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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가 좌파? 좌파를 위한 변명
[논단] 우리당 우왕좌왕 수구공격 자초, 좌파적 가치 수용하는 발상필요
 
이태경   기사입력  2004/11/21 [18:48]
미국의 작가 호손이 쓴 장편소설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를 보면, 주인공 헤스터 프린이 간통하여 아이를 낳은 후 간통한 벌로 공개된 장소에서 'A(adultery)'자를 가슴에 달고 일생을 살라는 형을 선고받는 대목이 나온다.
 
헤스터 프린이 공개된 장소라면 어디서나 가슴에 새기고 다녀야 했던 주홍글씨는 일종의 사회적 낙인(烙印)으로써 그녀가 간통을 한 부도덕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는 그녀와 생면부지의 사람조차도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본 순간 그녀에 대한 평가를 끝내게 만드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청교도 시절에 맹위를 떨쳤던 주홍글씨라는 낙인이 새롭게 변형된 형태로 2004년 한국사회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변형된 주홍글씨는 이른바 '좌파'라고 불린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은 연일 현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매도하며 몰아세우기에 급급하다. 또한 사립학교법 개정의 결사반대를 외치는 사학재단의 이사장들과 국가보안법 사수에 목숨을 걸고 있는 보수인사들도 '참여정부는 좌파다'라는 합창에 성심을 다해 동참하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부 경제학자들조차 이러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이 참여정부를 '좌파'라고 규정짓는데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거나 근거가 있더라도 너무나 미약하기에, 이들의 주장은 '논증'없는 '선언'만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참여정부의 어떤 이념과 정책이 좌파적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투지 않는다.
 
▲한국의 분단상황에서 좌익 좌파는 수구기득권의 '딱지와 낙인'에 불과한 것이었다. 21세기 좌파(좌익)의 역할은 더욱 넓다. 이를 외면하는 정치세력은 청맹과니일 뿐.     © 인터넷 이미지(출처미상)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이 참여정부가 좌파적인 이유를 꼼꼼히 따지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싶은 것이 기실 한나라당과 참여정부 사이에 존재하는 이념적, 정책적 차이점은 전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매우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미 고종석 기자가 쓴 것처럼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이 참여정부를 지칭할 때 애용하는 '좌파'라는 말은 '주는 것 없이 미운 놈' 혹은 '보기 싫은 놈'이라는 뜻에 가깝다고 해야 온당할 것이다.
 
물론 이들이 참여정부에 좌파의 훈장을 수여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대중들이 좌파라는 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기억과 평가를 떠올리게 해서 참여정부에 염증을 내게 하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데, 이는 좌파라는 호칭과 평가에 대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의 반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좌파라는 평가를 접하고 있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의 반응은 단호한 부정과 격렬한 반박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 싶다.
 
즉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조차도 한국사회에서 '좌파'라는 규정과 평가가 갖는 부정적 의미를 매우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이들은 좌파가 아니며 이들이 기반한 이념과 이들이 추진하고 있는 정책 어디에도 좌파적 요소는 발견하기 어렵다.
 
현재 이들이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4대 입법은 좌파나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라는 잣대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이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4대 입법은 한국사회를 상식과 정상의 사회로 조직하는 첫 걸음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나마 누더기가 된 개정안을 부여안고 집권(?)야당과 수구언론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모습은 비극을 넘어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최근 종합부동산세 도입을 둘러싸고 갈팡질팡하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을 보자면 이들이 표방하고 있는 개혁의 정체가 무언지 정말 궁금해진다.
 
개혁이라는 단어에서 기표(記標)와 기의(記意)가 분리되어 각각 비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현재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는 개혁을 바라보는 솔직한 심정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을 줄기차게 좌파라고 낙인찍고 있는 조중?등 수구언론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이 이들을 정녕 좌파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의 지적능력은 의심받아 마땅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불리는 측이나 불림을 받는 측이나 그토록 불명예스럽게 여기는 '좌파'라는 표지(標識)가 진정 혐오스럽고 부정적이며 더 나아가서 제거되어야 하는 사회악인가 하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좌파가 갖는 부정적 함의는 무엇보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경험한 집단적 역사와 기억으로부터 기인하는 바가 크다.
 
