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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
[답사일지7] 日 인권의식지표 우지시 ‘우토로마을’과 오사카 ‘인권박물관’
 
김영조/이윤옥   기사입력  2010/09/16 [12:28]
 

▲ 우토로 마을의 역사가 심상치 않음을 알리는 마을 들머리 간판     © 김영조
 
“그리운 우리 조국,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랫동안 우토로에는 절망과 고통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땅, 아무도 구해줄 수 없는 땅, 역사에 기억조차 안 될 땅, 그것이 우토로였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희망이 없어지고, 끝까지 싸우자는 주민들의 외침도 허무하게 울려 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국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오랜 기간의 싸움에 지쳐 하나둘씩 주저앉기 시작했던 주민들에게 다시 한 번 희망을 안겨주고 가슴에 불을 지펴준 것은 바로 조국이었습니다. 지금 우토로에는 희망과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웃음이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먼저 우리의 곁을 떠나신 1세들도 오늘의 이날을 축복해주고 있을 것입니다. 조국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무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 

우토로주민 회장 김교일, 우토로주민 일동 2008년 8월 21일
-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보내는 감사문 중-  


그랬다. 그들은 조국 대한민국이 있어 무서울 것이 없었고 그 용기로 지금의 우토로를 일구어 왔다. 인사말 끝에 김교일 회장은 우토르마을을 지원해준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고마움을 전했다.  

“저희들은 우토로를 지키기 위해서 귀중한 성금을 보내주신 15만 명이 넘는 수많은 국민 여러분들, 국회의 여러 의원님들, 네티즌 여러분, 멀리 해외에 계시면서도 우토로를 위해서 온갖 힘을 써주신 여러분들, 위기위기 때마다 헌신적으로 보도를 해주셨던 방송사 신문사 등 매스컴 관계자 분들, 그리고 아름다운재단,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지구촌동포연대(KIN)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활동가 여러분들, 이제까지 우토로에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토르마을이 있는 우지시(宇治市)는 교토부(京都府) 남쪽에 자리 잡은 인구 191,051명(2010)의 도시로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통건축으로 꼽히는 세계문화유산지정의 평등원(平等院)이 있는 곳이다. 우지시는 또한 시즈오카와 더불어 우지차(宇治茶)로도 유명한 곳으로 천 년 고도 교토와 가까이 있어 교토를 찾는 이들이 찾아와 차(茶)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이 도시 한 켠 우지시 우토로 51번지에 우토로마을이 있다. 

여느 중소도시와 다를 바 없는 도심을 약간 벗어나면 이내 논밭이 펼쳐지는데 차창으로 비치는 푸른 들판에는 우토로의 길고 지루한 ‘투쟁’의 역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푸른 벼 이삭이 뜨거운 햇살 아래 익어가고 있었다. 답사단이 우토로마을을 찾은 것은 2010년 8월 11일 수요일로 오후 태양이 머리 위를 사정없이 내리쬐던 시각이었다. 마을 안에는 버스 하나 세울 곳이 없어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팔월의 폭염 속을 걸어 우토로마을에 도착했다.

▲ 우토로마을 안길 담장 등에 붙은 여러 가지 구호와 외부 격려 글들,윗줄 왼쪽에는 “우토로를 없애는 것은 일본의 양심을 없애는 것” 등의 구호가 일본어로 쓰여 있어 그동안 우토로 마을이 겪어왔을 고통의 흔적이 보인다.     © 김영조
마을 들머리에는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라는 한글간판이 울타리에 걸려있었고 마을 안길과 담장에는 우토로가 겪어왔을 많은 고통의 흔적이 혈흔처럼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우토로 마을에 대한 국내 최초 보도는 2004년 9월 15일자 <한겨레>신문의 “일제 때 강제징용 우토로마을 주민 전후보상커녕 이제 와 강제퇴거 내몰려...”라는 보도로 보이는데 이후 국내에서는 우토로마을에 대한 다각적인 보도와 성금 모집이 이뤄졌으며 돼지저금통을 깬 고사리 손부터 우토로돕기 음악회 등 온 국민의 정성어린 성금이 모여 시름에 빠져있던 우토로 주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 바 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토로에 대한 관심이 점점 퇴색되어 가는 느낌이다. 
이곳에 조선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41년 무렵부터이니까 올해로 벌써 69년째이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기획했는데 이때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함바(노동자 합숙하던 임시 건물)를 지어 살게 되면서부터이다. 6,000평의 땅에 많을 때는 1,500여 명의 조선인이 살았던 우토로는 말이 마을이지 처음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서너 평 남짓한 함바에서 대여섯 명씩 숙식을 했다는 증언이 아니더라도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의 열악했던 환경은 지금도 남아 있는 다 쓰러져가는 마을 곳곳의 집들이 말해주고 있다.  

