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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 한계, 어떻게 극복하나?
[생명창조시대의 자기경영 41] 불경과 성경, 그 진수(眞髓)만 먹기 2
 
이동연   기사입력  2005/01/31 [04:49]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역사상 어느 혁명보다도 인권을 고양시킨 혁명으로 정치혁명이면서 동시에 당시 황실과 귀족층을 견제하기는 커녕 한술 더 떠 견강부회(牽强附會)적 종교 활동을 하던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격렬한 반대 운동으로 일종의 종교혁명이었다. 
 
당시 혁명 전야에 시민들의 요구 사항 중 하나가 별하는 일 없이 엄격하게 걷어 가는 십일조, 즉 종교세를 고위 성직자들의 호주머니에서 교구 빈민들의 호구지책으로 전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위 사제단은 이를 거절했고 이를 하나의 요인으로 하여 혁명의 불길은 누구도 억누를 수 없게 타올랐다.  
 
이런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사상탐구를 한 헤겔은 종교의 본질을 이성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칸트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성적 주체의 자율을 억압하는 집단 최면효과를 유발하는 종교의 실증성을 본 헤겔은 신에 대한 믿음을 인격화된 이상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시킨다.
 
헤겔식 종교관의 도출은 가장 그리스도와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할 고위 성직자들의 반 예수적 삶에 짓눌린 시민들의 주체적 자율성을 회복해 주는 길을 찾다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늘 우리의 종교는 어떤가?
 
헤겔 당시보다 더 나아졌다고 긍정할만한 풍경이 매우 드물다. 오히려 헤겔 당시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재산권 관리 다툼으로 폭력사태를 일으킨 서울 모 사찰과  모 초대형교회. 둘 다 용역회사 직원들까지 동원해 무술대회를 방불케 한 생쑈를 벌였다.
  
어디 그 뿐이랴. 성직자도 경영인이므로 거액 연봉을 받아야 된다느니 말아야 된다느니로 토론하고 다툰다, 유능한 종교지도자란 신도들에게 신용카드 긁어 종교집단에 내라하면 낼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하고 한쪽에서는 그게 사기꾼이지 종교인이냐고 항의한다. 전부 종교의 본질과는 아무 관계 없는 개인의 욕심채우기에 불과하다.
 
이런 정황에서 유달리 신심(信心)이 강한 사람들은 어디의 무엇을 의지해야 하나. 욕심과 다툼이 판치는 세상살이에 지친 심신을 절간에 가서 교회당에 가서나마 위로 받고자 쫓아 가 보지만 거기에도 또 다른 욕망의 넘실댄다. 
  
어디로 갈 것인가?
 
차라리 모든 종교를 폐기 처분해 버리면 될까? 그도 그리 쉽진 않다. 인간에게 죽음이 존재하는 한 허무가 존재의 심연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이 허망감(虛妄感)은 곧 영원에 대한 대망감(待望感)으로 전이되어 종교를 찾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대안은 하나. 예수와 부처의 원색적 가르침을 직접대하는 길 뿐이다. 예수와 부처의 본래 정신을 만나려면 설법이나 강론 설교를 듣는 횟수를 줄이고 경전을 직접 대하라. 그외 필요하다면 1주일에 한번만 종교 시설에 가도 충분하다.
 
부처의 불자가 아니라 내 불자,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내 교인 만드는 비법중의 하나가 불경과 성경을 직접 읽게하기 보다는 내 사찰, 내 교회에 와서 주지나 목사가 읽어서 풀이해 주는 언어를 통해 부처나 예수의 말을 들으라는 전략이다. 한국에 세계 거대종교의 대부분을 세울 수 있는 주요한 방책은 매일 치성을 드리게 하기 때문이다. 아침, 저녁 낮 할 것 없이 가능하면 마구 경내로 불러 들여 자꾸 지도자에게 유리한 경전 해석을 들려 준다.
 
예수나 부처의 사후, 예수 공동체와 붓다 공동체가 비슷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불교는 부처의 후재(後在)를 증명해야 하는 곤란에 직면했고, 기독교는 예수의 선재(先在)를 증명해야만 하는 난제를 안게 되었다.
  
인연의 법을 인정하는 부처의 전생을 입증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정작 어려운 일은 신은 해탈하지 못한 인연의 법에 얽매인 존재에 불과하여 해탈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해탈은 존재의 소멸이다. 그렇다면 부처의 후생은 어떻게 되나? 만일 부처가 신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다면 불력을 힘입고자 하는 사부대중들의 바램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가 교단 번창의 핵심이 된다
 
기독교는 불교와는 고민의 목적은 똑같으나 고민의 양상은 반대였다.
예수는 부할을 스스로 언급했기 때문에 예수의 후재증명은 교리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허나 예수가 마리아에게 태어났는데도 다윗과 아브라함의 선조라고 하는 이 부분을 증명하는 일이 기독 공동체의 큰 과제였다. 신이란 선조도 없고 후손도 없어야 하기에.
 
예수의 선재나 부처의 후재증명 노력 역시 교인 유치를 도모하고 교단 번창을 시도하려는 일환이다. 그래서 후세의 신학이나 설법, 강론. 설교들을 접할 때 원래의 부처나 예수의 말들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 가를 구분해야만 한다.
 
그 차이를 구분하는 중요한 준거점은 예수의 구원사상과 부처의 해탈사상이다. 예수의 구원은 자기 죄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죄는 이기심이다. 죄는 온갖 악독과 부정과 불의이며, 여기서의 해방이 구원이다. 이기적 충동의 이끌림에 벗어난 자유 바로 그 자유가 예수의 이상이다.
 
