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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연행자들 일본 탄광에서 죽어갔네
[답사일지1] 호슈탄광 갱구와 이이즈카 탄광 일대 조선인 징용자 흔적들
 
김영조/이윤옥   기사입력  2010/08/27 [17:29]
 “대일본 제국군인은 전장에서 3일이고 4일이고 밥도 안 먹고 싸운다 아나?  너희는 꼬박꼬박 세끼 먹고 있는데 웬 잔소리냐?”

탄광에서 탄을 캐던 조선인들의 배고프다는 소리가 감독 귀에 들어갔는지 감독은 조선인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한다. 그래도 배고픈 징용자들은 참다못해 고향에 편지를 보냈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소 /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 고향으로부터 쌀가루 부쳐왔네 / 쌀가루 받아들고 눈물만 흘렸네/ 보따리 풀어서 쌀가루 집어 먹고 /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불러봤네 / 감독 놈 겁이 나서 숨죽여 불러봤네”

고향 어머니도 초근목피는 마찬가지련만 객지 나간 자식 위해 쌀가루 곱게 빻아 보내면서 또 얼마나 가슴 저렸을까? 일을 시키려면 밥이라도 든든히 먹일 것이지 기껏 견준다는 게 대일본제국주의 군인들이 삼사일 굶고도 용감했다는 말을 하다니...
     
▲ '2010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첫날 부산항을 막 출발한 배 갑판 위에서     © 김영조
 
답사단이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여 밤샘 항해 끝에 시모노세키 건너편 모지항(門司港)에 도착하자 반갑게 일행을 맞아준 것은 기타큐슈 다문화공생센터 교육지원팀 소속인 이정화 씨와 박환나 씨였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정화 씨는 우리의 큐슈여행 전체를 기획해주었고 ‘이웃과 고리처럼 하나가 되어 잘 살기를 바란다.’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의 환나(環奈) 씨는 우리가 기타큐슈를 떠날 때까지 불편함 없이 그림자처럼 우리를 도운 맘씨 고운 재일동포 3세였다.    

한일여객선 세코마루호의 8인실 방 2층 침대는 비교적 쾌적했지만 답사의 기대감으로 잠을 설친 사람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첫 답사지로 가는 버스 안은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밖을 응시하는 눈초리들이 제법 매섭다. 첫 발자국을 내딛는 치쿠호(筑豊) 탄광지역의 호슈(豊州) 탄광 갱구를 안내해줄 요코가와 데루오(橫川輝雄, 70살) 씨를 가리타(刈田) 동사무소 앞에서 태운 버스는 구름 한 점 없는 기타큐슈의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린다. 치쿠호 지역의 조선인 강제연행연구를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 요코가와 씨는 전직 고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답사팀이 방문할 곳에 대한 대강의 설명과 함께 조선인들이 노역을 당한 탄광생활을 소개해주었고 우리의 안내자 환나 씨는 옆에서 알아듣기 쉽게 통역해주었다. 

▲ 치쿠호 탄광일대를 차 안에서 자료를 보이며 설명하는 요코가와 씨     © 김영조

“경상도 청송 출신으로 안영환이란 조선인은 17살 때 부관연락선(釜關, 부산-시모노세키)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내려 여러분이 아까 내린 모지항에 도착한 뒤 철도로 호슈탄광에 배치되었지요. 그가 부른 노래가 여러분께 나눠 드린 자료에 있는 ‘신세타령’이랍니다.” 요코가와 씨는 하나라도 더 우리에게 조선인의 혹독한 탄광생활을 전하고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이야기 핵심은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몹시 힘든 노동과 함께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렸다는 이야기였다. 

첫 답사지인 치쿠호 지역은 기타큐슈 중에서도 손꼽히는 탄광지대로 에도시대(江戸時代, 1700년대) 중기부터 석탄개발을 하던 곳이다. 명치정부는 1872년 광산개발령을 공포하고 정부와 민간인에 의한 탄광개발을 장려했다. 1901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 현재 일본제철)를 비롯하여 재력가들이 탄광개발에 다수 참여하면서부터 이곳은 일본 최대 규모의 탄광으로 성장했다. 이때 많은 노동력을 조선인 강제연행으로 충당하여 기업을 살찌운 회사들은 오늘날도 굴지의 기업으로 꼽히는 미츠비시(三菱), 미츠이(三井), 스미토모(住友) 등으로 이들은 치쿠호 지역의 탄광업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모은 회사들이다. 

