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태의 참예수를 찾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평신도 교우님들, 교회개혁 주체로 나서 주십시오!
[류상태의 주일편지] 평신도가 주체가 되지 않으면 교회개혁은 불가능
 
류상태   기사입력  2013/10/04 [11:11]
지난 9월 1일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우리 한국 교회의 개혁에 관한 저의 생각을 교우님들과 나누었습니다. 그 동안 이 주제로 글을 쓰면서 제가 제안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목회자 문제
2) 재정문제 특히 십일조와 목회자 납세 문제
3) 성서의 재해석과 배타교리 수정의 필요성
4) 예수님에 대한 재해석
5) 배타적 원시 유일신 신앙 극복


하지만 목회자들이 주도하는 교회개혁은 표피개혁에 머물 뿐 심층개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밥줄을 스스로 끊을 수도 있는 개혁의 중심문제에까지 망설임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교우님들의 참여가 절실한 이유입니다.

1. 열린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

“우린 나중에 절대로 저렇게 살지 말자!” 신학생 시절, 옳지 못한 일과 타협하거나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선배 목사들을 볼 때마다 동기생들과 울분을 토하며 다짐했던 말입니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선배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동기 목사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떳떳하게 살아온 건 아닙니다. 제가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은 지난 2004년 ‘학교 내 종교 자유’ 문제로 교단과 학교를 떠난 이후부터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는 저 역시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교단과 학교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살았던 못난 목사였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타협의 길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교우님들께서 충분히 짐작하실 터이지만,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조금 더 자세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주 주일편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대학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도 예수님과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기 위한 저의 고뇌와 마음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저의 신학을 어느 정도 정립하여 신앙적인 고민과 갈등이 거의 사라졌을 때는 목사가 되고 난 후에도 십여 년이 더 지나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대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팎에서 배타적 교리와 공격적 선교로 인한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마음속에서 수없이 고함을 쳤습니다. 하지만 막상 강단에 서면 교리가 정한 금단의 벽을 넘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 찾아올 일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 그것은 저 자신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감을 갖게 하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제자 아이가 일으킨 사건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교와 교단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바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해야 할 말을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교단이 허용하는 선 안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2. 신학생들의 고민과 선택

제가 그랬던 것처럼, 목사안수를 받고 현장에 뛰어든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 괴롭히는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부끄러움 없이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한국 교계의 현실입니다. 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신학생 중 절반 정도가 겪게 되는 고뇌와 갈등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모든 신학생’이 아니라 ‘신학생 중 절반 정도’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른바 ‘보수정통’을 자처하는 교단의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현장에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얘기는 조금 후에 나누기로 하고, 확고한 신념과 사명감으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예기치 않은 문제에 부닥쳐 적잖은 내적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라 하더라도 교인들에게 ‘평신도를 위한 기초신학’조차 가르치는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하여 신학생들은 대부분 신학교에 들어와서야 현대신학을 제대로 배우게 되는데, 확신에 찼던 과거의 신앙이 도전을 받으면 학생들은 충격을 받으며 본능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특히 성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 중에는 교수님에게 대든다든가, 시험문제를 백지상태로 제출하는 등의 저항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이것이 사탄의 음성이라면 성령님께서 지켜 달라.”고 수업시간에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충격과 부정’의 단계를 지나면 학생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1) 후회하는 학생들 - 확고한 보수 신앙을 갖고 있는 학생들 중에 신학교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학교를 떠나기도 하지만 학교에 남는 대신 귀를 닫기로 결심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현대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 학생들은 과거에 갖고 있던 확신을 그대로 간직한 채 목사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과정을 참아낼 뿐, 결국 배타적 교리신앙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목회의 길로 들어섭니다.

2) 타협하는 학생들 - 위의 학생들보다 더욱 불행한 경우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과거에 가졌던 신념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목회에 대한 꿈이 바뀌거나 사라졌지만, 떠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직업목회자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학생은 진실을 알면서도 교인들을 배타교리로 세뇌시키는 위선적인 목회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편지를 읽는 신학생 중 여기에 해당하는 학생이 있다면, 가급적 빨리 학교를 떠나는 것이 본인이나 한국 교회를 위해 바람직합니다).

