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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징용자들을 두 번 죽인 일제의 만행
[답사일지9] 관동대지진 희생자 추도비·아라카와 학살현장·관음사 위령비
 
김영조/이윤옥   기사입력  2010/09/23 [10:07]
 1) 도쿄 요코아미쵸공원 안에 있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 지하에 여전히 조선인 유골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도쿄도위령당에서     © 김영조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 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위령당이 있는 요코아미쵸공원(横網町公園)은 여름철 불꽃놀이로 유명한 스미다가와구 요코즈나 2정목(墨田区横綱2丁目)에 있다. 주소에 보이는 요코즈나는 우리말로 ‘천하장사’를 뜻하며 이곳은 일본의 인기스포츠 ‘스모경기장’이 있어 이곳을 모르는 일본인은 없을 테지만 이곳 한 모퉁이 요코아미쵸공원 안에 위령당이 있는 것을 아는 일본인은 적을 것이다. 언뜻 보면 평범한 공원으로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한 발짝만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이 예사로운 공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곳은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 때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한 곳으로 공원 안쪽에 위령당과 부흥기념관이 있다.  

리히터 지진계로 7.9도를 기록한 대지진으로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에 일어난 지진을 가리켜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関東大震災)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관동대지진이라 부른다. 이 공원은 일제 때 육군피복창 자리로 이른바 군수공장이 있던 곳이다. 위령당은 관동대지진 때 사망한 58,000명의 유골안치를 위해 1930년에 지어진 것이지만 1945년 3월 10일 미군에 의한 도쿄 대공습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들도 화장하여 함께 안치하는 납골당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곳 위령당의 72%는 대지진으로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도쿄대공습 때 죽은 사람들이다. 자연재해보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
 
▲ 겉보기에는 평범한 공원(왼쪽)으로 무슨 위령당인지 모호한 <도쿄도위령당>이라고 써둔 요코아미쵸공원 입구     © 김영조
대지진과 대공습 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이곳은 요코아미쵸공원이라 이름 짓기보다는 ‘관동대지진 추모당’ 또는 ‘도쿄대공습 추모당’으로 이름 지어야 제격일 듯싶은데 무슨 영문인지 도쿄도는 이곳을 요코아미쵸공원으로 부르고 있고, 공원 입구에는 이름도 모호한 ‘도쿄도위령당’이라고 붙여 놓았다. 

답사단이 이곳을 찾은 것은 일본 남부지방인 큐슈와 오사카 일대를 1주일간 돌아보고 난 8일째로 2010년 8월 13일 오전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첫 도착지인 기타큐슈의 모지(門司)에서 수도인 도쿄(東京)까지 열차기준으로 무려 1,100km의 대장정이다. 도쿄는 사실상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데 도쿄 일정의 첫 답사지는 요코즈나에 있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였다. 이곳을 안내한 사람은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 리일만 씨와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를 교복으로 입은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고급부 3학년 김화영 학생 그리고 재일동포 2세 정종석씨를 비롯한 많은 시민활동가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요코아미쵸 공원에 들어서니 8월의 무더위가 살갗에 끈적끈적하게 와 닿는다. 아담한 공원 중앙에는 도쿄도위령당(東京都慰霊堂)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화단모양의 <도쿄공습 희생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비>가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도쿄대지진때의 참상을 전하는 야외전시장이 있으며, 위령당 오른쪽 약간 뒤편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있다. 우리는 이곳으로 가서 묵념하고 헌화했다. 강제로 연행된 것도 억울한데 대지진으로 죽고 대공습으로 죽어가야 했던 조상들의 원혼이 답사단의 방문을 알았는지 공원 안의 푸르른 은행나무에서는 연신 매미 소리가 구슬프다.  

