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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은 '역사왜곡'의 피해자인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야기한 역사왜곡 논란, 본질은 창작의 자유에 있어
 
정문순   기사입력  2024/03/04 [17:13]

TV 사극 드라마 한 편을 둘러싸고 한동안 잡음이 무성했다. 드라마가 세간에 화제가 되는 일은 흔히 있지만 이번 일은 최소한 예술의 권리나 위상이라는 측면에서라도 각별하게 다뤄야 할 점이 있는 듯하다.

 

문제의 방송은 ‘KBS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대하사극’인 ‘고려거란전쟁이다. 고려 현종 시기 거란을 상대로 크게 3차례 총 26년 간 치른 전쟁 중 2차와 3차 전쟁을 32부작에 담아낸 것으로, 지난해 11월 첫 방송을 탔다. 특별기획을 표방했고 오랜만에 만들어진 정통사극답게 방송사의 역량이 총동원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방송 시작 전 대대적인 사전 홍보가 이뤄졌고, 방영 중에는 각종 시청자 이벤트나 유명한 역사 유튜버들의 리뷰 지원 등이 이뤄졌다. 드라마 연출도 사극의 진중함을 떨쳐버린 듯한 빠른 진행, 기존의 전쟁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당대 무기나 갑옷류의 치밀한 고증, 승리로 기록된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면의 비극과 처절함을 무시하지 않은 유연한 태도, 인물들의 전형성을 탈피한 입체적 형상화, 공적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의 발굴, 몇몇 인물들의 재치 있고 현대적인 입담 등 내용과 기술 측면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다 아는 내용이라는 사극의 한계를 뚫고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는 여느 드라마와 다르게 시청자들의 제작 요청을 적극 수용하여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도 시청자의 위상을 높이고 방송사와 시청자가 능동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각별한 점이 있다. 사극에 목마른 시청자들의 목소리는 이전부터 계속 나왔고, 구체적으로 민족사에서 자랑스러운 3대 대첩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귀주대첩과, 이 승전을 이끈 성군 현종을 다루는 사극이 나와야 한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을 소화한 18회 즈음부터, 드라마 자문에 참여한 원작 소설가가 불만을 쏟아내면서 일부 시청자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비난의 핵심은 드라마가 역사 왜곡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현종 임금이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까지 몽진을 했다가 개경에 귀환한 후 전후 수습과 거란의 재침 대비에 몰두하는 부분이다. 몽진 도중, 중앙 조정이 파견한 절도사에게서조차 환영은커녕 신변 위협까지 받을 정도로 참담한 지경에 몰렸던 현종으로서는 중앙 집권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최측근 강감찬과 몽진 도중 도움을 받은 김은부를 투 톱으로 삼아 야심 차게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펼쳐 보인다.

 

 

▲ '고려거란전쟁'이 야기한 현종에 대한 역사왜곡 논란은 창작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재조명 해야 할 것이다.   © KBS


그러나 현종이 전국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 호족을 제압하겠다고 한 선언이 뜻밖에 강감찬의 반대로 난관에 부딪히자 충격과 실망을 이기지 못해 객기를 부리는 장면이 일부 시청자들의 눈밖에 나버렸다. 현종이 강감찬을 파직한 후 말을 타고 궁궐 밖으로 질주하다 낙마하여 사경에 빠지는 대목이, 사료적 근거도 전혀 없으며 고려사에 성군으로 남은 현종을 철없는 아이 수준으로 묘사하는 등 역사 왜곡을 가했다는 것이다. 현종이 추진하는 개혁에 비판적이었던 원정왕후가 남편이 드러누운 사이 냉큼 용좌에 올라 정사에 개입하는 장면도 비슷한 비난을 받았다. 역사 왜곡이라는 일부의 평가는 과연 맞을까.

 

나로서는, 논란의 장면들에서 중앙집권 의지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현종과 그에 반발하는 대신들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박진감이 넘쳤다고 말하겠다. 물론 현종의 낙마 사건은 사서에 근거가 없다. 그러나 현종이 지방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해당 장면들은 그런 과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보여주는 서사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드라마가 피난 중 일개 지방 관리로부터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던 현종이 국가 통치를 다시 짜기 위한 일환으로서 중앙 집권 정책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밀어붙였는지 알려주려고 사서에 없는 서사를 창조했다고 하여 그것을 역사 왜곡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매우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원정황후가 현종이 몽진을 계기로 입궁시킨 훗날의 원성왕후 김씨를 노골적으로 견제한 것에 대해서도 사서에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 궁중 암투극이라는 반발이 나왔지만, 현종이 극중에서 원성왕후의 아버지 김은부에게 개혁 추진을 지시한 사실을 감안하면, 원정왕후의 어깃장 놓기는 현종의 호족 견제 작업과 중앙 집권화를 저지하려는 반개혁세력의 준동이라는 맥락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장희빈 부류 사극의 궁중 여인 암투 수준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물론 이후의 회차에서는 원성왕후를 질시하는 원정왕후의 행태가 과해지기는 한다.