▲ 조선인 징용연구가 요코가와 씨가 제공한 사진으로 앞줄에는 14살 소년들도 다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오른쪽 위에 소화 17년3월(1942)이라고 적혀있다)     © 김영조
   
후루카와기계금속(古河機械金属)으로 유명한 후루카와 그룹도 그 토대는 치쿠호 탄광 붐 때 후루카와광업(古河鉱業)을 통해 거대 재벌이 된 회사인데 답사단의 안내를 맡은 요코가와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노동자를 9,000명이나 거느린 이 탄광에서 특히 조선인 학대가 심했다고 했다. 교묘한 그들은 노무관리라는 직책을 만들어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을 관리하게 하는 악랄한 수법을 썼는데 이 때문에 조선인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번은 일본인 노무관리인과 조선인관리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 재판에 부쳐졌으나 힘없는 조선인이 이길 리가 없었다. 재판결과 조선인 노무관리인은 나가사키 감옥소로 이송되었는데 하필이면 원폭지 감옥소로 가는 바람에 그곳에서 원폭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모든 일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행과 불운이 거듭하던 시기였다.  

몇몇 어르신을 빼고는 배고픈 경험이 없는 답사단원들은 요코가와 씨가 들려주는 과거 조선인의 고통이 자장가라도 되는 양 하나 둘 조는 듯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졸음이 쏟아진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머리가 덥수룩한 기사 아저씨가 전세버스를 몰고 나오기 전 차량점검을 제대로 안 한 탓에 에어컨이 중간에 서버리는 바람에 피곤하던 차 잠시 졸음이 몰려 온 것이었다. 무엇이든 철저히 준비한다는 일본인들의 꼼꼼함에도 때론 허점이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였으나 푹푹 쪄대는 더위는 요코가와 씨의 버스 안 강의를 지속 시키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청송출신 안영환 씨가 불렀던 ‘강제연행 된 조선인 광부의 신세타령’을 함께 읽는 것으로 일단 접은 채 버스는 이후 삼십 여분 더 달려 한적한 농촌 마을 입구에 답사단을 내려놓았다. 

둘러보니 벼 이삭이 익어가는 들판 가운데 점점이 주택들이 한적하게 산재해 있었다. 탄광 하면 산골 두메마을을 떠올리는 우리 정서에 호슈탄광(豊州炭鉱) 갱구를 찾아가는 길은 평이하다 못해 이런 곳에 과연 갱구가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칠순의 요코가와 씨는 폭염 속에서도 잰걸음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라간 곳은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듯한 좁은 골목길이었다. 채 오 분도 못 간 곳에 갱구는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야 하는 좁은 대문 안은 서너 명만 들어서도 비좁은 개인주택 앞마당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곳이 탄을 캐던 탄광이었다. 어두컴컴한 경사진 굴 입구는 자세히 들여다보니 영락없는 갱구였다. 지금은 내려가지 못하게 막아두었으나 얼마 전까지 견학차 드나들었다고 했다. 

▲ 주택가 마당 끝에 자리한 치쿠호지역 일대 250여개 갱구 중 유일하게 남은 곳     © 김영조

이 갱구는 개인이 보존하고 있는데 치쿠호 지역에는 이러한 갱구가 250여 개 있었으며 호슈 탄광이 자리한 타가와(田川)지역에만 100여 개가 있었으나 1960년대부터 석탄이 사양산업으로 폐광되기 시작한 이래 이제는 치쿠호 지방 전체를 통틀어 이곳 갱구가 유일하게 남았다고 한다. 요코가와 씨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답사단원들은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마지막 남은 갱구 이마저도 언제 폐쇄될지 모르는 상황에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일까 유난히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하다.
 
폐광이 되면서 인구도 줄기 시작하여 치쿠호 탄광 일대의 이이즈카시(飯塚市)는 107,467명(1955년)에서 80,000명(2006년)으로 줄었고, 호슈탄광이 있는 다가와시(田川市)는 102,755명(1963년)에서 52,328(2010년)로 줄어드는 등 석탄 산업의 흥망과 인구는 정비례함을 알 수 있다. 이때 탄광에서 일하던 1세들의 후손들이 이 지역에 많이 남아 살게 된 까닭으로 우리의 안내자 요코가와 씨는 주변에 조선인 친구가 많았다고 했다. 자신이 조선인 강제연행사실을 연구하게 된 계기도 이들 조선인의 영향이 컸으며 더 큰 자극은 타가와(田川)에서 평생을 조선인강제연행과 징용문제를 다뤄 온 하야시에이다이(林えいだい, 77살)씨였다. 하야시 씨는 징용으로 탄광에 끌려간 조선인, 자살특공대, 군대위안부, 이중징용,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에서의 조선인 학살 등 저서만도 50여 권에 이른다. 요코가와 씨는 하야시 씨와 같은 작가를 만나 지금껏 자신도 조선인징용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다. 