이곳 도쿄도위령당에는 두 가지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일본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하나는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의 희생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1940년 4월 13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있었던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공습 때 희생당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곳에 일부 신원 확인이 안 된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50여 명의 유골도 안치되어있다.<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리일만 사무국장 집필자료 ‘도쿄도위령당’>

▲ 위령당 모습, 위령당 안에서 설명 듣는 답사단, 도쿄대공습 때의 장면을 그린 그림, 관동대지진 때 12층 건물이 무너지는 그림(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 김영조
  
위령당 안에 들어서면 음침한 분위기가 감도는데 높은 천장 아래 사방 벽면 가득 당시 흑백 사진들이 빼곡하게 낡은 액자로 전시되어 있었다. 1923년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지 13년째로 군국주의 일본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때였다. 또 도쿄시내는 지진 복구가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태평양전쟁으로 말미암아 미군의 공습을 받게 되는데 도쿄도 발행의 12쪽짜리 홍보물에는 <도쿄도전재사, 東京都戰災史, 1953>를 인용하여 1942년 4월 18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무려 106회의 미군의 폭격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1945년 3월 10일의 대규모 공습으로 말미암아 도쿄는 쑥밭이 되었다. 아시아를 괴롭힌 대가였다.  

매년 이곳 위령당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9월1일과 대공습이 특히 심했던 3월 10일을 기려 재단법인 도쿄도위령협회 주관으로 위령법요(慰靈法要)식을 거행하고 있다. 물론 일본인들을 위한 추모행사이다. 조선인들을 위한 추도회는 2007년부터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해마다 열고 있다. 2009년에는 한국의 유족(황병환, 김금란)을 처음으로 초청하였으며 재일본 연구자와 시민들이 국제 심포지엄도 열었다. 

위령당 안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일본인 유골 58,000명 (총 희생자는 142,800명 부상자 103,733명)과 미군의 도쿄 공습 때 희생자 유골 105,000명이 안치되어 있다. 문제는 이 많은 희생자 중에 조선인 희생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 하는 점이다.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리일만 사무국장 ‘도쿄도위령당’> 자료에 따르면 도쿄대공습으로 희생된 조선인 사상자 수는 41,000여 명으로 이는 나가사키 2만 명, 히로시마 5만 명과 맞먹는 숫자라고 한다. 

위령당 안의 긴 나무의자에 앉아 리일만 사무국장의 설명을 들은 뒤 답사단은 위령당 지하로 안내받았다. 껌껌한 지하 안치소의 철문이 열리고 촉수 낮은 전깃불이 켜지자 안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높이 70센티, 폭 40센티 단지들이 보였다. 답사단을 위해 공개한 안치소에는 아직도 고국의 가족 품에 안기지 못한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한을 품은 채 귀향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 전장 터로 보낸 아들과 남편의 귀국을 학수고대하는 가족들을 위해 진상조사단은 49명의 유골단지 촬영을 요청하여 2008년 2월 말 현재 46명을 촬영해두었다고 했다. 문제는 이들의 신원과 유가족을 확인하는 일이다. 햇볕이 들지 않는 납골당 안의 조선인 유골들은 신원확인도 제대로 안 된 채 기약 없는 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관리인이 철문을 닫으려고 답사단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우리는 자꾸 지체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유골단자를 보려고 발길을 돌리지 못한 채 망연자실 바라다보았다. 
 
▲ 위령당 경내에 있는 조선인추도비에서 묵념하는 답사단(왼쪽), 위령당 지하에 있는 납골당으로 여기엔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도 있다.     © 김영조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순간 도쿄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화는 불통되었고 교통기관은 파괴되었으며 수도와 전기도 끊겨 도시는 유령의 도시로 변했고 사람들의 인심은 흉흉했다. 7.9도의 대지진은 대장성, 문부성, 경시청 등의 주요 관공서 등을 무너뜨렸으며 65억 엔에 이르는 물적 손실과 사망, 행방불명자, 부상자를 포함한 이재민 등 인적 피해만도 100만여 명으로 추정될 정도여서 국가비상사태를 맞이한 일본은 당황했다.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진 가운데 엄청난 재앙의 국가 위기를 수습하려고 경찰은 9월 2일 오후 6시를 기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이때 도쿄,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치바현 등지에서 한국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고의로 퍼뜨린다.  