3) 수용하는 학생들 -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과거에 가졌던 확신이 무너지는 아픔을 견뎌내며 진지하게 신학공부를 계속합니다. 마음의 고뇌와 현실의 고통을 견디며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학생들은, 기존의 신앙관은 무너지지만 결국 복음의 원형이 따뜻한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에 있음을 깨닫고, 기존 교회에서 가르치던 ‘예수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의 신앙’을 갖고 실천적인 예수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분들이 모두 진실되고 정직한 목회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수는 그 옛날 우리 주님께서 가셨던 고난의 길을 따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는 목회자로 살아갑니다. 가난한 이웃의 친구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등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며 도와주는 동지로, 독재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로 살아갑니다. (그런 목회자분들께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합니다).

하지만 이런 ‘열린 목회자들’도 여전히 극복하기 쉽지 않은 과제를 붙들고 씨름해야합니다. 고통을 감내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새롭게 알게 된 기독교의 참 모습을 목회 현장에서 솔직히 말하기에는 한국 교회에 드리워진 벽이 너무 높다는 것을 실감하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수위를 정하고 타협해야 하는 슬픈 현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분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마치 생명체처럼 자체생존욕구를 갖습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종교조직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여 자기 조직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려는 사람이나 세력이 조직 내에서 발견되면, 조직은 그를 가차 없이 몰아내려는 속성을 갖습니다. 밖을 향해서는 소리 높여 개혁을 외칠 수 있어도 자기가 속한 조직의 중심을 향해 개혁의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찍이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신 감신대 학장 변선환 목사님이 교단에서 퇴출당하고 학교를 떠나셔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목회현장에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조직에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조직의 거대한 힘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현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고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자기 조직의 개혁을 위해 나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여 그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조직에서 퇴출될 것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교단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거나,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하는 것 외에는 현실적인 대안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신부님이나 스님들과는 달리 가정을 거느린 개신교 목회자들이 자신과 가족을 먹여주고 입혀주는 조직에 대항하기란 너무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3. ‘확신에 찬’ 목회자와 ‘고민하지 않기로 결심한’ 목회자

이쯤에서, 앞서 말씀드린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현장에 발을 들여놓는” 목회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자신들이야말로 ‘보수정통’이라고 주장하는 보수교단 신학교의 대부분은 새로운 신학이론을 아예 소개하지도 않거나, ‘틀린 것’으로 미리 설정해놓고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하여 이런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은 배타적 보수정통 신학이 옳은 것으로 확신한 채 아무 갈등 없이 목회 현장에 뛰어들어 ‘확신에 찬 설교자들’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할 수 있는 설교자들, 고민하는 신앙을 나약한 신앙으로 간주하여 자신은 물론 교인들에게 ‘의심 없는 신앙’과 ‘변치 않는 신앙’을 강조하며, 교인들의 대다수를 ‘일편단심 신앙’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진보교단의 신학교를 나온 분들 중에도 이런 확신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확고한 보수 신앙을 갖고 진보교단의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는 현대신학이 자신의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마음의 벽을 쌓아놓은 채 과거에 갖고 있던 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졸업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소신대로 배타적 교리신앙에 근거하여 ‘확신에 찬 목회자’로 사역하게 됩니다.

