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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게서는 빨간 장미 꽃이 짓밟힐 뿐이다
생명 창조시대의 자기경영35
 
이동연   기사입력  2004/03/12 [09:29]

개인의 자율성이 우선인가,

개인들의 생산적 연대가 우선인가는 늘 철학과 사회학의 주요 논쟁거리이다.

사실 이 두 논쟁의  그 극단은 동일하게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개인의 자율을 끝없이 확대해 보자.
그 끝에는 결국 파편화된 원자로서의 개인이 아무 목적의식 없이 거대한 지구에 투기된 채 방황하며 서 있다. 반대로 연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개인은 간데 없이 실체 없는 거대 담론의 그물망의 그림자가 공동체를 덮게 된다. 

이 두 논쟁의 종지부를 간단하고 명쾌하게 끝낸 철학자가 러시아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피사레프(Dmitry Ivanovich Pisarev)이다. 피사레프는 '당신이 휴식할 때는 개인에게 속하나 일할 때에는 공동체에 속한다.'라는 말을 하며 개인의 이기적 욕구와 사회적 요구의 조화를 모색한다.

무엇이든 작위적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모두 그 일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파만파를 일으켜 공동체 전체에 파급된다.  여기서 파사레프는  개인이 공적일에 참여할 때 - 파사레프에게 있어서 모든 일은 다 공적이다 - 는 개인의 주체적 자율을 접어두고 공동체의 건강성을 함양시킬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정반대이다.

개인의 자리인 휴식과 사색에서는 철저히 선행 학습과 종교, 가치관들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의외로 공적영역에서는 무한한 자신만의 주체적 자율을 추구하려 한다. 소위 관리자 윤리, 즉 통치자의 길이 다르다는 묘한 말을 하면서.
 
파사레프는 사회의 운영기제인 정치, 언론, 종교가 사적영역에서의 개인 - 거짓말, 음주, 흡연, 성적 방종, 등 등 - 은 비난하면서도 공적영역에서의 탐욕과 스캔들, 부패등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용스러운 모습들을 익히 보았다.

파사레프는 이러한 사적영역에서의 부 자율성과 공적 영역에서의 지도자들의 지나친 자율성의 탓을 일정부분 플라톤의 관념론에 책임을 묻고 있다.

오늘날 플라톤 철학의 물이 들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특히 개인의 보물 창고는 가득 채워 놓고 공적인 자리에 나와서 얼굴을 비추며 도적군자연하는 사람들일수록 본인의 의식 여부와 관계없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깊이 심취해 있다.

천주교의 주류신학이 아리스토 텔레스적이라면 개신교의 보수신학은 철저히 플라톤적이다.

미국의 주류(WASP)도 물론 플라톤적이며 그 주류 틈바구니에서 학습받고 온 한국의 대다수 지식인들도 역시 플라톤적이다
   
플라톤적 지식은 귀족과 평민을 나눈다.

플라톤 스스로가 귀족출신이었으며 그는 현자들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꿈꾸었다. 그 이상국가에서는 이성을 가진 즉 머리를 쓰는 통치그룹이 다스리고 용기를 덕목으로 가진 전사들이 그 나라를 지킨다. 나머지 욕망 덩어리들인 일반 민중들은 열심히 일해서 저통치자 그룹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이상 국가에서 민중들의 덕은 절제이며 복종이다.

반면 통치자들은 민중들에 대해 아무런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민중들의 통치자들- 소위 관리자들-에 대한 복종에는  한계가 없다.
민중들에게 있어서 고발정신, 강력한 비난, 의문, 자유로운 개인 등의  요소는 플라톤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운 것들이며 이상국가에겐 최대의 적들이다
 
위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다. 지금도 위와 같은 프레임으로  사회를 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두가지 만을 보기로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툭하면 터져 나오는 인재풀 타령이다. YS와 DJ때부터 노무현정권까지 개각할 때만 되면 오피니언 리더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정권의 인재풀이 빈약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인재는 무슨 인재를 말하는 가? 그들이 말하는 인재란 결국 이 사회의 비 주류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그동안 주류속에서 기생하며 살아온 교수나 학자, 관료 등을 더 많이 기용하지 않고 있다는 푸념에 불과하다.
  
인재?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 지명도 높은 자리는 꼭 교수나 저명인사나 교위관료들만 맡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국가야말로 플라톤이 망상했던 이 땅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않되는 이상국가(理想國家)가 아닌 이상국가(異常國家)일뿐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보통 수준의 지성을 가진 이 나라의 사람들이라면 다 인재이다.

오히려 고도의 기능을 요구하는 전문가의 자리보다도 중립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선한 의지가 필요한 고위직일수록 대한민국의 보통시민들이 자기변호에 능통한 사람들 - 인재라고물리우는 사람들 - 보다 훨씬 더 적합하다. 따라서 인재 풀은 언제나 충분하다.

다음은 요즘 불붙고 있는 고액 연봉에 관한 것이다. 침체한 한국경제의 해법으로 미국물을 먹은 사람들일 수록 플라톤적 미국 경영원리를 도입하라고 입이 마르도록 여기저기 강연하고 다닌다.
경영자들에게 더 많은 고액의 연봉을 주어야만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공적영역에서의 무한한 보상은 곧 대다수 개인들에 대한 착취임을 모를까? 이미 미국이 고액 연봉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위화감 해소가 국가적 과제로 되고 있다고 있다는 소식에는 왜 그들은 귀를 막는가?
반면 한국노총의 이남순 위원장 같은 이는 고임금고물가 체제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며 저 임금, 저 물가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참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이게 모두 플라톤적 사유의 여파이다.