당시 계엄령 선포자는 미즈노(水野鍊太郞)와 아카지(赤池濃)로 이들은 3.1운동 때 조선에서 총독부 정무총감과 경무국장을 역임한 자들이다. 도쿄시내가 대지진으로 혼란에 빠지자 일본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회사운동가들과 시민들이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던 이들은 조선인과 중국인 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을 이용하여 사회불안을 없애고자 하는 생각으로 근거 없는 “조선인선동”이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대학살극을 빚게 한 것이다. 

야마다(山田昭次) 교수는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학살、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 일본 創史社, 2003≫에서 재일조선인 학자 금병동씨의 연구를 인용하여 “도쿄부근에서 조선인이 갖은 폭동을 일삼고 불미스런 일을 자행했다. 조선인들은 도쿄 시내에 폭탄을 들고 석유를 붓고 방화를 하고 있다. 이미 도쿄 부근에는 계엄령이 발효 중이므로 각지에서는 순찰을 강화하여 조선인의 행동에 철저한 단속을 할 것”이라는 전보문을 각 경찰관서와 지서에 내려보내는데, 이는 명백한 일본정부의 ‘조선인대학살’ 개입부분이라고 강조한다.  

야마다 교수는 당시 학살된 조선인 숫자에 대해서 ≪현대사자료 6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강덕상, 금병동 편, みすず書房, 1963≫을 인용하여 6,661명으로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식적인 일본정부의 언급은 현재까지 없다. 오히려 당시 학살은 이른바 자경단(自警団)의 행위로 이는 주민들이 스스로 신변방어를 위한 자발적인 모임이었다면서 후소샤(扶桑社) 교과서 등을 통해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에게조차 관동대지진에 대한 주동자를 단순한 ‘민간조직에서 한 일로 국가는 모르는 일’로 은폐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 왜곡으로 가득 찬 일본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왼쪽), 한·중·일 교사가 공동으로 합의해서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     © 자료사진

또한, 대학살극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대부분 조선인이었음에도 조선인의 희생을 극도로 축소하면서 중국인과 일본공산주의자를 함께 거론함으로써 역사적 본질에 물타기를 하는 등 관동대지진은 여전히 날조와 왜곡이 진행형이다.

일본인에 의한 대학살 극이 자행되자 제국호텔에 피신해 있던 각국 외교관들은 일본정부에 강력히 항의했으며 세계 언론들은 일본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고 한·중·일 3국 공동역사교재편찬위원회가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 未来を開く歴史, 2005, 일본 高文研> 교과서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정부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조선인 학살은 국내문제라고 얼버무려 봉합시켰다.  

대신 중국인 학살은 국제문제로 불거져 중국정부는 중국인 학살 진상 촉구를 위해 북경에서 일본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여 피해자 가족의 보상을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이 책은 밝힌다.  

일본인 희생자 추모시설인 <위령당> 지하 유골 안치소에서 유가족을 애타게 그리고 있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외로운 영혼을 뒤로하고 답사단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아라카와(荒川) 강가에 있는 조선인학살 현장이었다. 
 
2) 관동대지진 한국 ·조선인 순직자 추도비와 아라카와(荒川) 학살 현장 


▲ 아라카와 학살현장에서 분노를 삼키며     © 김영조
   
도쿄도 스미다구 야히로 6번지(墨田区 八廣6-31-8)에는 ‘관동대지진 한국 ·조선인 순직자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먼저 한국인이면 한국이고 조선인이면 조선인이지 <한국·조선인>이란 표현이 무슨 말인가 싶을 독자를 위해 한 가지 설명해둘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추도비문 이름이다. 2003년 9월 현재 도쿄 전역에는 21곳에 위령비가 세워져 있으나 추도비 이름은 제각각이다. 그 까닭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이던 나라가 6·25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갈라져 한 곳은 남한 곧 ‘대한민국’이요, 한 곳은 북한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된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겐 ‘조선인=북한’, ‘한국인=남한’ 의식이 강한데다가 재일동포들 역시 추도비나 위령탑을 세우려다 보니 주체의식에 대한 혼란이 생겨 ‘한국인 추도비’, ‘조선인 추도비’, ‘무연불(無緣佛) 공양탑’, ‘이국인(異國人) 위령탑’, ‘동포 희생탑’ 등 통일되지 못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분단의 아픈 상처가 위령비에도 나타나있다. 
 
