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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차례와 제사문화 존중해야 한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제사문화에 대한 한국교회 대승적 결단 있어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3/02/07 [04:11]
이번 주일(2월 10일)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날이기도 합니다. 하여 전통적으로 설날 아침에 지내온 차례 문화와 관련하여 교우님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어 며칠 앞서 편지를 드립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제사 문제로 인해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는 교우님들이 계십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고민이지만 교회가 적절한 지침을 제시해 주지 않거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교리적으로만 다그치는 바람에 믿지 않는 가족들과 늘 보이지 않는 갈등에 휩싸여 명절이 다가올수록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는 교우님들도 적지 않습니다.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이고 추도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문제가 없을 수 있겠으나 차례를 드리는 가정에 참여해야 되는 교우님들은 마음고생이 많으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통문화와 교회의 가르침이 충돌하는 이 문제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옳을까요? 이 쉽지 않은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이삼백년 전 한반도에 찾아온 갈등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제사문화에 대한 초기 천주교의 이해

제사문제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선교 초기부터 맞닥뜨린 풀기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개신교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는 고인을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첫 계명과,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는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천주교는 결국 제사문화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런 천주교인들의 태도는 조상에 대한 효를 인륜도덕의 기본으로 삼는 당시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조상의 은공을 부인하는 불효막심한 죄이며, 그런 파렴치한 일을 옳다고 가르치는 천주교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악한 종교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엔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파 학자들이 천주교에 많이 귀의했기에 당시 집권 정치인들로부터 대대적인 박해를 받아 수많은 천주교 교우님들이 생명을 잃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습니다.

2. 조상을 공경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오랜 갈등 끝에 천주교는 일부 형식을 바꾸기는 했지만 우리의 제사제도를 아름다운 전통문화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개신교회는 대부분 제사제도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사를 허락한 천주교회에 대해서 우상숭배를 한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회에서도 소수이지만 제사를 지내도 괜찮다고 가르치시는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제사 문제가 교회마다 해석이 다르고 혼선을 빗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사문화에 윤리적 성격과 종교적 성격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이어주신 조상님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효심임에 틀림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서의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제사문화에는 종교적 의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상을 단지 존경하고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 여전히 그 인격이 혼으로 살아있고 제사를 잘 드려야 가문이 복을 받고 잘 살게 된다는 조상신 숭배의식을 포함하고 있기에 우리 교회와 교우님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도 달리 해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종교적 요소보다 윤리성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상을 신으로 섬긴다는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효심에 근거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런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는 우상숭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제사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견해입니다.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일부에서 제사문화를 허용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제사문화를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명절이나 기일에 조상님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절은 부모님이나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상숭배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상숭배의 사전적 의미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만든 신상에 절하고 비는 것’ 또는 ‘하나님 이외의 사람이나 물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기초 개념을 바탕으로 우리 기독교가 이해해야 하는 우상숭배란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을 하나님과 동등한 절대적 위치에 두고 의지하며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돈이나 권력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은 명백한 우상숭배입니다. 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물리쳐야 할 우상은 ‘사람보다 돈을 더 중히 여기는 물질적 가치관과 삶’이며, 또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배타적인 교리와 문자 안에 가두어 이웃들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여 세상에 평화를 심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는 독선적 신앙’입니다.

한국 교회는 제사문화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독선적 배타 교리를 절대화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우상숭배가 아닌지 깊이 돌아보아야 하며, 조상님에게 절을 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해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3. 제사문화를 긍정하더라도 짚어볼 점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도 우리의 제사문화를 존중하고 그 의미를 계승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조심스럽게 건의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조상님을 공경하는 전통예절의 내용은 보전하되 제사제도의 형식은 절대화하지 말고 현대사회에 맞게 좀 더 탄력적으로 적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사제도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려면 음식 장만에 따르는 경제 비용도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 여성에게 집중되는 과도한 노동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성들에게는 즐거운 명절이 여성들에게는 중노동이 되는 현실은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남성들에 의해 애써 외면당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불균형을 기뻐하실까요?