 

여기까지 보면, 드라마에서 역사 왜곡 운운하는 태도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역사를 바탕으로 삼은 창작물이라고 하더라도 사서에 쓰인 그대로 옮기지 않으며 창조적으로 변용을 가한다는 인식이 희박하기 때문임을 절감하게 된다. 역사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흔히 거론되는 것이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삼국지연의를 일컫는다)의 관계다. 삼국지연의는 삼국지에 근거를 두긴 했지만 삼국지연의는 역사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창작물이다. 삼국지연의를 역사에 근거를 둔 통속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적 근거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역사적 사실을 비껴간다고 왜곡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삼국지연의야말로 역사 왜곡투성이이며 삼국지연의를 즐겨 읽는 것은 허구를 역사로 잘못 알아 역사 왜곡에 발을 담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래도 사서에 현종이 말에서 떨어지거나 왕후가 정치에 간섭했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으니 어쨌든 역사 왜곡이며 역사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역사를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사서는 얼마나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드라마의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조선 세종 대에 착수하여 문종 대에 완성한 책이다. 고려 사서 집필은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세종이 벌인 여러 작업 중 하나였다, 선대 왕조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유혈로 무너뜨린 왕조로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게 마련이다. 이런 의도가 관철될 수 없다면 굳이 자기네 역사도 아닌 이전 왕조 역사를 쓰는 데 국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통째로 조선 건국 세력의 시각으로만 재단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사대부들의 왜곡이 가해진 것은 조선 건국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고려 말기 즉 공민왕 집권 말년 이후의 사적에 집중된 듯하고, 그 이전은 고려 당대에 편찬된 기록을 참조했다. 고려사는 역대 고려 국왕의 치세를 다룬 세가에 한해서는 이제현 등이 당대 왕명에 따라 편찬했던 사서의 을 옮겨 담고, 책 전반에서 고려에서 발간된 개인 문집, 잡록도 널리 참조했다고 밝혀놓았다. 즉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 당대 관찬 사서와 민간의 기록, 그리고 조선 편찬자들의 합작물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남은 실록이 전혀 없지만, 고려는 500년 동안 관찬 사서를 계속 생산해 냈다. 사서 편찬 책임자로서 감수국사(무신정권 때는 동수국사’)라는 고위직을 두고 선대 왕의 실록을 편찬해 냈다. 선왕의 실록이 순조롭게 나오려면 선왕 생전에 당대 역사를 그때그때 기록한 사초가 있어야 한다. 고려는 국왕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언동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었다. 고려는 왕의 생전에는 사초 형식으로, 왕의 사후에는 실록으로 기록하여 왕조의 사적을 남겼다. 축적된 실록은 해인사 등에 따로 보관을 해두었고 주기적으로 습기를 말리고 볕을 쬐는 포쇄 작업을 담당한 관리가 있었다.(https://m.blog.naver.com/ddy215/221223084211, 고려가 편찬한 사서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도움을 받았다.) 사서 편찬은 고려만의 전통이 아니었으며, 일찍이 고대 중국의 국가 운영 방침에 기원을 두었다.

 

현종 대와 명종 대의 경우 고려 사서에는 선대의 사서를 어떻게 편찬했는지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이 존재한다. 현종 대에는 2차 거란 침략으로 개경이 불바다가 되면서 기존 사서가 소실되자 다시 자료를 수집하여 태조부터 목종까지 ‘7대 실록, 그리고 무신정변으로 옹립된 명종 대에는 앞선 의종 대 실록을 편찬했다. 이는 모두 선왕의 사적을 기록하여 보존한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고 현종의 경우 사서가 잿더미가 되는 변을 당해 사정이 급박했지만, 편찬 시기 상 각별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현종과 명종처럼 정변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세력의 경우 이전 역사에 대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이나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의종 대부터 말하자면, 고려사절요는 무신정권의 손에 의해 의종 실록에 의도적인 탈락(脫略)’이 가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정작 그 고려사절요조차 무신정변의 원인을 의종이라는 군주 개인의 성품 탓에서 찾기 여념이 없는데, 이런 시각조차 무신정권 손으로 집필된 의종 실록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을 범한 셈이다.

