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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09년 11-12월
 
정연복   기사입력  2009/10/22 [12:03]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81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09년 11·12월호 중 11월 첫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내일 발견하기

* 성경 본문: 요한계시록 21:1-6a
* 성경 주석

선견자 요한(계 1:1)의 마지막 환상은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 있는 하나님의 한 백성의 미래의 경험에 대한 웅장한 환상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다른 환상들처럼, 그 묘사들은 축어적이기보다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 예를 들어, 요한이 보는 "새 예루살렘"(계 21:2)은  나중에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서로 똑같이 만 이천 스타디온"(21:16), 즉 약 2,200킬로미터인 정육면체로 묘사된다. 이 거대한 규모를 따른다면, 그 도시의 성벽 꼭대기는 지상으로부터 약 250마일 상공의 궤도에 있는 <국제 우주 정거장>의 고도의 6배나 된다. 

현대의 일부 영어 성경 번역들에서는 요한계시록 저자가 사용한 '스타디온'이라는 단위보다  전통적인 단위인 마일(mile)을 사용하여 숫자의 상징주의를 벗긴다. 만 이천 스타디온은 도성의 열두 대문, 열두 지파, 열두 개의 주춧돌, 어린양의 열두 사도 등과 관련되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음이 분명하다(계 21:12-14 참조).

베드로후서 3:7에서 현재의 땅이 불에 타서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과는 달리, 선견자 요한은 이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는"(계 21:1) 방식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후서와 비교해 보면 요한의 환상의 두 가지 독특한 측면이 드러난다. 첫째, 요한은 "이전의 땅"뿐만 아니라 "이전의 하늘"도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을 본다. 이 경우, "하늘"(heaven)은 하나님의 영적 거주지로서의 "하늘"(계 21:22절에서의 이러한 용법 사용 참조)과는 구별되는, 즉 우리가 "우주"(space)라고 부르는 것을 적절히 가리키고 있다.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려는 요점은, 하나님이 만드신 "새" 우주로 말미암아 이전에 창조되었던 우주 전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계 21:5절 참조).

요한이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새 땅에서는 바다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1c절). 이러한 물리적 묘사의 영적 상징주의는 첫눈에 보기에 하찮은 발언에 불과한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열쇠이다. 이 "바다"(qalassa)는 현재 질서 속의 모든 악과 혼돈의 상징이다. 이 상징주의는 악의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짐승" 하나가 "바다"로부터 올라온(계 13:1) 요한계시록의 앞에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새 땅"에서는 "바다"가 없음은, 그러한 악과 혼돈이 추방되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악과 혼돈의 근원 자체가 이제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또한 의미한다.

"새 땅"은 단순히 에덴 동산으로의 복귀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새 땅의 한복판에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2절) "새 예루살렘"을 가져다놓으시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과의 현저한 차이는 나중에 "생명나무"(계 22:2b)에 대한 언급으로 명백해진다. 이전의 "생명나무"는 동산 한복판에 서 있었지만(창세기 2:9), 여기에서는 그것이 도시 한복판에 서 있다. 요한의 요점은, 그것이 단지 자연적인 환경 질서 회복에 그치지 않고 문명과 인간 사회들에게까지 확대됨을 암시한다. 앞서 "큰 바다 물 위에 앉은 큰 창녀(여자)인 바빌론"(계 17:1-6)으로서 요약되었던 인간의 죄성에 의해 타락한 사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 새롭게 된 사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며, 그리고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계 21:2)로서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그런 다음, 요한은 하나님이 보좌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데, 이것은 환상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해석해 준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3절). "이전의 땅"에서는 인류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완전한 인식으로부터 분리시켰던 모든 것이 이제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희랍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집"(home)을 글자 그대로 "장막"(tabernacle, skhnh)으로 묘사하며, 그리고 "거주하다"(dwell)를 가리키는 같은 어원의 동사를 사용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 동사는 보다 글자 그대로 "[임시로] 살 것이다"(will tabernacle, skhnwsei)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 명사와 동사 모두 보통은 일시적인 거주 혹은 누군가 사이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지낸다는 뉘앙스를 풍긴다(요한 1:14에서 이 동사의 사용 참조).

그러나 요한의 환상 속에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전의 것들이 결국 말끔히 사라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구절은 "그 도성에는 성전이 없다. 그것의 성전은 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계 21:22)라는 진술을 예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히브리서 8:2와 9:11-12에서처럼, 하나님의 하늘의 혹은 영적 거주지는 (특히 히브리서에서, "지상의 장막"과 대조되는 일종의 플라톤적 이상으로서) 그것을 본따서 만든 후대의 성전보다는 토라(Torah)에서 맨 처음 계시된 장막과 더 잘 관련된다.

보좌로부터의 하나님의 선언의 두 가지 다른 측면이 돋보인다. 하나님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이사야 25:8 참조). 왜냐하면 "다시는 죽음이 없을" 것이고, 그래서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더 이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4a절). 만일 죽음 자체마저도 없다면, 진실로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4b절) 것이다(고전 15:54-57에서, 죽음의 패배에 관한 바울의 환희에 찬 선언 참조).

