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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기독교인에게 특혜를 베푸시지 않습니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자기중심 신앙 넘어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바뀌어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3/07/13 [07:14]
장마가 반도를 오르내리며 많은 비를 뿌려 곳곳에 크고 작은 피해를 내고 있습니다. 교우님 가정에는 피해가 없는지요. 지난주에는 항공기 사고 소식으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승무원들의 침착한 대처로, 또한 승객들의 질서정연한 협조로 사망자가 많이 나오지 않아 불행 중 다행입니다. 최선을 다한 승무원들에게, 또한 승무원과 함께 다른 승객의 대피를 도운 아름다운 분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이런 불행한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예수사람들이 냉철하게 인식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햇빛과 비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내리듯이, 사고와 재해 역시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또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별하지 않고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이런 재해문제와 관련하여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1. 하나님은 ‘선택된 자녀’에게 특혜를 베푸시는가?

▲ 한반도 종교전쟁을 막기위한 류상태 목사의 고언이 담긴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먼저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가슴 아팠던 기억을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그날은 며칠 전부터 중부지방에 내린 폭우로 낮은 지대에 있는 건물들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보았습니다. 설교를 맡은 목사님 동네에도 피해가 있었나봅니다. 목사님은 주변의 건물이 모두 물에 잠겼지만 자신의 집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진 목사님의 설교는 택하신 자녀들을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피해를 본 이웃들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제안은 없었습니다. 이웃들은 홍수로 피해를 보았는데 자신의 집은 피해를 면하게 해주셨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는 설교를 청중들도 별 다른 거부감 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택하신 자녀들에게 특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신앙은 우리 한국 교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입시철이 되면 새벽기도회는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위해 기도한다면,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고,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건강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노력한 만큼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시는 부모님들 중에는 그런 당연하고 미지근한(?) 기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여 대학 이름을 명시해가며 그 대학에 꼭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하시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학입시가 공부가 아닌 기도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부모님의 그 간절한 기도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자녀가 합격하려면 정당하게 노력한 누군가가 대신 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슬픈 추억

1980년대 후반, 서울의 어느 여자중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저는 작은 승용차를 이용하여 안양 외곽에서 서울 중심부로 출퇴근하였습니다. 그때는 안전띠 착용이 법적으로 의무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갑갑하다는 이유로 안전띠를 매지 않았고 동승자가 매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전할 때마다 늘 안전띠를 맸고 동승자에게도 매도록 자주 권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오래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겪었던 슬픈 일이 지금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시는 선배 선생님 한 분을 방향이 같아 모시고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늘 그랬듯이 안전띠를 맨 다음 선생님께도 매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 운전하시는데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뭐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날은 종일 슬펐습니다. 선생님은 매우 순박한 믿음을 갖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많은 교우님들이 그러신 것처럼 ‘목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 말입니다.

목회자를 하나님과 교우 사이에 존재하는 신성한 인물로 받아들이는 한국 교회 교우님들의 순박한 믿음으로 인해 당시 서른 전후의 젊은 교목이었던 저도 많은 특혜(?)를 누렸습니다. 부모님 연배 되시는 선생님들로부터도 늘 존댓말을 들었으며 깍듯이 예우를 받았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물론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늘 교장 교감 선생님과 함께 상석에 앉는 불편(?)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사라는 이유로 특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도 목사와 평신도를 구분하고 차별(?)하신다면, 저는 하나님을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없음은 물론, 사랑의 하나님으로도 고백할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명이 소중하여 운전할 때마다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이라면 누가 운전해도 똑같이 돌보아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꽃같은 눈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주시는 분이라면, 목사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들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지켜주셔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만유의 근원이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어버이이시니까요.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세세하게 돌보아주시는 분이라면, 또한 어떤 일도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사고나 재해가 닥치지 않도록 지켜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무리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분이라 하더라도 교통사고나 질병 또는 자연재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3. 택함 받지 못한 자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우리 기독교에 스며든 왜곡된 신앙은 ‘택하신 자녀에게 특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넘어 ‘택함 받지 못한 자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으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재작년 봄에 이웃나라 일본이 지진해일로 큰 재난을 겪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지각변동에 의해 발생한 자연재해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벌을 내리셨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우리 세상사에 일일이 관여하셔서 무슨 일이든, 어떤 일이든, 다 하나님께서 일일이 지휘하시는 가운데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이런 신앙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당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우리 한국은 일본을 봐서 물리적인 지진보다 거룩한 영적 지진이 일어나야 될 때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한겨레신문, 2011년 3월 14일).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며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섭리하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성서의 예수님도 “공중을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이런 믿음이 옳다고 지지해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이 좋은 훌륭한 목사님이나 교우님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든가, 혹은 불치병에 걸려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게 된 경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믿고 고백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으십니까? 그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편히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요?