 

또 강조의 쿠데타로 무너진 목종과 모후 천추태후 세력에 대한 온갖 부정적 평가가 가득한 고려사 등도 현종 때 편찬한 7대 실록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클진대, 그 기록이 역사적 진실에 얼마나 가까웠을까 하는 의구심을 일으킨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천추태후에 대해 당대 실록의 책임 편찬자인 최충의 찬을 인용하여 성품이 자종음황’(自縱淫荒, 본디 방종하고 음탕함)하여 역모를 꾀하다 강조 정변과 거란 침입을 불러일으키는 등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평하고 있다. 또 현종 정권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진 최사위의 묘지명에서는 천추태후에 대해 아무런 수식이나 설명 없이 대놓고 한나라의 악명 높은 왕후인 여후로 지칭하고 있다. 군사 쿠데타와 외적의 침략을 패배자인 천추태후의 성품 탓으로 돌리고 그녀가 나라를 망가뜨렸다는 인식은 역사의 승리자인 현종 집권 세력의 일방적 시각일 수 있으며, 고스란히 7대 실록이나 이후 후대 왕의 실록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보게 된다. 고려사가 찬을 인용한 최충은 정종 때 수국사를 맡는 등 실록 편찬의 고위 직책을 역임했다. 즉 고려 당대와 조선 왕조 집권 세력의 의도적인 집필 방향이 스며들었을 고려사 등의 객관적 타당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를 지적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로 삼는 사실 그대로의 공정한 역사 기록에 대한 믿음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번 역사 왜곡 논란의 핵심은 성군암군수준으로 둔갑시켰다는 평가에 있다. 과거에도 역사 왜곡 논란을 빚은 드라마는 더러 있었지만, 방송사 앞에서 트럭시위가 등장하고 급기야 방송사가 결방을 결정하는 등 초유의 사태로 이어질 정도로 파장이 큰 것은 고려의 대표적인 성군인 현종을 자기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미숙한 소년으로 묘사했다는 것인데, 이 지경이면 이번 역사왜곡 논란에서 강력한 국수주의의 흔적을 지우기 힘들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전의 조선구마사’, ‘나랏말싸미등 각각 조선 태종과 세종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의 논란도 그 핵심은 명군이나 성군으로 인정받는 군왕을 폭군으로 격하함으로써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부끄럽게 왜곡했다는 비판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논란은 앞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다. 역사 왜곡 논란의 본질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기실 국수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만약 드라마나 영화에서 암군을 성군으로 뒤집어 다루었어도 이렇듯 격렬한 반응이 나왔을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현종의 낙마 장면이 성군을 혼군으로 격하해 버린 근거라는 판단도 드라마 속 현종의 처지를 감안하면 무리한 측면이 크다.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어린 군주, 목숨이 위협당하는 승려로 살다 하루아침에 보위에 앉힌데다 몽진 길에 쿠데타로 옹립된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초라한지 실감했던 왕에게 원로 대신 강감찬은 거의 유일하게 붙들 수 있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로 그려졌다. 그런 아버지에게 느낀 실망과 낙담이 승마 사건으로 표출되었지만,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현종은 강감찬과의 관계도 회복되고 거침없이 앞만 보고 질주하기만 했던 개혁 드라이브의 속도를 조절하고 호족 견제 프로그램을 정교하게 가다듬을 수 있게 된다. 성군을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통해 진짜성군으로 거듭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봐야 하는 것이다.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성인은 곧 임금을 뜻했다. 성인은 하늘이 내렸고 백성이 택한 완전한 인격체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덕 있는 존재로서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주는 처음부터 성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성장통을 거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부단히 교섭하고 스스로를 갈고 닦고 담금질하며 성인의 경지로 전화해 간다고 하면 지금의 우리 시각으로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출 수 있다. 이 점에서 성장 서사로서 현종의 에피소드인 낙마 사건은 오히려 칭찬 받아야 마땅하다.