분단과 좌·우의 극렬한 대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좌파라는 용어는 살육과 파괴의 다른 이름을 의미했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권과 북한의 존재로 말미암아 좌파라는 단어는 독재와 억압, 비민주성과 비인간성 그리고 무엇보다 빈곤을 지시하게 되었다.
 
또한 권위주의정권이 장기집권하면서 정치적 반대자들을 좌파-흔히 빨갱이로 불렸다-로 몰아서 감금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기에 한국사회에서 좌파로 낙인찍히는 것은 정치적 박해를 넘어서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좌파가 흔히 맑시즘, 그것도 소련의 교조적 맑시즘과 동일시되면서 초래한 혼란이다. 사실 좌파 안에는 매우 다양한 이론과 흐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는 간과된 채 현실에서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소련의 교조적 맑시즘이 좌파의 적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교조적 맑시즘을 통해서 좌파를 이해했고 흔히 프롤레타리아독재-현실정치에서는 철저한 일당독재였다-와 생산수단의 국유화, 계획경제 등을 좌파정책의 핵심으로 인식했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사회주의권이 내적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눈사태처럼 무너지자 사람들은 좌파에는 취할 것이 전혀 없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렸고, 뒤이은 미국의 세계지배와 신자유주의에 의한 무한경쟁의 홍수속에서 좌파라는 이념과 가치는 익사했다.
 
요약하자면, 한국사회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좌파의 이념이나 정책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권위주의정권에 의해서 왜곡된 창을 통해서 좌파를 부정적으로 이해하였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좌파와 동일시된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는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좌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부정적 이해를 확신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좌파가 추구했던 이상과 정책들은 더 이상 재고(再考)할 필요도 없는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불행히도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제 그렇지 않은 이유를 살펴볼 차례다.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거의 수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실익은 주로 경제부면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좌·우를 막론하고 현존하는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유선거와 정당제, 국민주권 등을 인정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러한 지적에 동의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흔히 우파가 평등보다 자유를 더 가치있게 여기고 좌파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파는 시장에 우호적이고 좌파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선호한다고 평가한다. 이는 매우 도식적인 구분이긴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창백한 이론적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 이념적 토대나 이를 실현하는 정책에서 좌·우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우파의 입장에 많이 치우쳐 있는 미국의 구성원들 보다 좌파에 가까운 서유럽 여러나라의 구성원들이 훨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구성원들의 대체적인 소득 수준에서나 불평등 정도, 소수자에 대한 존중의 정도, 사회보장제도의 수준,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행복의 수준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위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 한국사회를 어떻게 조직하고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서 절차적 민주주의 차원에서는 세계 어느나라 보다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공공연히 내란을 선동하고 있는 많은 수구인사들이 아무런 제재나 처벌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물론 정치적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 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부문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구현이다. 경제적 곤궁으로 인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반대편에서는 천만원짜리 상품권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이문제 보다 더 긴요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국 이후 이른바 '우파'가 주문처럼 읊조리고 있는 성장과 효율이라는 가치만을 맹신한 결과는 내전 전야를 연상케하는 소득양극화와 극도의 내수부진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유방임이라는 지고의 가치는 부동산 투기의 자유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장의 기능을 부정하지 않고 기계적 평등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좌파가 추구하는 이상 가운데서 많은 부분을 취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일쑤 불가능하게 보이는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형평과 효율이 양립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좌파적 이념과 가치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우파와 좌파의 장점을 구현한 정책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피할 수 없는 과제임이 분명한 이상 이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 등장하는 톰 조드의 목소리는 좌파가 지닌 본질의 한 단면을 잘 설명하고 있다.
 