태풍이나 지진해일이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셨거나 하나님의 허락 하에 발생한 것이라면, 우리가 과연 그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해도 되는 것일까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살펴주시는 분이라면, 그런 자연재해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생명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 2004년 동남아에 지진해일이 발생했을 때, 어느 유명한 목사님은 그 곳에 무슬림이 많아서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사실 이슬람교가 악한 종교라는 생각은 무서운 편견에 불과하지만, 혹 그 목사님의 신앙관이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이슬람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 쓸어버린 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지진해일로 죽은 사람이 거의 30만 명에 달하는데 그 중에 독실한 기독교인은 하나도 없었을까요? 그 많은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징계로 갑자기 죽어야 할 만큼 악한 사람들이었을까요? 만일 이교도를 쓸어없애기 위해 기독교인이나 다른 죄없는 사람들이 함께 희생된 것이라면,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하는 걸까요?

그 목사님은 다음 해 허리케인이 미국 동부지역을 강타했을 때도 그 지역에 동성애자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허리케인을 보낸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허리케인으로 생명을 잃거나 다치고 집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 동성애자였을까요? 죽은 사람 가운데는 어린아이와 갓난아기도 있었는데 그들은 장차 동성애자가 될 아이들이었을까요?

그런 식의 무모한 설교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인격적이시며, 세상의 모든 것을 섭리하고 주관하신다.”는, 또한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한 언제든 재발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리에 매이지 말고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진해일이나 태풍이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군가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그냥 자연현상일 뿐입니다. 운전하다 교통사고가 나는 것 또한 신앙적인 죄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부주의와 관련해서 일어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을 의학적으로 찾지 않고 신앙의 부족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4. ‘자기중심의 신앙’을 넘어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리가 가르치는 그대로 믿어온 하나님은 ‘이천 년 전에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인식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인식한 하나님을 지금도 그대로 믿는 것은, 지난 이천 년 동안의 지식과 과학의 발전을 모두 무시하고 그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중심의 신앙’을 넘어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믿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뜻을 정해 놓고 그 뜻에 맞추어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써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 인생을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TV를 볼 때 우리가 정한 채널에 맞추어 방송을 보내달라고 방송국에 요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서 KBS1-TV를 보려면 채널 9에, MBC-TV를 보려면 채널 11에 맞추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채널 3으로 MBC를 볼 테니 우리 집으로는 채널 3으로 보내 달라.”고 MBC에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암을 이겨낸 기적보다 암을 예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교우님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건강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기도만 열심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세계, 즉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셔야 합니다. 과식을 절제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며, 욕심을 다스리고, 마음을 편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즉 순리는 이미 정해져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맞추는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과 세상에 부여하신 뜻을 우리가 찾고 거기에 우리의 채널을 맞추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누구나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깨어 관찰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질서를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순리에 우리 자신을 맞추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개인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이웃들과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도 오염된 세상에서는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요인이 주변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들과 함께, 때로는 사회가 힘을 모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밝고 정의로우며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환경보호운동이나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 이런 일들은 우리 기독교신앙과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유지하고 가꾸는 일, 즉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보존하는 일이므로 우리의 신앙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구마을 모든 이웃들과 더불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교회에 출석하거나 기도하는 일 못지않게 이런 일들도 해야 합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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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7/13 [07:1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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