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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초인처럼 살다 간, 시인 이육사
[20세기를 거쳐간 인물] 시를 짓기보다 독립운동을 먼저한 저항시인
 
두부   기사입력  2005/12/05 [15:21]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볼 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시 「절정」의 마지막 연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강렬하고 또렷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초극의 의지를 드러내는 시어들을 많이 사용했다.

▲ 시인 이육사의 생전 모습    
이육사는 1930년 1월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는 ‘자오선’ 동인들과 잠시 활동했을 뿐 이후 어느 유파나 동인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문단 활동은 193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집중되었으며, 남긴 시도 채 40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조국의 독립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절정」·「광야」·「꽃」 등은 조국의 암울한 상황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청포도」·「자야곡」 등은 고향에 대한 애잔한 감상을 도드라지게 나타낸다. 그의 시는 웅장하고 호방하며 지사적인 절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927년 베이징에서 귀국한 이육사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장진홍 의거)의 주모자로 몰려 형제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주인공인 '장진홍'이 일본에서 체포되어 3여 년만에 풀려났다. 이후 수차례 검거와 투옥과 석방이 반복되는데, 17번이나 투옥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에겐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힐 만큼 요시찰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때 중국의 군사학교를 다녔는데, 권총 명사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노신과 만나기도 한 그는 노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노신추도문」을 발표하고 『조광』에 「고향」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중국과 본국을 오가며 조국의 독립에 열정을 쏟은 그는 결국 1944년 일본 헌병대에 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당했다.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원록이었으나, 그의 수감번호라고 추측되는 ‘264’를 취음하여 '이육사'를 주로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고, 보문의숙·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18세가 되던 해인 1921년에 결혼하고 2년 후에는 일본에서 1년간 유학해 신문물을 배웠다.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조국 광복 한 해 전이었다. 폐병으로 약한데다가 고통스러운 감옥생활을 이기지 못한 결과였다. 1946년 서울출판사에서 그가 남긴 20편의 시를 모아 유고시집 『육사시집』를 간행했다. 당시 책값은 2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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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2/05 [15:2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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