"네가 어디를 둘러보든 나는 거기 있을거야. 굶주린 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에 나는 있을거야. 경찰이 시민을 폭행하는 곳에 나는 있을거야… 사람들이 격분하여 고함을 지르는 곳에도…사람들이 스스로 지은 집에 살며 스스로 재배한 식량으로 연명하는 곳에도 나는 있을 거야."  / 편집위원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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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1/21 [18:4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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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리티즌에서 2004/11/23 [01:13] 수정 | 삭제
  • 이태경/ 일단, 대문 추천합니다.

    다만, 앞으로 미래사회의 핵심 지향점을,,시장경제 자본주의 체제로 상정하고 있는 점엔 동의하지 못합니다.
    미래 사회의 사회 체제가 반드시 시장-자본주의이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사회주의 사상이
    교조적 사회주의(스탈린주의)와 시장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대안이 될 가능성을 미리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한계는 바로, 미래의 사회체제마저
    시장자본주의체제일거라고 당연하게 기본전제로 상정하면서
    얘기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건, 그 스스로가 시장주의을 신뢰하고, 자본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보기엔 시장-자본주의의 아쉬운 부분(?)
    -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모순점 -을 사회주의 사상이나 좌파적 생각들이
    어느정도 보완해주길 바라고 있지요.
    그가 좀 속물적인 식자층이라면,
    사회주의도 좀 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거나,
    혹은 아량넓은, 열린 자유주의 지식인으로 보이고 싶거나...
    사회주의를 지적 액서세리 쯤으로 생각하는 자유주의 식자층들이 많은데,
    아마도, 중용의 덕을 높히 보는 유교적 지적풍토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태경 씨는 그런 후자의 부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량하자는 사상이 아니라,
    아예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기 처분하자는 사상입니다.
    이태경씨가 못내 아쉬워하는 자본주의의 약점은 단순한 약점이 아닙니다.
    기층 민중들을 쥐어짜내고, 민주주의, 자유, 평등을 실질적 내용측면에선,
    크게 왜곡, 훼손시킵니다.
    사회주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돈 많은 자일수록, 더 자유롭고,
    그들의 이익이 더 잘 관철되는 그들 중심의 민주주의입니다.
    결국 세상이 교과서에 써 있는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갈파했던 겁니다.
    물론, 스탈린주의=교조 사회주의 체제에선,
    자본가 역할을 당관료들이 대신한 거고요.

    진정한 사회주의자라면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평등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회주의 사상들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폐기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토론과 논쟁이 있습니다... 논쟁과 토론이 허용되어야 발전도 있습니다. 사회주의 근본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 역사를 보면, 사회주의 본령의 민주주의를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지배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사상을 도식화해서 도그마로 만들어버린 집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탈린 추종자들입니다. 스탈린주의와 아류 스탈린주의는 사회주의와 전혀 무관합니다.
    따라서 "현실 사회주의"라는 말보다는 스탈린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사회주의가 제대로 실현된 나라가 어디 한 나라라도 있었습니까? 다들 스탈린주의거나 그 아류였지요...
    중국,북한,쿠바...다 스탈린주의 아류입니다.

    아무튼, 한국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우익 가치관 쏠림현상을
    정확히 비판한 점엔 적극 동의합니다.

    폴티 한쪽에서 불고 있는 새로운 분위기에
    뭔가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는지,
    요즘들어서, 노빠 아이디들과 수구계열 난닝구 아이디들이
    좌파 때리기, 조중동 사설 외우기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매우 시의적절한 글입니다.

    대문글로 적극 추천합니다 !!!!
  • 포도청 2004/11/22 [19:56] 수정 | 삭제
  • 이 글도 안티조선사이트인 '우리모두' 메인화면 [조아세가 제공하는 언론관련뉴스] 코너에 게제되었군요.
  • 관리자 2004/11/22 [02:52] 수정 | 삭제
  • 원고를 꼼곰히 살피지 못햇습니다. 지적이님 덕분에 대자보가 내용도 형식도 완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감사를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