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끝내 현해탄을 건너지 못한, 천재화가 이중섭
[20세기를 거쳐간 인물들] 식민지와 분단, 암울한 시대 요절한 천재화가
 
두부   기사입력  2005/11/05 [13:40]
<1956년 9월 6일 오전 11시 45분 간장염으로 입원가료 중 사망, 이중섭 (만)40세> 화가 이중섭의 부음을 알리는 글이 서대문 적십자병원 영안실 흑판에 남겨졌다. 신산했던 그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한 줄의 문구였다. 더구나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3일간 영안실에 방치되다가 친구들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다.

▲ 이중섭 화백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 불리는 이중섭은 1931년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화가 임용련·백남순 부부에게 미술을 배운 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 제국미술학교, 문학학원 미술과에서 공부했다. 문화학원에서는 평생의 반려자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을 만났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들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이듬해에는 제주도의 서귀포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이남덕은 아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때부터 둘은 이중섭이 죽기까지 3년 여 동안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시절 이중섭의 그림 제목에는 '가족', '아이(어린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는데, 아내가 보내준 가족사진을 보고 '마시고 싶을 만큼' 그들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우동과 간장으로 하루 한 끼'를 때우는 날이 잦았다. 그럴수록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이중섭은 1955년 1월 미도파백화점 4층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은지화가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해 대구 미문화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가족과 헤어진 이중섭은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부족과 신경쇠약 증세가 있어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며, 하루 빨리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바랐다.

이중섭은 1916년 4월 평안남도 부농의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보통학교 4학년 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결혼한 이듬해 첫 아이를 얻었지만 디프테리아로 자식을 잃었고 그후 태현·태성 형제를 두었다. 턱이 길다고 해서 ‘아고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어머니가 직접 지어 주신 '대향(大鄕)'이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아내를 '발가락 군'으로 불렀다.
 
이중섭이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의 제목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5/11/05 [13:4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