 

드라마는 현종 3, 전국 75()에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했다는 고려 사서에서 힌트를 얻어 안무사가 현종이 강력한 개혁의 속도를 늦추고 호족을 구슬리고 포섭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로 해석했다. 참고로 사서대로라면 안무사 파견은 현종이 권한이 비대해지던 절도사를 폐지하고 도입한 제도로 지방호족을 감시하기 위한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다.(최봉수)

 

본 드라마를 비평적으로 보자면 사서 기록과 대조할 일이 아니라 다른 지점에서 논쟁할 여지가 풍부하다. 이를 테면, 시기심에 사로잡힌 원정왕후나, 징집된 두 아들을 전장에서 잃었다는 이유로 현종에게 적개심을 품어 시해를 도모하거나 최질·김훈의 난을 조종하는 허구적 인물 박진의 행동은 모두 행동 동기 면에서 당대 상식으로나 보편적 통념으로나 설득력이 약하게 보인다. 또 신하가 임금에게 배례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 숙이는 인사 방식 등 디테일에서 지적할 점도 있다. 묘하게도 원정왕후와 박진 에피소드 모두 사서에 없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사서에 기반하지 않은 허구적 설정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는 창작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창작물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허구에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드라마는 역사 왜곡 논란까지 올 일도 아니었다. 제작진은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한 듯, 본 드라마가 역사에 상상을 가미한 재창조이니 사실과 다를 수 있다고 진작에 밝혀놓았다. 논란이 될 여지를 애초에 봉쇄한 셈이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 단순명쾌한 명제가 누군가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 번을 양보해 역사 왜곡이라고 인정하자. 이쯤 해서 나는 예술의 본질적 문제를 꺼내 들지 않을 수 없다. 비판자들이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있는 것은 예술은 사회 분야 중 유일하게 왜곡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역사를 걸친 드라마는 그래도 예외라고? 예술이 역사라는 틀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더는 예술이라고 부르기 힘들다. 미꾸라지가 통발을 빠져나가는 것을 일러 발호라고 한다. 예술은 발호가 가능한 분야이며, 자유로움과 발호는 예술의 목숨이다. 미꾸라지가 통발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거부하고 일탈을 시도함으로써 생명력을 얻듯이, 예술의 처지도 이와 같다. 역사적 사실 관계의 틀에 얽매여 자유로움과 상상력이 사라진 예술을 예술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 역사에 쓰인 대로 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몰지각을 드러낼 뿐이다.

 

이번 일로 제작진이 시청자 반응에 움찔하거나 위축되었다면, 이 나라에서 예술의 자유로운 창작이 보장되지 않고 있음이 입증된 셈이며 이런 현상은 계속 강화될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예술작품이 성난 시청자 여론에 부합하는 자기검열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거니와, 사극 드라마는 사서에 없는 창작을 시도하면 피해를 본다는 인식이 굳어질 경우 향후 제작될 사극 환경에도 짙은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것이다. 연전에 조선구마사의 완패로 끝난 역사 왜곡 논란이 고려거란전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듯이 이번의 여파도 향후 똑같은 피해자를 낳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나는 가장 우려스럽다.

 

현종을 역사왜곡의 피해자라고만 하니, 이참에 드라마를 벗어나 실제 역사적 인물로서 현종을 조명할 경우 그의 위상은 피해자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현종의 40년 생애는 파란의 연속이었다. 혼외자로 태어나 고난 속에 성장기를 보내다 쿠데타를 통해 제왕으로 옹립되었고, 전례 없는 거란과의 전쟁을 거듭 치렀으며, 짧은 기간이나마 그 자신도 무신 쿠데타를 당했다. 그러나 드라마 주인공과도 같은 극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모든 간난신고를 이겨냄으로써 고려 역사를 안정적인 궤도에 올렸다. 중국의 성군에 비견할 만하고 이상적인 군주라는 것이 최충, 이제현의 평가다. 그럼에도 군사 정변을 통해 옹립됐다는 점에서 권력 획득의 정당성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비정상적 방법으로 정권을 얻은 권력자들이 으레 그렇듯 현종도 자기 집권의 정당성을 위해 목종 등 선대 사적을 왜곡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에서 역사 왜곡 혐의를 비켜 가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현종이라는 점을 일러 둔다.

 

어쨌든 역사 드라마에 왜곡 논란이 따라붙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예술인 단체에서 뭐라도 한마디 했어야 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창작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수 있는 기저에는 대중문화에 대한 괄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 과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보다 더 영향력이 큰 대중예술의 위상을 생각하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번 사태의 핵심에서 자유로움의 생명력을 침해받은 예술의 위상을 빼놓을 수 없으며, 우리 사회가 창작의 자유를 우습게 치부하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라는 점만은 잊어서는 안된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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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3/04 [17: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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