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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 극복하는 표석 세웠다
서울시 무성의로 경술국치 현장 통감관저 터 표석 무허가 상태로 세워져
 
김영조   기사입력  2010/08/30 [07:32]
 

▲ 비가 오는 가운데 통감관저 터 표석 제막식을 하는 모습     © 김영조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조국의 운명이 떠난 날이니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여라 갈수록 종 설움 더욱 아프다
조상의 피로써 지킨 옛집은 백주에 남에게 빼앗기고서
처량히 사방에 표랑하노니 눈물을 뿌려서 조상하리라
어디를 가든지 세상 사람은 우리를 가리켜 망국노라네
천고에 치욕이 예서 더할까 후손을 위하여 눈물 뿌려라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때니 아픔과 슬픔을 항상 머금고
복수의 총칼을 굳게 잡고서 지옥의 쇠문을 깨뜰지어다”


위 노래는 어제 경술국치 100년, “통감관저 터” 표석 제막식에서 가수 전경옥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 퍼진 국치추념가이다. 경술국치를 잊지 말자는 피맺힌 외침이다. 

어제(8월 29일) 일본제국주의 강요에 의해 ‘병합조약’이 조인된 100년 만에 서울 남산 ‘통감관저 터’에서는 ‘경술국치’ 현장임을 알리는 표석 제막식이 강제병합100년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상임대표 이해학, 이하 ‘한국실행위’) 주최,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 주관으로 있었다. 아침부터 하염없이 내리던 비는 행사 시간이 다 돼서도 그칠 줄 몰랐다. 아니 그날의 치욕을 통곡하듯 더욱 세차게 내렸다.  

‘강제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일본의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인되었으며, 8월 29일 일본군이 서울에 집결한 삼엄한 분위기 아래 순종의 조칙으로 공포되었다. 이 조약은 체결과정의 강압성은 물론 황제 칙유(勅諭)에 순종의 서명과 대한제국 국새(國璽) 날인이 없는 등 최소한의 인준 요건을 갖추지 못해 불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으나, 일본은 지금까지도 “국제법상 합법적”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 일제가 ‘강제병합조약’의 근거로 내세우는 순종의 포고문, 이 포고문에는 서명도 없고, 국새는 위조라고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밝혔다.     © 민족문제연구소

▲ 데라우치의 조선 통치방침을 상세히 알리는 포고문. “전 한국원수의 희망에 응하여 그 통치권의 양여를 수락”한다고 쓰고 있어 조약체결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병합과 관련해 공이 있는 ‘매국친일파’들에 대한 훈포상과 등용을 약속했지만, 통치를 어지럽히고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징벌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그 치욕의 강제병합 현장 통감관저 터엔 강제병합 100년이 되도록 역사의 교훈을 새길만한 어떤 표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 100년을 맞아 한국실행위가 드디어 나선 것이다. 행사의 시작은 먼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개식사로 시작되었다. 임 소장은 "평화를 기원하는 한일 시민단체들의 염원을 모아 이 표석을 세운다. 이 표석은 서울시가 허가를 안 해준 채로 세우는데 이것이 무사히 서 있을 수 있느냐에 따라 앞으로 동아시아의 역사도 달라질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부끄럽지만 그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 현실이 더 부끄럽다."라고 말했다.  

