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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으신다면
[류상태의 주일편지] 우리의 신앙도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져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3/03/02 [10:46]
누군가 저에게 “왜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으신다면, 한 마디로 명쾌하기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입문 초창기인 대학시절과, 신학대학원 입학 이후 목회활동 초창기까지,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은 지 몇 년이 지난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저의 대답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 아니라 세 번째 단계에 와 있는 지금이라고 해서 지난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에 담긴 의미를 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늘은, 제가 지나왔던 신앙의 세 가지 단계를 교우님들과 나눔으로서 ‘바람직한 신앙과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1.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교우님들께 왜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 그래서 믿는다.”라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 한국 교회 교우님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이유’입니다.

이 대답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보수적인 믿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저 또한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 믿음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에게는 아이 둘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큰 성년이 되었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 목에 매달리며 잘 하던 말이 있습니다. “아빠, 난 아빠가 좋아.” 아이의 갑작스런 말에 “아빠가 왜 좋은데?”하고 물으면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고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맛있는 거 사 주잖아. 아빠가 장난감 사 주잖아.”

아이의 말을 들으며 조금은 섭섭한 생각이 들어 볼을 잡고 흔들며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놈, 너 사실은 아빠보다, 맛있는 게 좋은 거구, 장난감이 좋은 거로구나.” 아이나 아빠나 다 어리고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깊은 사랑보다 부모가 사주는 장난감, 맛있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신앙의 길로 들어선 초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 무엇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엄마 아빠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당연히 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처음 눈을 뜨던 초창기에는 하나님께서 제가 원하는 모든 걸 당연히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이유였기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그저 제 욕심대로 기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는 교우님들이 잘 하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업 탈 없이 잘되게 해 주시고, 딸 아들 대학 잘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잘 하니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내려주실 지도 몰라.”라는 생각에 복권을 사 놓고 당첨되기를 기다리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진정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시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 개역개정)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 앞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만 동시에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뿐 아니라 공평성과 정의가 함께 충족되려면,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구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떼를 쓰고 매달린다고 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들어주신다면 하나님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런 식의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 어려워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저 역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많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조급해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정말로 존재하시는 것인지 많이 의심하기도 하였습니다.

2. 올바로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대해 제가 찾았던 다음 단계의 대답은 “잘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잘 살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님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고 조르기만 합니다. 해 주면 좋아하고 안 해 주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커갈수록 엄마 아빠에 대한 이해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과자 사주고 장난감 사줘서 좋은 게 아니라, 엄마 아빠의 사랑과 보호 속에 산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의 애정 어린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철이 들수록 엄마 아빠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엄마 아빠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아이는 부모 말씀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보편적으로 유익하며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더욱 더 깨닫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며 자라다 보니,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잘 사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자동차를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운전합니다. 가고 싶으면 가속기를 밟고, 서고 싶으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거꾸로 하면 큰일 납니다. 자동차의 매뉴얼대로 운전을 해야 자동차가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도, 프로그래머의 의도에 따라야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려면, 세상을 존재하게 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몇 가지 매뉴얼을 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이라는 매뉴얼, 양심이라는 매뉴얼, 그리고 성서라는 매뉴얼입니다.

자연의 흐름과 이치를 살펴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저 자신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자 애쓰며 어느덧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애쓰고 노력할 때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저 자신의 삶도 행복해진다는 것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다가 어느 순간에 부모의 보호와 가르침이 간섭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자라다 보니, 하나님을 믿으며 순종하는 삶이 저의 자유로운 삶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저의 삶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순간순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사람답게 살고,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삶 속에서 체험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밀월을 즐겼던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3. 당연한 도리라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두번째 단계를 넘어서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무엇을 위해서’ 등의 모든 조건들을 넘어,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기에 믿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부모가 잘 해주시건 못해 주시건,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건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도 제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르면 불효자식이듯이, 저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생명주신 하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은 모든 조건을 넘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하나님’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자식이 생명주신 부모님께 조건 없이 효도하는 게 당연하듯이, “나를 구원해 주시니까, 영생을 주시니까, 천국 보내 주시니까, 혹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내가 잘 되니까...” 그런 모든 조건을 넘어 그냥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 아버지를 공경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이유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리기에 “엄마 이거 해 줘, 아빠 저거 해 줘” 하고 매달리는 건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서도 “부모님이 뭐 해 주시려나?”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슬픈 일입니다. 성년이 되면 생각도 걸맞게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부모님께서 기뻐하실까?”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구준히 모색하는 류상태 목사     ©대자보
우리의 신앙도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의 신앙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의 신앙으로 바뀌어야 우리 한국 교회도 살고 교우님들도 더욱 행복해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물음과 고민이 우리 신앙의 주된 관심사가 될 때, 우리 한국 교회는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존경받는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이 속히 오기를 빌며,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가시는 교우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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