"우토로에 처음 왔을 당시 주위는 풀이 더부룩하고 자갈투성이인 산이었습니다. 함바라 불리는 판자촌 공동 합숙소는 기둥과 삼목나무로 만든 벽과 지붕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날 당장 흙을 반죽해서 아궁이를 두 개 만들어서 밥을 해먹었습니다. 합숙소 방은 가족 수에 상관없이 한 가족 단위로 할당되었고 3평정도 공간에 바닥엔 짚이 깔렸습니다. 천정도 없었고 지붕을 엮은 삼목나무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 버렸습니다. 밤에는 별이 보였습니다. 비가 너무 세게 오는 날이면 대야를 받쳐놓고 아기들이 비에 젖지 않도록 이리 눕히고 저리 눕히고... 합숙소는 집이 아닙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조선인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문광자, 86살- 

"여기 조선인이 살고 있는 토지는 누구도 살 사람이 없고 또 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아 그냥 이대로 이상한 임시 건물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지만 깊게 구멍을 뚫을 수 없어 물이 빨갛습니다. 실제로 우리 집도 물이 빨갛고 기름도 떠 있었습니다. 아침에 물을 퍼내고 붉은 기가 없어지고 나면 얼굴을 씻습니다. 그런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불만이라고 하면 우지시(宇治市)가 한 선을 그어 조선인을 의도적으로 방치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국인이라 해도 시민이니까 보통의 취급을 해주면 되는데도 타인의 토지니까 수도도 가스관도 묻어줄 수 없다고 하고 다른 아무것도 해주지 않습니다.” -정상석, 1985년 81살로 사망-  

우토로국제대책회의 누리집(http://www.kin.or.kr)에는 당시의 우토로 사정을 알리는 생생한 목소리가 남아있다. 일본이 우토로 문제에 눈을 감고 있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증언자들의 증언이 살아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답사단을 마을 회관으로 불러 모아 그간 우토로마을이 걸어온 고통의 세월과 현재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동포 3세 우토로 주민회 총무 리무률 청년이었다. 그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정확한 한국어 실력으로 ‘조국 동포의 우토로 사랑’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며 고국동포의 성금과 양심 있는 일본인의 도움에 힘입어 토지문제의 해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알려주어 답사단원들의 무거운 마음을 다소 풀어주었다. 

▲ 우토로마을 “에루화회관” 앞에 선 답사단     © 김영조
   
▲ 우토로마을 골목에서 본 것들 / 다 쓰러져가는 집, 이 마을엔 저렇게 빈집이 많아 살지 못할 마을임을 드러낸다.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 일본인 마을과의 사이에 있는 작은 도랑     © 김영조
   
<에루화>라고 적힌 작은 마을회관 1층에서 우토로마을의 그간 경위를 설명 듣고 난 뒤 답사단원들은 실제 마을을 둘러보았다. 찌그러진 함석지붕과 하수도 시설(상수도는 1989년 공동용)이 변변치 않은 좁은 골목길은 60년대 한국의 달동네를 연상케 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었다는 증언자들의 증언은 해방 65년을 맞은 2010년 8월 11일에도 여전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으로 답사단의 마음을 슬프게 했으며 초일류 국가 일본의 도덕과 양심을 의심했다.
 
우토로마을 옆에는 작은 시멘트 도랑이 하나 흐르는데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은 일본인 마을이고 이쪽은 우토로마을 이었다. 눈으로 봐도 건너편 일본인 마을은 골목이 반듯했으며 상하수도 설비가 잘되어 있었으나 이쪽은 방치되어 있었다.
 