자신이 자란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신학교에서도 현대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거나 접하지 못한 이런 부류의 목회자들은, 세상만물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을 확실히 만났고 선택받았다고 확신하기에, 자신도 ‘의심 없는 신앙’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리신앙에 대해 의심하거나 고뇌할 줄 모르는 이런 확신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되는 슬픈 현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신중하고 양심적인 상인들은 손님을 잘 끌지 못하고, 이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달변을 늘어놓는 떠돌이 약장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빼앗고 돈을 잘 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확신주의자들에게 배운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목회자를 닮아 확신에 찬 신앙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영위합니다. 예수를 믿어 이미 영원한 천국을 보장받았으니 기껏 백 년도 안되는 현세에서의 고난쯤은 능히 감당할만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신앙을 진정한 기독교신앙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계의 이런 현실이 매우 안타깝고 슬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이분들(확신에 찬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이해하며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정직하게 저의 신앙과 신념을 따르는 것처럼, 그분들 역시 그것이 옳다고 정직하게 믿고 있다면 그들의 신념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정통을 자처하는 목회자들이 자기 신앙과 신학에 따라 확신에 찬 설교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즉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는 이분들과 다를 것이 없으나 속내는 전혀 다른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전자가 확신으로 가득 차서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분들인 반면에, 후자는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동의하지 않거나 회의를 느끼면서도 ‘고민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고민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 목회자들은 오래된 교리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의 처지와 생계문제에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또한 솔직한 목회자는 교회를 부흥시키기도 어렵고 성공적인 목회자로 등극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진실을 덮고 ‘확신에 찬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에는 이런 목회자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들은 그 옛날 우리 주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신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우님들이 특히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이며, 한국 교회가 반드시 가려내어 교회에서 떠나게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4. 평신도가 주체가 되지 않으면 교회개혁은 불가능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목회자들은 자기가 속한 구조 속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더 나은 상황으로 개선되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이미 형성된 구조 속에 안주하려는 자신의 본능적 욕구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며, 자본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또한 가정을 갖고 있는 생활인으로서,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순수하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초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소수의 깨어있는 목회자들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개혁을 외칠지라도 다수의 동료들에 의해 저항을 받게 됩니다. 피아가 확연히 구분된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일은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자리를 함께 하는 동료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의 개혁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목회자들이 주체가 되는 교회개혁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평신도 교우님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한국 교회 교우님들은 주체적으로 개혁에 나설 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직업목회자들이 대대로,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교인들을 세뇌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깨어있지 않으면 훌륭한 정치인과 그렇지 못한 정치꾼을 구별하지 못한 채 비양심적인 정치꾼의 술수에 놀아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평신도 교우님들이 깨어 교회현실에 눈을 뜨지 못하면 일부 비양심적이거나 무지한 목회자들에게 계속 휘둘리게 되고 한국 교회의 미래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평신도 교우님들이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 하실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이렇게 기존의 신앙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글이라도 용기를 내어 읽어주시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개혁에 참여하고 계신 것입니다. 행동하기 이전에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교계에는 재정 비리나 가짜 학위 등의 문제로 교회 내 갈등은 물론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지만 자신의 과오를 진지하게 뉘우치는 목회자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변화의 조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평신도 교우님들이 교회 쇄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교우님들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렇게 평신도 교우님들이 힘을 합쳐 각 교회마다 개혁운동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교우님들의 행복을 빼앗거나 사회갈등을 일으키는 교회를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배타교리나 도덕적 해이로 개혁의 가능성을 상실한 교회는 문을 닫는 것이 차라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가 도태되어 한국 교회의 전체적인 토양이 깨끗해질 수 있도록 미련 없이 떠나는 것도 교회개혁을 위한 작은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열린 목회자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도 교우님들께서 하실 수 있고, 반드시 하셔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확신하는 목회자’보다 ‘고뇌하는 목회자’들을 더욱 존경해 주시고, 그분들과 함께 바른 교회의 모습을 찾기 위한 대화를 자주 나누시고 실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그분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혹 그분들에 대한 교회의 압력이 있을 경우 교우님들께서 보호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 한반도 종교전쟁을 막기위한 류상태 목사의 고언이 담긴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우님들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하여 제가 지난 9월 1일부터 오늘까지 보내드린 주일편지를 다시 한 번 잘 읽어주시고, 그 내용에 일부라도 동의하신다면, 주변의 교우님들에게도 소개해주시도록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만일 교우님들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로서는 더없이 보람되고 감사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내용을 주제로 가까운 교우님들과 서로 토의도 하시고, 어떻게 하면 교우님들이 각자 다니시는 교회에 적절하게 도입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주신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평신도 교우님들이 직업목회자에 의존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스스로 공부하며 의식을 깨우고, 교회개혁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실 때, 한국 교회는 비로소 개혁을 위한 탄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교우님들, 교회 개혁의 주체가 되어 주십시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3/10/04 [11:1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