또 이해학 한국실행위 상임대표는 이날 기념사에서 "가슴 아픈 역사가 시작된 이곳에 표석을 세우자고 서울시에 건의했지만 시는 어처구니없이 '녹천정 터'라는 표석을 세우자고 했다. 치욕의 역사라 할지라도 이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는 것이 후세를 위한 길이다."라며 서울시를 비판했다. 이어서 일본실행위를 대표하여 기념사를 한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은 "이 표석을 통해 지금의 세대들이 강제병합의 역사를 계속 기억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 개식사를 하는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왼쪽), 기념사를 하는 한국실행위 이해학 상임대표(가운데), 일본실행위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 김영조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서울시와 표석 설치에 대해 협의했지만 서울시는 지난 18일 '표석설치자문위원회'를 열어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며, 국민 정서상 반감이 있는 경향이 강하므로 <경술국치> 표석 설치는 재고해야 한다."라는 답을 해왔다며 '통감관저 터' 표석 설치에 반대했다고 한다. 또 서울시는 이 자리에 오는 10월께 '녹천정 터'라는 표석을 세울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가 세운다는 어처구니없는 정자 '녹천정'(鹿川亭)은 조선철종 때 있었던 정자를 말하며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자 일본이 녹천정 터를 빼앗아 정자를 허물고 새로 공사관을 지었던 것이다. 그 후 1906년부터 통감관저로, 강제병합 이후 1939년까지는 총독관저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정자 복원 계획을 세운다는 말에 세찬 빗줄기 속에서 행사 참석 중이던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은 “이완용이 나라 팔아먹었던 자리라는 표석을 세우는 게 좋은지 한량들이 호시절 앉아서 음풍농월하던 정자를 복원하는 게 좋은지 서울시는 시민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어서 표석을 세울 수 없다고 한 표석설치자문위원회 명단을 서울시는 공개하라.”라고 서울시를 향해 큰 목소리를 내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철종 때 세워졌다는 흔적도 없는 녹천정이라는 정자에 억지로 역사적 의미를 붙이려는 모습이 한심스럽다. 서울시가 차마 강제 철거를 하지는 않겠지만, 한 자리에 나란히 '통감관저' 표석과 '녹천정' 표석이 세워진다면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 행사 중 만세 삼창을 하는 시민들, 옆에서는 방송카메라가 찍고 있다.     © 김영조
시민들 중 아들 문하람 군과 행사에 참석한 권혜순(47) 교사도 흥분하면서 “독일 사람들에게 있어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역사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일 것이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정부와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3년여에 걸친 토론을 한 끝에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학살 역사를 기억하는 홀로코스트기념비를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들 독일 사람들과 달리 부끄러운 과거를 어떻게 청산하고 기억할 것인지 고민하는 않는 서울시장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이 행사가 시작되기 전 김영호 유한대 총장,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아라이 신이치 일본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고은 시인 등 지식인 20여 명이 퇴계로 세종호텔 로비에서 통감관저 표석 제막식장까지 침묵행진을 했다. 이들이 침묵 행진을 한 까닭은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이라는 두 조약이 설명할 수도 없는 유례없는 잘못된 역사로, 이에 대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고은 시인은 “마침 오늘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은 100년 전 오늘 우리 한국인 전체가 흘린 눈물과 같다.”라고 말했다. 사진을 찍는 기자들은 물론 참석자 대부분이 비에 온몸을 흠뻑 적신 채 1시간을 꼼짝 않고 지켜보면서 치욕의 역사 100년을 새기고 있었다. 어쩌면 참석자 중 일부는 행사 뒤 온몸이 비에 젖은 탓으로 몸살을 앓았을지 모른다. 대신 그 몸살이 이제 국치 100년을 청산하는 혁명의 시작이 되는데 밑거름이 되면 좋을 일이다.     

 
▲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쓴 표석에는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 김영조
    
▲ 표석 제막식장임을 알리는 커다란 펼침막     © 김영조


칙유勅諭 

짐이 부덕한데도 관대艱大한 왕업을 계승하여 다스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를 유신하는 것에 관해 여러 가지 시책을 마련하고 이를 시행하여 일찍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국가는 더욱 쇠미해졌고 도처까지 매우 피폐해져 단 시일 안에 만회할 조치도 생각나지 않았도다. 한 밤중까지 걱정해보아도 최선의 방책은 알지 못하겠는데 이를 마음대로 한다면 더욱 지리쇠잔支離衰殘해져 끝내 수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국가를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시킬 방안을 묻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짐은 이에 반성하고 결단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믿고 의지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천황폐하께 양여하여 밖으로는 동양의 평화를 굳건히 하고 안으로는 조선 백성을 보존하려한다. 너희 대소 신료와 백성들은 국세와 시의를 깊이 성찰하여 소요하지 말고 각자 맡은 바를 안정적으로 하며 일본 제국의 문명한 신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모두 누려라. 짐의 오늘의 이 행동은 너희 백성을 잊어서가 아니라 진실로 너희를 구제하려하는 정성 가득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유념하라

 
                                                                        융희 4년 8월 29일 어새御璽 

강요에 의하거나 일제가 쓴 것으로 의심되는 ‘국가양도’ 운운이 쓰여 있는 순종 포고문(칙유) 국역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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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8/30 [07:3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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