강제징용 후 부모님을 이역 땅에 묻고 그대로 살아가는 2세들의 나이도 이제 70대를 넘기고 있다. 이 분들이야말로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이며 요코가와 씨도 비록 일본인 이기는 하지만 그런 조선인들의 핍박의 역사를 기록하는 양심 있는 일본인의 한 사람이다. 


▲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갱구이며(왼쪽) 갱구 위는 개인 집 마당으로 빨래가 널려 있음     ©김영조

요코가와 씨는 1년에 4~5회 많을 때는 40여 명부터 적을 때는 4~5명 정도의 한국인들에게 호슈 갱구 등을 안내한다고 했다. 답사팀들은 연구자나 역사단체 사람들로 순수 관광팀은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택가 마당 한가운데 남아있는 갱구가 무슨 관광지가 될까 싶었으나 갱구 주인 입장으로는 가끔씩 찾아오는 단체를 관광객으로 오인 할 듯도 싶었다. 키 낮은 담장 너머로 이부자리를 빨아 넣은 빨래대가 보이고 손바닥만 한 작은 정원은 깨끗이 손질되어 있었으나 집안에는 사람 기척이 없었다. 만일 마당 쪽에 집주인이 나와있을 때 몰려온 답사단원들이 정원 쪽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모습을 보았다면 썩 좋아할 리는 없는 정경이었다.  

그날 갱구를 나오며 몇몇 회원들은 갱구를 소유한 집주인에게 감사패라도 전달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갱 입구를 없애지 않고 잘 보존해주심에 감사드린다.’라는 말을 써 넣은 감사패라도 건네자는 말은 한번 생각해볼 사안이었다. 주택가로 변신한 호슈탄광 지역의 유일한 갱구를 지키자는 뜻에서 말이다. 몰려드는 관광객이 귀찮으면 언제라도 주인이 갱구 견학을 못하게 할지 모르는 상황이 어째 씁쓸했다. 일본 정부가 나서서 사라지는 갱구를 보존할 것이라는 기대는 아예 안 하는 게 좋다.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과거 탄광 노동하던 자리를 보려고 몰려오는 것을 꺼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절 등지에 고려시대 종이라든가 불화 등이 있다고 알려져 한국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 감추어버리는 예가 허다하다. 마지막 주택가에 남은 호슈 탄광 갱구를 돌아보고 나오며 머지않아 그것마저 사라질 것 같은 마음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그곳에서 배를 곯아가며 인간 이하의 대접으로 탄을 캐어 날라야 했던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의 삶은 어떻게든지 다양하게 조명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비좁은 갱구 견학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주택가 좁은 골목을 지나 공회당 앞마당으로 안내되었다. 요코가와 씨는 갱 입구에서 얼마 안 간 나무그늘에 우리를 세우더니 옛 광부들의 기숙사 터를 가리켰다. 탄을 캐던 당시에는 협화기숙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말끔한 마을 공회당이 들어서 있다.
 
▲ 징용자들의 협화기숙사 터엔 말끔한 공회당이 들어서 있고(왼쪽) 지금 벼 이삭이 자라는 논에는 탈출 때 똥통을 빠져나온 조선인들이 몸을 닦던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 김영조
    
요코가와씨는 공회당 옆 푸르른 벼이삭이 자라는 논배미를 가리키면서 그곳에 변소가 있었는데 조선인들은 혹독한 탄광노동을 벗어나고자 변소 똥통으로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했다고 한다. 똥통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한 행동으로 다행히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그곳이 탈출구임을 알아챈 뒤로는 그마저도 막아 버렸으니 그 절망감을 지금의 우리가 어찌 쉽게 이해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래죽어도 죽고 저래 죽어도 죽어야 할 판인 사람들에게 탈출은 유일한 희망이요 생존의 이유였다. 당시 각 탄광지역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탈출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항의 데모 등은 극도로 열악한 여건 아래에서 짐승처럼 부리려던 일본감독들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아소다로 전 일본 총리의 할아버지 아소 다이키치(1857~1933)가 운영하던 아소광업에서는 11,000명의 조선인이 강제연행 되어 일했으며 1936년에는 갱내 화재로 조선인 25명이 사망했다. 아소 다이키치는 1872년부터 석탄 채굴을 시작해 80년대 후반에는 탄탄한 기반을 잡았고 이 돈을 토대로 1899년에는 중의원 의원이 되었으며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인한 석탄 수요가 급증하자 사업도 크게 번창했다. 그러나 아소광업에 대한 기록 중 가장 큰 특색은 탈출자의 비율이 61.5%에 이를 만큼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그만큼 다른 광업소에 비해 작업환경이 열악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며 아소탄광에서는 희생당한 조선인을 위한 추도비 하나 만들지 않았다.     

