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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궁은 피아노, '광기'의 글렌 굴드
[20세기를 거쳐간 인물들] 자신의 개성을 피아노 연주를 통해 토해내
 
두부   기사입력  2005/11/24 [16:40]
"예술가는 대중의 변덕이나 사회경제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재능을 무기로 대중을 휘둘러서도 안 된다."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말이다.

▲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 대자보
1955년 1월 뉴욕에서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며 찬란한 피아니스트 생활을 시작한 굴드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세 살 때에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고, 다섯 살 때에는 작곡을 하기도 했다. 사춘기부터 즐겨 듣던 바흐의 곡 중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발표한 것은 그가 약관(弱冠)를 세 해 넘긴 나이에서였다. 굴드는 이후 10년 동안 광기어린 피아니스트였다.

1957년 레오나르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뉴욕 필하모니와 협연, 냉전기 소련에서 2주간의 연주회, 유럽 순회 공연 당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협연 등 그의 연주는 광풍을 몰고 왔다. 뉴욕 데뷔 당시 『타임』은 "노(老)거장 바흐 자신의 연주였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피아노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유명한 음악가에게서 사사받은 적이 없던 그는 자신의 개성을 피아노 연주를 통해 토해냈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연주를 두고 '미친 놈의 연주'라고 힐난했다. 1964년 3월 시카고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끝으로 대중과 유리된 그는 '익명성'을 강조하며 음반 리코딩에만 열중했다. 10년 동안의 시기를 ‘끔찍하고 불안정하고 불쾌한 시기’라고 회고한 그는 대중의 인기를 뒤로 하고 피아노의 세계로 잠입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글렌 굴드는 193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음악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그는 가정의 음악적인 분위기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베레모, 두터운 코트, 머플러, 장갑, 약병, 심기증, 고무 의자, 생수병, 삐딱한 연주 자세, 스타인웨이 피아노, 편식주의자, 평화주의자, 대인 기피증, 결벽증, 에어콘 혐오, 이스라엘 항공사 등은 그를 상기시키는 오브제였다.

그는 자신이 녹음한 곡은 절대로 녹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1981년 다시 녹음하였고, 1982년 이 음반은 그에게 그래미 상을 안겨주었다. 50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그해 10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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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1/24 [16: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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