이러고도 일본은 국제무대에서 아시아의 용인 양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으며 태평양전쟁 때의 구호는 ‘서양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켜 아시아인의 행복을 추구한다.’라고 목청을 돋우었다. 자국이 필요하여 강제로 끌어다 놓고 방치된 삶터조차도 챙겨주지 않고 난데없이 땅 임자라고 나선 서일본식산회사의 ‘건물수거토지명도’ 소송에 손을 들어준 게 일본정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토로 주민’ 내쫓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 내 움직임은 우토로를 지키자는 철옹성 같은 주민들과 뜻있는 한일시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우토로마을은 현재 토지매입을 위한 법인설립을 하는 등 하나둘씩 마을 살리기 일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지구촌동포연대 배덕호 씨는 "한국 시민들이 바라는 것은 우토로 땅에서 우토로 주민들이 계속 살 수 있게 하는 것과 과거의 모든 역사를 소상히 밝혀 줄 수 있는 역사기념관을 세우는 것"이라고 YTN과의 2009년11월 5일 자 인터뷰에서 밝혔다.
 
우토로 주민들과 일본 각계 인사들도 역사기념관 건립에 뜻을 같이하면서 독일의 작은 마을에 1차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를 보존해 만든 ‘브라이테나우’ 역사자료관과 같은 역사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에 마음을 모았다.  

지금도 장마철이면 마을길이 질척거려 신발이 푹푹 빠지고 지붕이 새는 우토로마을. 집집마다 있어야 할 상수도 시설 하나 없이 마을 공동 우물처럼 사용하는 상수도마저 고장 탓인지 자구책으로 펌프시설을 설치하여 쓰고 있지만 이러한 시설보다도 더 가슴 아픈 것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우토르마을이 잊히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존재 자체가 잊혀가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우토로를 지킨다는 것은 단지 생활터전을 지킨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들이 흘리신 피눈물의 역사와 그 피눈물을 삼키며 살아온 우리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 각인시키려는 것입니다.’라고 2007년 7월 23일 자 ‘노무현대통령께 드리는 요망서’에서 김교일 회장은 자신들의 입장을 호소했다. 

한때 1,500여 명이 살던 우토로마을은 68가구 177명의 주민이 일본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토지매입협상이 순조롭게 추진되어간다면 우토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이들이 여생을 보낼 날도 머지않았다. 어서 그날이 오길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낡고 누추한 마을 골목을 돌아 나오다 마주친 늙으신 할머니의 푸성귀 다듬던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그 할머니가 오래오래 사시길 바라면서 찾아간 곳은 오사카 인권 박물관이었다.    

▲ 우토로 마을 길에 앉아서 푸성귀를 다듬던 할머니가 새 보금자리에 들 때까지 건강하시길 답사단원들은 빌었다.(왼쪽),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박남순 씨     © 김영조, 이정미
 
 
 인권의식의 걸음마 ‘오사카 인권박물관’  
  
▲ 한글판 인권 박물관 안내도를 보면 상당한 인권문제를 다루는 것같지만 내용은 빈약하다.     © 리버티 오사카인권박물관

오사카 인권 박물관은 일본 내의 5,000여 개가 넘는 박물관 중에 보기 드문 인권에 관한 종합적인 박물관으로서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 더 나아가 세계를 향해 인권 존중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설립했다. 부락문제(피차별)를 비롯한 인권문제에 관한 조사연구와 더불어 관계자료와 문화재 등을 수집, 보존하여 이를 전시하고 공개함으로써 인권사상보급과 인간성이 풍요로운 문화발전에 공헌함을 설립 목적”으로 1985년 오사카시 나니와구(浪速区) 나니와니시(浪速西) 3-6-36 번지에 개관했다. 2010년 올해로 개관 25년을 맞이한다.  

2층짜리 아담한 건물에는 1층을 4개 전시실로 꾸몄고 2층에는 연수실과 회의실 등이 있으며 275석 규모의 객석을 갖춘 ‘리버티’ 홀은 각종 공연을 하고자 하는 단체에 빌려주어 문화활동을 돕고 있다고 5분간 상연된 ‘인권박물관 시설 안내’ 비디오는 설명해준다.
 