▲ 탄광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 모습 (후쿠오카현 타가와시 석탄역사박물관 제공)     © 김영조

그뿐만 아니라 이이즈카탄광에서도 1944년 갱내 화재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갱 안에서 채탄작업을 하는 조선인이 있음에도 화재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갱 쪽으로 물을 들이부어 생사람이 45명이나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열악한 노동으로 말미암은 인명 피해가 속출했다고 한다. 

안내를 맡은 요코가와 씨는 사람이 물에 잠겨 있으면 30일 이면 완전히 알아볼 수없는 형체로 뼈만 남게 되는데 탄광 측은 90일이 지나도록 시신 수습을 미루었다고 했다. 유골처리의 늑장은 물론 사망자 유가족에게 보상도 없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비 하나 세우지 않는 악질 광업주들이 그들의 목숨과 맞바꾼 노동력으로 배를 불려 오늘날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광업주의 부당행위는 인근 탄광에 소문으로 번져 여기저기서 조선인 광부들을 분노케 했고 크고 작은 탈출과 항의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탄광 내에서 극심한 노동 끝에 죽어간 조선인 푸대접은 <강제연행 된 조선인 광부의 노래>에 자세히 나와있다. “대일본제국 군인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동료가 죽으면 그것을 감추고 적과 싸웠다. 네놈들은 단지 사람 하나 죽은 것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일을 멈춰서야 어찌 전쟁에 이기겠느냐? 죽은 놈은 채탄 작업 후에 채탄상자에 담아 처리할 테니 네놈들은 동요 말고 탄을 캐라.”라는 구절을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 징용자들을 얼마나 학대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 한국인징용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헌화하는 답사단(왼쪽) 위령비 앞에 엄청난 크기의 굴뚝이 뾰족하게 서 있는데 과거 석탄사업의 호황을 말해준다.     © 김영조

호슈탄광 갱구에 이어서 우리가 찾은 곳은 타가와시(田川市) 석탄자료관 근처 옛 탄차수리공장지 언덕에 있는 한국인징용희생자 위령비였다. 깎아지른 탄광 굴뚝 두 개 사이 계단을 오르면 무궁화를 에둘러 심은 한가운데 높다란 비가 우뚝 서 있다.  

이 위령비는 재일한국민단 타가와지부와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건립위원회에서 1988년 4월에 세운 비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생물은 모두 저마다 삶을 누리고자 한다.”로 시작된다. 뜨거운 팔월의 태양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가운데 비문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읽어준 사람은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윤 선생님이다. ‘소리개는 하늘에서 살고 고기는 물에서 살듯 저마다 살아야 할 곳이 있건만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은 타향에 끌려와…….” 비문 낭독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모두 숨죽였으며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잠잠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떠도는 영혼들이 있다면 이제라도 마음의 짐을 내리고 영면하길 빌고 또 빌었다. 
   
▲ 산처럼 보이지만 채탄 시 나온 폐석탄 찌꺼기 집적장으로 보타산이라 불린다(왼쪽), 산허리가 잘려진 곳은 석회암을 채굴하던 곳 (오른쪽)     © 김영조

위령비가 자리한 곳이 높은 지대여서 요코가와 씨는 사방팔방을 가리키며 그 일대의 탄광 설명을 해주었다. 그중에서 위령비의 정면으로 건너편 먼발치의 산이 눈에 들어온다. 삼각형의 산자락 중간이 싹둑 잘린 모습인데 가와라다케(香春岳)라고 불리는 아사노시멘트회사가 경영하던 석회암을 캐던 곳이다. 산 전체가 고품질 석회암 덩어리로 1925년부터 시멘트회사들이 속속 들어섰으며 이곳에서도 강제연행 된 조선인들의 노동이 집중되었다고 한다.  