남성들만의 명절 또는 어린아이들만의 명절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즐기는 명절로 보낼 수는 없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명절에 발생하는 노동문제를 여성과 남성이 함께 지는 것부터 실천해야 하겠지만, 노동의 양을 줄이고 가족이 다같이 모여 충분히 대화하며 즐길 수 있는 명절로 분위기를 바꾸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사제도의 형식을 좀 더 간소하게 바꾸고 다른 형식의 추모방식을 함께 허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에서 드리는 추도예배도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제도를 우상숭배로 거부하는 배타적 외래문화로서의 추도예배가 아니라, 형식은 바꾸더라도 조상님께 감사하고 공경하는 옛 제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내용으로 계승하는 추도예배라면 훌륭한 대안문화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통문화로서의 제사의례와 지금까지 교회에서 장려해온 추도예배 중에서 교우님들이 자유롭게 선택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추도예배를 무가치한 외래문화로 규정하고 제사제도만 옳다고 주장한다든가,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추도예배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복해야 할 문화적 배타주의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차제에 우리 한국 교회가 민족의 전통문화와 기독교문화를 모두 긍정하고, 교우님들로 하여금 각 가정의 특색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가족간 갈등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우님들의 선택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제 경우를 하나의 사례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유교문화를 중시하는 가정에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의 삼강오륜 강독을 듣고 자랐으며 전통적인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목사가 된 이후에도 제사에 참여했지만 절은 하지 않고 기도만 드렸습니다. 보수 기독교 신앙을 갖고 계신 고모님을 생각하여 제 나름대로 선택한 고육책이었지만 다행히 아버지께서 저의 무례한(?) 태도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셔서 큰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장손인 형님이 가족회의를 소집하여 저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이끌어오신 가문의 제사는 형식의 변화 없이 계속될 것이며 혹 마음에 불편이 있더라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따라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해왔듯이 절을 대신하여 기도로 참여해도 괜찮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형님이 주관하시는 첫 제사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아버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어렸을 적부터 어루만져주셨던 아버님의 손길이 세밀히 느껴지는 자리에서 그냥 서서 기도만 하는 것을 제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부모님 앞에서는 그냥 서서 기도할 수 있었는데, 아버님 앞에서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이후로도 제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형님이 주관하시는 제사 때마다 아버지께 깊이 절을 드렸고, 이후로는 조부모님 제사 때도 절을 올렸습니다.

형님은 몇 년 전 지병으로 연세에 비해 조금 일찍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장남의 역할을 이어받은 저는 가족회의를 소집하여 제사와 추도예배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상황에 적합한 지 허심탄회하게 의논하여 결정하자고 하였습니다.

은퇴권사이신 어머니께서 추도예배로 드리자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양쪽 전통이 모두 소중하지만 조상을 기리는 의미에는 다를 것이 없으며, 며느리들이 주로 겪어야 하는 여러가지 말못할 부담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며 내놓으신 의견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 의견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모두가 동의하여 이후 저희 가정은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렸던 이전과 추도예배를 드리는 지금, 저희 가족에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를 모시고 3대에 이르는 대가족이 함께 모여 아버님과 형님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가르침과 베푸심을 기리고 감사하며 간소한 음식과 덕담을 나누는 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한국 교회의 대승적 결단을 기대합니다.

과거 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목사님 몇 분이 제사문화는 우상숭배가 아니며 차례를 드려도 괜찮다는 의견을 설교시간을 통해 발표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문제가 발발하고 교계의 추궁을 받게 되자 아쉽게도 본인들 스스로 소신을 접고 말았습니다. 교단의 눈초리가 무서워 소신대로 목회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깨어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제도를 전통문화로 존중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이로 인해서 한국 교회 안에 새로운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갈등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사회의 존경을 받는 공동체로 거듭나려면 창조적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책임 있는 목사님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배타적인 교리로 인해 본의건 본의가 아니건 우리 사회와 이웃종교에 무례가 되는 일을 너무 많이 해왔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동안 교회가 전통문화를 무시하거나 부정한 행위에 대하여, 또한 이웃종교를 존중하지 못하고 배척할 뿐 아니라 심지어 물리적 위해를 가한 모든 잘못에 대하여 우리 사회와 이웃종교에 진정으로 사과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개신교 각 교단 차원에서, 또한 개혁단체들과 진보기독교언론, 깨어있는 교회들이 이 일에 적극 나서주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구준히 모색하는 류상태 목사     ©대자보
또한 이 문제로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하고 계시는 교우님들은, 제사와 추도예배 중에 어느 것이 자신의 가정에 적절한 지 충분히 검토하여 아무 두려움 없이 편한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님들을 기리며 예를 표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내용으로 계승하되, 추모 형식에 대해서는 가족회의를 거쳐 각 가정의 상황에 맞는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가족과 친지간 화목을 꼭 이루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모이는 명절에 지금까지 겪어왔던 문화충돌이 극복되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 넘치는 명절로 보내게 된다면, 가정에서부터 평화를 이루어가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설날을 맞이하여 교우님들 가정에 우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만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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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2/07 [04: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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