플라톤은 순수 사유의 영역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함으로 실제적 삶의 경험과 역사적 현상들을 무시하였다.  플라톤은  감각세계를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가상(假象)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도 플라톤은 늘 자신이 대중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피사레프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가지고있는 폐해를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은 삶의 역사적 현장과 경험들을 간과하고 있다.'  
 
파사레프적 렌즈로 플라톤에 물든 사회를 들여다 보면 조직의 힘, 즉 공적영역에서의 비리와 오버액숀이 용인되며, 그와  반비례하여 개인의 입지가 자꾸 축소되는 현대사회의 모순은 철학이 곧 삶의 경험과 동떨어진 자리에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철학은 시장, 전쟁터 심지어 하수구통에서 발생했다.
이런 철저한 현장 중심의 철학이 상아탑속으로 들어가면서 철학은 개인을 억누르고 공적개인들에게는 과도한 영광과 칭송을 돌리게 된 것이다. 철학이 실제경험과 같이 가지 않고 지금처럼 경험과 단절되어 있다면 익명의 개인들은 계속해서 오스카 와일드의 나이팅게일과 같은 처지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나이팅게일은 여러 작가들의 작품소재로 다뤄진 새로 꾀고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넓은 옥타브와 풍부한 성량으로 어느 새도 따라 오지 못할 아름다운 소리를 지저귄다.

영국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나이팅게일'은 특히 나이팅게일을 타인의 사랑을 이루 어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지고지순한 새로 그리고 있다.
   
한 가난한 학생은 교수의 딸인 미모의 소녀를 사모한다.

그 학생은 사모하는 소녀를 안고 왕자의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추려면 빨간 장미를 갖다 주어야만 한다. 철학을 공부하던 학생은 장미를 빨간 찾으러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그러나 빨간 장미는 아무데도 없었다. 
'아! 철학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현자들의 가르침도 다 알고있건만 빨간 장미 한 송이가 없어 내 인생은 결국 가련하게 되는구나.'
  
학생의 푸념을 듣고 있던 나이팅게일이 빨간 장미를 꽃 피우기 위해 달빛에 더 뽀쪽하게 빛나는 장미나무의 가시를 자신의 심장에 찌른 채 생명의 노래를 부른다.

가시가 나이팅게일의 심장에 더 깊이 찔러 들어 갈 수록 검붉은 피가 솟구치며 장미 나무의 꽃잎들이 빨갛게, 빨갛게 피어 나기 시작하였다.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가슴을 장미 가시쪽으로 더 쎄게 밀었고, 고통이 커지는 만큼 노래소리도 커졌으며 장미꽃은 심장처럼 빨간 루비의 빛깔로 환하게 피어났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심장에 가시를 찔린 채로 풀밭으로 떨어져 죽었다.

학생은 밤새도록 나이팅게일이 생명을 바쳐 피워 놓은 장미꽃을 다음날 아침에 발견하고 그 장미를 꺽어 소녀에게 달려 갔다. '여기 세상에서 제일 빨간 장미를 가져왔어요. 장미를 주면 나와 춤을 출거라고 말씀해 주셨죠. 자 우리 함께 춤을 추면 이 장미는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열정이 얼마만큼 큰지를 알려 줄 거예요.' 
  
그런데 왠 일일까?

아리따운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그 꽃은 내 옷에 잘 어울리지 않네요. 더구나 시종(侍從)의 조카가 꽃보다 훨씬 비싼 진짜 보석을 내게 주었거든요.'
 
학생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장미꽃을 도랑으로 던지며 말한다.
'아 비정한 사람, 사랑은 어리석은 짓이야, 사랑은 비실용적. 오직 형이상학과 논리가 최고라구'  그러고는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먼지로 가득 쌓인 철학 책을 집어든다. 마침 지나가던 수레가 그 바퀴로 빨간 장미를 짓 밟고 지나간다.
 
작가는 왜 하필이면 장미꽃을 피우게하는 딸의 아버지로 철학교수를 설정했을까? 여기서 철학교수나 그의 아리따운 딸을 탓할 마음은 없다. 아마 오스카 와일드도 그걸 의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단지 나이팅게일의 피맺힌 죽음으로 인해 피어난 빨간 장미 꽃송이가 무참히 짓밝혀 버리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의 대안이라는 게 고작 다시 철학 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는 그 현실에 대해 냉소하고 있다
  
보석이 한 생명을 담보로 피운 장미 꽃보다 더 위대한가?
여기에 철학이 상아탑에서 나올 이유가 있다. 상아탑이 주는 철학 박사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주는 철학 박사가 존중받을 때 보석보다도 빨간 장미꽃이  더 가치롭게 될 것이다
   
보석의 위력앞에 사랑의 진실을 묻어두고 현실에서 도피하여 현실을 단지 그림자로 이야기하며 공허한 추상에 빠트리는 플라톤의 이데아론. 그 삶의 현장을 이미지화시켜 버린  사유를 피사레프는 '악명높은 쓸데없는 유희물'이라며 강도높게 비난한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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