)에 불과하나 지금대로라면 대선 이후 예상되는 온갖 반민주와 반민족적 소행이, 역사의 전면적인 후퇴가 벌써 눈앞에 선하다. 대한민국 역사가 이렇게 귀결되는 걸 그냥 방치하고 말 건가? 아무리 노무현 치하 지난 5년이 지겨웠다 해도 그렇지, 이명박 정도를 대안 삼아 이른바 ‘떡고물’에 대한 기대를 키워가는 건 심정적으론 일면 이해하면서도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목하 대선을 앞두고 조갑제 등 ‘올드라이트’는 물론이고, 박세일 등 자생적 사대주의자에 안병직 등 전향파 ‘뉴라이트’까지 속속 가세하여 지금 ‘사대주의’ 세력의 본거지를 총력 강화하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이들에겐 서구적 관점의 ‘우파’(Rights)란 이름도 과분하다. 불란서 혁명 이후 서구 민족국가 내부의 역사적 기준에선, 좌와 우를 잇는 어느 영역에서도 소위 사대주의자들이 들어설 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과 달리 식민지배 등 역사의 경로를 달리했던 우리라서 일찍이 구한말 맹목개화파, 일제하 친일파를 거쳐 오늘까지 사대주의자들이 좌와 우를 불문하고 득세할 공간이 존재했던 것이다. 사대주의자들도 세월 따라 진화하는 법이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척결하는 일이야말로 전 국민적 선택과 결단이 요구되는, 이 시대 ‘선진문명국’이 갖는 민주와 진보의 정치적 함의에 다름 아니다. 진리는 나의 빛! (Veritas Lux Mea!) 세월이 갈수록 마음에 새겨지는 문구다. 개인적이건 국가적인 차원에서건, 개별적인 주관과 보편적인 객관이 상호 만나는 지점에서, 이른바 신념과 맹신, 순교와 개죽음의 차이가 명확히 갈린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적 유래가 “나(我)답다”라는 주장에도 크게 공감하는 까닭이다. 자신의 모습을 주눅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당당한 모습이 그립다. 미국의 주류세력인 WASP(백인 앵글로색슨계 청교도, White AngloSaxon Puritan)는 자기네들에 쉽게 동화되는 동양인을 두고서, “겉은 틀림없이 황인종인데 속은 영락없이 백인이다‘는 경멸적 뜻을 담아 자기들끼리 ‘바나나’(bannana)로 지칭한다. 그런 부류의 흑인들에 대해선 겉은 검으면서 속은 뇌세포 구석구석 백인 뺨친다는 의미에서 ‘오레오’(oreo)로 지칭하듯. 누군가를 ‘규정’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역규정’하는 것이다. 현실정치적 영향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순전히 사대성의 경중만을 갖고 이들 3인을 규정하자면, 노무현이나 이명박보다는 문국현의 정신 상태가 자발성의 견지에서 ‘중증’(重症)이라는 소견이다. 생각만 해도, 정치인 장준하와 선각자 문익환은 가슴 시리다. 정치독재의 지난 시절 원조 반공주의자 장준하는 민족의 얼을 고이 간직하였기에 끝내는 가장 치열하게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나섰고, 선지자 문익환은 어릴 적 친구 장준하의 75년 비명횡사 후 그 자신 쉰여덟의 나이에 역사의 전면에 담대하게 나섰던 것이다. 오늘 과연 누가 있어, 이들 신사대주의자들의 반역사적, 반민족적, 반민주적 ‘사대동맹’ 고리를 한 칼로 내리칠 수 있나. 당장 우리 눈앞에 나타나 나약한 모습을 꾸짖으며, 어서 빨리 우리 안의 ‘계륵’ 노무현을 가둬놓고, 속칭 범여권 내 문국현의 ‘가짜 메시아’적 정체를 드러내고, 정면으로 이명박과 건곤일척의 시대적 승부를 펼칠 것을 포효로서 명할 듯하다. 민주파와 진보파, 다시금 진화(進化)의 길로 새롭게 들어서야 한다. 기필코 살아남아야 한다. 임박한 12월대선의 성패를 뛰어넘어, 향후 백여 년간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근본 지형을 새롭게 주조하는 중차대한 시점이 바로 오늘이다. * 글쓴이는 경제학자로서 양극화 해소에 관심이 많으며, 평생 화두로 삼고 있는 주제는‘사람과 경제 그리고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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