부처의 해탈은 관계에서의 자유이다. 심지어 가족주의까지 극복하는 것이 해탈이다. 모든 얽매임에서의 자유인 해탈은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구원보다도 더 극단적이며 포스트모던하다.   
 
오늘 우리와 비슷한 종교적 혼돈의 시기에 살았던 헤겔이 본 예수, 헤겔이 작성한 '예수 스스로의 자기 서술'을 보면 성경과 불경을 보는 새로운 안목이 가질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게 무언인가, 나에 대한 믿음? 나의 인격에 대한 요청? 나의 발견물로 인간을 이끌 척도를 설정하고 너희에게 강요하려 했더냐? 아니다. 너희 자신에 대한 존중, 너희 양심, 너희 내적 영도자로서의 이성의 신성한 법칙에 대한 믿음에 대해 주의를 기우리도록 일깨우고자 했을 따름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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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1/31 [04:4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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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도 2005/04/27 [16:46] 수정 | 삭제
  • 필자는 종교에 대해서 매우 해박한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낯익은 글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디서든 굴러다닐만 내용들이다. 딴에는 논리적으로 펼치고 있는 듯 하지만 내용적 알맹이는 별로 없다. 그리고 해탈이나 구원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만일 그러한 진리가 냄새나는 이런 머리에서 깨달음이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진리가 될 수 없다. 당신이 정말 해탈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면 진자 해탈을 해보든지, 구원을 받아본 후에 말하시는 지당할 것 같다.
  • 빈수레 2005/04/13 [02:44] 수정 | 삭제
  • 종교를 추월해서 그저 마음 비우기를 생활화 하다보면 빈마음은 곧 신성으로 채워길것으로 생각됨니다.

    신성의 마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겐 하나님으로 채워질것이고 불교를 믿는다면 불성으로 채워지리라 생각되는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위한 믿음이 아닌 저마다 저를 위한 믿음으로 마음비우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 노다지 2005/03/13 [16:06] 수정 | 삭제
  • 계시록에 거짓 선지자들 있지요, 그것이 요즘 교회 목사들이라고생각합니다, 사실 요즘 교회나 목사들은 예수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왠고하니 예수가 직접 교회를 세우라고 한 말은 어디에도 없는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예수가 한 말의 근본 해심은 장차 지상천국이 세워지고 예수가 만왕의 왕으로서 다스리는 천국이 세워지는데 이곳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복락과 평화를 얻을수 있다는것 아닙니까? 계시록에 그 성읍에 대해서도 나오고요,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진실하고 거짓이 없고 죄를 짓지 않는 자라야 하는데 가진 부자들이 온갖 악독한 짓으로 돈을 벌고나서 나중에 목사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고 죄가 없어지지는 않지요,
    한마디로 목사나 신부가 예수는 아니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월권행위를 하는것이지요, 이것은 거꾸로 모순되게 목사나 신부들이 예수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것이기도 하고요, 그럼 예수를 믿고 나중에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다른거 없지요, 거짓을 행하지 않고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 살면 되는것입니다, 죄가 없는자는 하나님도 어찌할수 없다는게 성경의 핵심인걸로 아는데요.
    주제 넘었나요? 목사님 앞에서....
  • 밀감 2005/02/24 [11:12] 수정 | 삭제
  • 뭔가 허전하던 차
    이동연님의 보도를 접한 후
    인터넷서핑 엄청해 만났습니다
    글잘 읽고있구...
    맘이 평안해지네요..
  • 심규성 2005/02/08 [18:50] 수정 | 삭제
  • 저는 한가총/토론광장에 글을 올리고 있는 심 규성 입니다.

    011- 363 - 9041 kamyo2000@yahoo.co.kr

    미니 홈 http://kr.blog.yahoo.com/kamyo2000

  • 심규성 2005/02/08 [18:43] 수정 | 삭제
  • #. 그럼 어떻게 행야 하나? 13번째 줄에 '그러나 해탈은 존재의 소멸이다'라는 해석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선을 토대로 해석한 것이겠으나, 본 의미는 불교의 원인인 선사상에서 있는 것이므로 배우고 들은 것을 근거로한 해석은 무리한 해석이다.

    이 동연 님은 목사 이신가보군요.

    [선]은 땡추 보다 중이 더 잘 알고, 목사 보다 더 잘 압니다.

    어설피 아는 것으로 나서면 득 보다 실이 많습니다.

    그럼 목회에 전력하시길 바랍니다.
  • 박상우 2005/02/08 [15:56] 수정 | 삭제
  • 조직의 비대화가 진리 동맥경화를 가져 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직기대심리를 제거해 주심을 감사.
    그러나 저자분께서 오프라인 모임을 가져 주시면 더 감사할텐데...
    무리한 요구인지요????
  • 심규성 2005/02/07 [20:27] 수정 | 삭제

  •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와 불교의 문제점을 나타냄에 있어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발전이나 제자리찾기를 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려놓으신 글은 그 문제점은 잘 드러냈으나, 대안은 객관적이고 원론적인 내용으로 나타나있더군요. 이건 왜일까 아마도 해탈과 구원에 대한 설명은 학문적 설명이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탈과 구원 모두는 주관에서 못 벗어나므로 객관적인 잣대 앞에서 이기려함은 스스로 어리섞음에 빠지는 것이된다. 하여 이겼노라 하면 진 것이되고, 졌노라 하면 버려야하니 누가 나서겠는가 그러나 머리에 남는 글귀로는 '지금도 인간에게 죽음이 다가오므로 나이가 들수록 참과 거짓에 지고 이김 보다는 죽음에 대한 궁금함이 더할 뿐이다' * 저의 미니홈은 http://kr.blog.yahoo.com/kamyo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