 
▲ 아라카와 학살 근처의 추도비(왼쪽), 묵념을 하는 답사단     © 김영조

이들 “관동대지진 위령탑”들은 대개가 재일동포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게 많지만 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념비나 위령비를 세우는 자금에서부터 부지 확보 문제도 어렵거니와 비를 세우려는 지역에 현지주민의 반대가 있으면 위령비는 들어설 수 없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관동 일대에 세워진 추도비는 그래서 더 값지고 의의가 크다.  

“1923년 9월1일 관동대지진 당시 스미다구에서는 혼쵸(本町)지역을 중심으로 대화재가 발생하여 아라카와(荒川) 강변에는 피난 나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조선인들이 불을 질렀다> <조선인이 공격해온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구(舊) 요츠기바시(四つ木)에서는 군대가 기관총으로 조선인을 총살하였으며 일반인들도 살해 행위에 가담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아라카와 강의 방수로 개설 역사를 조사하던 어느 소학교 교사가 이 지역의 노인들로부터 관동대지진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교사는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이들을 추모하자고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지진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11월 도쿄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헌병경찰의 감시 하에 아라카와 강변에서 두 차례에 걸쳐 희생자 발굴 작업이 이뤄졌는데 그때 유해를 어디론가 운반하였으나 희생자 유골의 행방은 그 후 조사할 수 없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여 유골도 무덤도 없이 진상도 규명하지 않은 채 86년이 흘렀다. 이에 희생자들을 추도하고 역사를 반성하며 여러 민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본사회의 창조를 염원하여 민간 여러분이 힘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2009년 9월 5일

관동대지진시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 봉선화”


 
팔월 한낮의 뜨거운 햇볕 속에서 답사단을 아라카와 강변으로 안내해준 사람은 전직 교사출신 니시자키(西崎雅夫方) 씨로 그는 사회교육단체 <그룹 봉선화>를 이끄는 대표였다. 봉선화모임은 이곳에 추도비를 세우려고 1975년부터 ‘조선인 학살사건’을 연구해온 모임이다. 이들은 1982년 7월 ‘관동대지진에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여 추모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학살에 대한 증언자 150명을 확보한 이래 1992년에는 ≪바람이여 봉선화 노래를 전해다오, 風、鳳仙花の歌をはこべ≫라는 책을 발간하는 등 아라카와 학살현장을 보존하고 일본에 알리기 위한 운동을 하는 순수한 일본인 단체이다.  

그들은 34년간 준비 끝에 2009년 9월 5일 추도비 건립을 보게 되었다. 십시일반으로 사유지를 사들여서 과거 일본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의 역사를 기록하는 한편 매년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한 추모집회를 여는 등 이들의 활동에 답사단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니시자키 씨는 추도비가 들어섰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이 아니라 봉선화 모임은 앞으로 희생자추모사업을 법인화하여 오래도록 학살관계 일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니시자키 씨는 학교도 그만두고 이 일에 매달리고 있으며, 혹시나 세워둔 추도비를 우익들이 훼손할까 봐 추도비 옆에 집을 구해 지키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남의 나라 희생자들을 위해 헌신하게 하였을까? 일본정부의 무관심과 어려운 주머니 사정에도 회비를 모으고 마음을 모아 학살된 조선인을 위한 열정을 다 바치는 분들을 곳곳에서 만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왠지 따뜻해짐을 느낀다.  