산 중턱이 싹둑 잘린 가와라다케산 앞에는 제법 높다란 산봉우리가 서너 개 보이는데 이것은 산이 아니고 ‘보타산(捨石山 또는 硬山)’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채탄 과정에서 광석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돌 부스러기를 모아둔 집적장(集積場)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즈리산(ズリ山)”이라고 하며 보타산이라 불리는 것은 큐슈의 사투리이다. 한때 석탄 산업이 번창했던 홋카이도(北海道)、죠반(常磐)、큐슈(九州) 북부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었으나 지반이 약해 무너져 내린다는 이유로 상당수의 보타산은 허물어 버렸고 우리가 보았던 이이즈카 일대의 보타산도 이제는 한두 개만이 탄광의 흔적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흡사 자연스런 산처럼 보이는 보타산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탄광 규모가 컸음을 의미하며 그곳에는 반드시 우리 조상의 땀과 강제노역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006년 3월 26일 이이즈카시(飯塚市)로 합병되기 전 호나미쵸(穂波町)에 있는 타다구마 탄광의 높이는 약 124미터로 여기서 쌓아 만든 보타산 기슭에는 사람 머리 크기만 한 작은 돌기 들이 있는데 이는 조선인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타다쿠마 탄광에는 4,000여 명이 끌려와 강제 노동을 했던 곳이다. 석탄으로 쓰지 못하는 폐석 더미 보타산은 토사붕괴의 위험이라는 미명하에 하나 둘 허물어버려 그나마 있던 강제연행자들의 자취를 이젠 찾기가 쉽지 않다. 


▲ 이이즈카 탄광의 석탄을 들어 올리는 시설 앞에서 설명을 듣는 답사단     © 김영조
       
부산항을 떠나 첫 기착지 모지항에 도착하자마자 답사버스에 오른 답사단은 호슈탄광 갱구, 타가와시의 한국인위령탑, 이이즈카의 석탄 끌어올리던 기계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로 지금은 지역주민의 마을회관이 들어 서 있는 공회당 터로 향했다. 제법 넒은 골목길 왼편으로는 어린이용 야구장이 한적하게 있을 뿐 그저 평범한 주택가였다. 그러나 이곳 역시 석탄산업의 호황기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터였다. 그러다가 탄광사고라도 당하면 그저 탄상자에 담아 장례절차 없이 공동묘지에 묻었는데 우리가 찾아간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 무연고 무덤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공회당이 들어서 있는데 건너편 야구장을 바라다보는 답사단(왼쪽), 어린이 야구장 터는 예전에 석탄을 캐던 곳(오른쪽)     © 김영조

 당시 이곳에는 500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어린이 놀이터로 변신하여 알록달록한 그네만이 한여름 뙤약볕에 반짝이고 있을 뿐 그 어디에고 작은 추모비나 공동묘지였음을 알리는 표지는 없다. 다만, 요코가와 씨의 증언만이 유일한 증거일 뿐이었다. 기록하지 않고 사라진 숱한 징용의 현장과 현재 진행형인 현장들이 대관절 얼마나 될까? 노동력을 착취한 쪽에서 보면 하루속히 현장을 없애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독일과 달리 일본에 가해의 기록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라는 것을 알지만 현장을 둘러 보고나니 그래도 “일본의 양심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무연고 무덤에서 울어주는 사람 없이 짐짝 취급되어 묻혔다가 주택이나 공회당 건설로 또다시 정체 모를 곳으로 떠돌았을 구천을 헤맬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매미울음 소리로 나타난 것인지 무연고 무덤 설명을 들을 때는 유달리 매미울음 소리가 구슬펐다.
   
▲ 해장국을 기다리며 조선인 징용자들의 증언을 들려주는 향토사학자 요코가와 씨     © 김영조
첫날부터 강행군을 했지만 모두 처음 보는 징용현장이 가슴과 뇌리에 어른거려 점심때가 되어도 배고픈 줄도 몰랐다. 요코가와 씨의 안내로 늦은 점심을 먹은 곳은 한국식 해장국집이었다. 집 떠나 하루 만에 다시 먹어보는 한식이지만 언제 먹어도 우리 음식은 꿀맛이다. 벌써 김치 없는 싱거운 일본음식이 걱정인 듯 답사단은 김치를 추가로 시켜 체력 보강을 하는 모습이었다.  

해장국이 나오는 동안 요코가와 씨는 한국에 서너 번 왔었다는 이야기와 해장국을 비롯한 한국음식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혹시 조선인 징용자 연구를 하다가 이웃으로부터 비난을 받지는 않았는지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으며 모두 이해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동향 선배로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책만도 50여 권을 쓴 하야시 씨는 집으로 면도칼이 배달되는 등 극성스런 우익들의 협박이 적지 않다고 했다. 요코가와 씨의 친절한 안내를 뒤로하고 우리는 첫날의 마지막 코스인 고쿠라(小倉)교회 주문홍 목사가 기다리는 기타큐슈 생애학습종합센터로 향했다. 

<제2편 “고쿠라 조선인교회 주문홍 목사가 들려주는 재일동포 실상”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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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8/27 [17: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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