이어 1층 전시실로 들어서니 박물관의 종합적인 주제인 ‘내가 만나는 일본사회의 차별과 인권’으로 꾸민 4개의 전시실이 우리를 기다린다. 4개 전시실은 각각 인권의 현재, 자신의 가치관과 차별,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주장과 활동, 자신에게 있어서의 차별과 인권 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6월 22일부터 8월 29일까지는 “한국병합 100년 (일본과 조선반도의 역사)”라는 특별전시실을 마련해두고 있어 시의적절한 특집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일전쟁과 중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근세 100여 년을 전쟁놀음에 광분한 일본에 과연 ‘참다운 인권’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권에 침묵할 수만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오사카인권 박물관은 그 존재 자체를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시실을 들어서는 순간 훼손하고 망친 인권을 반성하는 게 아니라 ‘인권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접근하는 것부터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인권은 서로 지켜주는 것’이며 그런 지켜줌을 제대로 했다면 ‘쟁취’도 필요 없음을 간과한 채 전시물들은 전시되고 있었다. 피해자 국민과 가해자 국민의 인권의식의 차이를 4개의 전시실을 둘러보는 내내 재확인했으며 이는 물과 기름처럼 쉽사리 조화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 오사카 인권박물관이 만든 작은 책자에는 조선인 징용자들이 탄광에서 혹사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탄광노동”이라고만 설명할 뿐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 후쿠오카현 타가와시 석탄역사박물관
  
무엇보다도 답사단원 중에는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를 강제연행으로 잃은 어르신들도 있어서 생래적으로 일본인들의 ‘인권’이라는 말에 알레르기를 보일 수밖에 없다. 기어코 한 어르신은 인권박물관 관람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금세기가 지나가기까지 어쩌면 그분들의 이런 감정은 지속할지 모른다. 전쟁은 인권을 짓밟기 가장 좋은 수단이며 식민지 경영 또한 인권을 내리눌러야 가능한 놀음이다.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인권’이라는 숲을 바라다본다면 훨씬 멀리 까지 내다볼 텐데 아쉬웠다
 
▲ 오사카인권박물관 건물, 내부전시실, 한일역사 특집을 알리는 포스터, 자료실에서 파는 일본 내 천민집단에 대한 책(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 김영조

역설적이지만 3전시실에 전시된 ‘피차별 코너’는 그간 일본정부가 어떻게 인권을 짓밟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에 좋은 전시실이다. 이곳에는 12가지의 주제로 인권을 다루고 있었다. 재일교포, 우치난쥬(오키나와인), 아이누민족, 여성, 성적소수자, 장애자, HIV감염자, AIDS환자, 한센병회복자, 공해피해자, 피차별부락, 홈리스(노숙자), 미나마타환자 등에 대해 대략적인 차별 행위와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었으나 전시공간과 차별을 보는 수위의 문제가 있어 누구보다도 인권에 민감한 한국인에게는 코흘리개 대상의 인권전시로밖에 안 보였다. 
 
심한 말이라도 할 수 없다. ‘인권’을 박물관에 박제된 모습으로 전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어디서 어떻게 인권이 유린당하였는지를 밝히는 게 참다운 ‘인권교육’이라고 믿는다. 

답사단원들이 8월 6일부터 17일까지 보아온 큐슈의 치쿠호 탄광지역의 살인적인 노동 현장, 시모노세키 똥굴동네, 우토로 조선마을의 강제철거 위기, 단바 망간탄광의 비참한 노동자들의 삶, 치바현 조선인 학살 현장 등등은 과거 일본의 인권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 곳은 오사카 인권 박물관을 만들기 이전에 보존하여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도록 일본인들에게 보여 줘야 할 곳이었음에도 하루빨리 흔적이 사라지길 바라는 듯 방치되고 때로는 은폐된 채 세월 속에서 잊혀가고 있다.

일본이 과거 조선과 오키나와, 중국, 싱가폴, 대만 등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 가한 가해의 역사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그 위에 세우고자 하는 인권박물관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가짜다. 그리고 위선이며 허구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일본인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말 할 수 있다. 그것이 ‘인권’인 것이다. 오사카인권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마음은 이래저래 가볍지 않았는데 밖의 찜통더위마저 지친 몸을 더 피곤케 했다. 아주 언짢은 박물관이었다.
 
<8편> 동네 망치는 망간탄광기념관을 우리 마을에 세우지 마라
(폐관된 교토 단바망간기념관의 재기를 꿈꾸는 동포 2세 이용식 씨)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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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9/16 [12:2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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