추도비와 아라카와 학살현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니시자키 씨는 답사단에게 봉선화 씨앗이 든 작은 봉투를 선물했다. 내년에는 울 밑에 심어 고운 싹을 틔우리라는 다짐을 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든지 한국인들도 이들과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답사단이 이어서 찾은 곳은 치바현 관음사였다.
 
3) 치바현 나기하라마을에 묻힌 조선인 학살현장에서
 
“흰 목련꽃 나무 아래 / 나란히 누워 잠든 그대들 누구인가! / 고향땅 어머니 곁 떠나 / 어이타 황천길 들었는가! / 오다케 할머니는 힘주어 들려주셨지 / 목련꽃 나무뿌리 밑에 조선인 시신 6구가 뒤엉켜 있더라 / 그때 / 매미는 고래고래 악을 썼고 / 목련꽃 나무 옆 주택가 하늘은 흐려있었지 / 꽃은 지고 또 피고 또 피고 또 지고... / 뉘 집 귀한 아들이었을까? / 학살된 젊은 조선인을 그리며 관음사로 돌아오는 길 / 팔월 무더위는 끝내 / 속적삼을 적시었지” -고야, 흰 목련꽃 나무 밑(치바현 나기하라 조선인 학살 현장의 오다케 할머니)- 

스미다구 아라카와 강가의 학살 현장을 벗어나 치바현 관음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반.

날씨는 더웠지만 맑았다. 한국보다 심한 습기와 불볕더위로 냉방 잘된 버스에서 내리자 훅 하고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 숨이 턱 막힌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도 답사단이 도착하는 곳에는 반드시 서너 명씩 현지 사정에 밝은 시민단체 회원들이 나와 주었다. 관음사 앞마당에 버스를 세우고 내리니 남산 식물원에서 보던 커다란 선인장이 우리를 반긴다. 잘도 키워 꽃을 피운 선인장 앞에서 우리를 실은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더위를 무릅쓰고 기다려준 사람들은 ‘치바현에 있어서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희생자 추도 조사실행 위원회’ 히라가타 사무국장, 오다케요네코 씨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었다. 반갑게 우리를 안내하는 이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 나기하라 학살현장에 마중나온 ‘치바현에 있어서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희생자 추도 조사실행 위원회’ 사람들     © 김영조

▲ 나기하라 학살현장에서 증언을 하는 팔순을 눈앞에 둔 오다케 할머니     © 김영조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한 관음사로부터 학살현장인 목련나무 아래까지는 불과 5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일본은 무덤관리를 절에서 해주고 있는데 관음사에도 많은 무덤이 있어 때마침 양력 추석 성묘를 나온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무덤 곁을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풀들이 무성한 곳이 나타났다. 히라가타 씨에 따르면 관음사 일대에는 일본 강점기 때 육군 훈련병 연습장이 있던 자리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런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학살 현장인 나기하라의 커다란 목련 나무는 푸르름을 간직한 채 답사단을 맞이했다.  

목련꽃 나무 아래에서 학살 당시 설명을 해준 분은 오다케 할머니였다. 그는 올해 79살로 건강이 안 좋아 보였지만 학살 당시를 설명할 때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지 쩌렁쩌렁했다. 오다케 할머니는 학살당한 조선인과 목련 나무를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여기 목련 나무 아래에 조선인을 학살해서 묻었어요. 조사단이 이 자리를 발굴하자 6구의 시체가 엉켜있었지요. 이 목련 나무는 해마다 어떤 꽃보다 먼저 꽃이 피는데 여기서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영령이 아닌가 싶어요.”

▲ 나기하라 학살현장의 위령비(왼쪽)와 위령탑     © 김영조
 
▲ 나기하라 외에 다른 치바현에 있는 위령탑들 / 오오와다(大和田) 무연불묘, 장복사(長福寺) 지심공양탑, 스가타쵸(菅田町) 무연공양탑(왼쪽부터)     © 김영조

구(舊) 육군 나라시노 연습장에서 조선인 6명을 끌고 나와 처참하게 살해하여 이곳에 묻었으나 1970년대 후반까지 이러한 사실은 공공연한 <금기>였다고 했다. 그러나 지역의 한 중학교 교사가 학생들과 학살 사실을 증언을 통해 확인하였고 1998년에는 75년 만에 유골 발굴이 이뤄져 6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화장한 뒤 관음사에 모시고 매년 9월 첫째 토요일에 추도식을 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현재 치바현 내에는 관음사 위령비를 포함하여 4곳에 조선인 추도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이곳 치바지역에서는 1978년 6월 24일 <치바현에 있어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 실행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시부미,いしぶみ> 라는 회보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2008년 10월 25일에는 35호 회지를 엮은 축쇄판을 찍어내어 과거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일본인들에게 소상히 알리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 <치바현에 있어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 실행 위원회>가 발행하는 <이시부미, いしぶみ> 회보     © 자료사진

목련꽃 나무 밑에서 학살 증언을 듣고 나서 우리는 관음사에 세워진 조선인희생자 위령비에 분향·헌화했다. 위령비 옆에는 단청이 선명한 종루와 그 안에 커다란 평화의 종이 걸려있었는데 이는 한국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이사장 김의경 씨와 민속극연구소 심우성 씨 등이 기증한 것으로 1985년 9월1일 관동대지진 추모 62주년을 맞이하는 날에 맞춰 타종식을 했다. 
 
▲ 나기하라 학살현장의 위령비에 분향과 헌화를 하는 답사단(왼쪽), 평화의 종 앞에서 설명을 듣는 답사단     © 김영조

순수한 일본인들이 모여 매년 추모회를 열고 있지만 한국의 독지가들도 틈틈이 종각을 세운다든가 추모회에 참석하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령비 헌화를 마치고 답사단은 잠시 관음사 대웅전에 들어가 히라가타 사무국장으로부터 치바현에서 그동안 활동해온 내용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히라가타 씨는 현재 일본정부에 '관동대지진 진상규명’을 강력하게 촉구 중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는 것 같아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의 마음으로 그들의 활동에 손뼉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재일 조선인 연구자와 일본 시민단체의 많은 연구가 있지만 나의 관심은 조선인 학살사건 그 자체보다도 이 사건 후 일본 정부가 어떻게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감추려고 광분했는지 그리고 일본의 지식층과 민중이 왜 일본정부의 은폐사실을 저지할 수 없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라고 한 관동대지진 연구의 권위자인 야마다쇼우지(山田昭次)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치바현 연구자 모임 회원인 니시자와 씨는 답사단이 버스에 오르려고 대웅전에서 나오자 ‘한국으로 돌아가면 주변인들에게도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알려 달라. 젊은이들이 많이 와 줘서 정말 고맙다.’라며 버스가 관음사를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곁에는 나기하라의 흰 목련 나무 밑에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일본의 만행을 설파하던 오다케 할머니도 있었고 히라가타 사무국장도 오래도록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침부터 요코즈나공원의 조선인추모비를 시작으로 아라카와 강가의 학살현장과 치바현 나기하라의 학살 현장까지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하루해가 기울고 있었다. 흉악한 일제는 조선인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시신도 어디론가 빼돌려 없애고, 그런 사실을 왜곡하고 덮어두는 야만성을 보이는 등 조선인 징용자들을 두 번 죽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학살 현장을 보존하고 연구하면서 해마다 희생된 조선인을 위해 향을 사르는 양심 있는 시민단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 한일시민들이 공동으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을 끝까지 묻고 어서 이 문제를 해결한 바탕 위에 진정한 한일간의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답사단은 모두 공감했다. 도쿄 시내로 들어가는 차창 밖에는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고 어둡기만 하던 우리 마음속에도 작은 초롱불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제10편> “웬수와 함께 잠들고 싶지 않다. 야스쿠니에서 우리를 빼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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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9/23 [10:0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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