일부 묵시문학에서 예기된 불에 의한 세상의 멸망에 대한 앞선 언급을 상기할 때, 여기 요한계시록 21장에서 하나님의 진술의 다소 애매한 성격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5절). 이전의 것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새 것들을 창조하심으로써 만물을 새롭게 하심에 관해 분명히 언급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주목하라. 오히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것들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갱신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마음에 그려지는 것은, 심판보다는 구원을 강조한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며 마지막"(6a절)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선언에는 뭔가 동일한 생각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이 구절의 두 번째 부분을 먼저 받아들일 때, 모든 것들의 결론은 그것들은 하나님이 태초에 의도하셨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은 그 약속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A부터 Z까지"라는 영어 표현처럼 절대적인 완전함이라는 개념도 전달한다.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 말씀들은 신실하고 참되다"(5절)는 것을 희망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갈 수 있다. "이전의 땅"이 아직은 우리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기"(done) 때문이다(6절).                

* 설교 본문

오늘과 하나님의 내일 사이에는 "더 가까운"(nearer) 내일들이 있다.

내일에 도달하기는 힘들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늘 그렇다. "내일"이 오늘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더 나은 시간을 가리킬 때는 특히 그렇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내일 혹은 미래, 즉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은 현재가 역사의 끝은 결코 아니라는 확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늘의 어둠이 내일까지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내일은 예언의 소재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할 때가 오고 있다"고 힘차게 선언했다. 그러한 예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 또한 암담하게 보이는 어둡고 음침한 날들 동안 종종 발설되었다. 그러나 "내일"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신앙의 생명력을 유지했던 한 가지 방식이었다.

내일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열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그 나라는 어떤 면에서는 이미 여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은 도래할 나라의 소망도 물려받는데,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완전한 통치권을 갖고, 모든 악이 바로잡히고, 슬픔이나 고통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성서적 사고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더 이상 없을 날이 오고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계 21:4).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슬픔이나 고통에 개인적으로 직면할 때, 우리가 흔히 듣는 것은 내일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희망을 잃지 말라", "더 나은 세상이 오고 있다",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일, 즉 어떤 먼 내일에는 당신은 사랑했던 사람과 기쁨의 재회를 할 것이다", "내일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다", "내일은 모든 폭력이 멈추고 사람들은 이웃과 평화롭게 살 것이다" ....

그러나 이 모두는 너무도 신비에 싸여 있다. 그래서 현재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우리가 "궁극적인" 내일에 기초한 이런 희망 사항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내일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독교적 확신의 기초이다. 그러나 "불투명한 미래"(someday)의 약속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그래서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생각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따금, 우리가 내일의 요소들을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것을 덜 궁극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암울했던 시절에, 영국은 자신을 방어할 준비가 채 되어 있지 않았다. 밤이면 밤마다, 독일 전투기들이 런던을 무차별 폭격했다. 그 도시의 아이들 중 상당수는 시골의 친척들과 함께 살도록 보내졌다. 런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았다. 영국의 비행사들은 영국을 방어하기 위해 중무장한 채로 구식 비행기를 조종하여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무렵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들 중 하나는 [영국 동남부의 항구 도시인] <도버의 하얀 절벽들>이었다. 그 노래에서는 선언했다: "내일은 기쁨과 웃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내일은 세상이 자유로울 것이다.... 가만히 기다리고 지켜보기만 하라. 내일을."

이 노래에 서린 분위기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져온 오늘 본문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 노래가 염두에 둔 내일은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참혹한 전쟁을 겪은 세대의 생애 안에 있는 내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은 어조는 종말론적인 반면, 기껏해야 "이 세상적인 어느 날"(this-world someday)을 마음에 그리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최소한도, 이 연설에 담긴 꿈의 조각들 중 일부는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이 되고 있다.

보다 최근에는,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는 "그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변화를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 속으로 다시 한번 걸어들어 가겠다고 맹세해야 한다"는 선거운동 구호를 힘차게 외쳐 "단기적인"(near-term) 내일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면서 군중들과 함께 행진했다.

그러한 내일들은 주기도문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와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간청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님의 시간만큼이나 종말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 20세기는 교회에 겁을 잔뜩 주어 "세속에 얽매인/현실적인"(earthbound) 내일들에 너무 많이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19세기가 끌날 무렵, 많은 자유주의 개신교도들은 희망에 찬 낙관주의를 가지고 앞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세상이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발전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따름의 의미에 대한 웅장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영혼 구원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도 활동적이었다. 그들은 가난, 전쟁, 불의, 그리고 인간적인 악들 따위의 문제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화와 정의와 행복, 즉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기대하는 부류의 것들이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질서 수립에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 사람들은 세상이 기독교 자신의 세기가 될 새로운 세기에 바야흐로 돌입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그리고 20세기의 다른 비극적인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이 "사회복음"(Social Gospel)을 극찬했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도래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낙관주의적인 견해는,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도래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행동하셨기 때문일 것이라는 성경의 증언으로 되돌아갔다. 이 세상은 저절로 혹은 우리의 행함에 의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발전해 가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선함을 지나치게 확신했기는 하지만, 사회복음 신봉자들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품었던 생각들 중 일부는 1930년대에 뉴딜 정책 입안에서 구현되었다. 우리는 사회복음 신봉자들이 사회안전 조치들을 강구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들의 전체적인 존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자유주의 기독교인들과 보수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똑같이 광범위하게 스며 있다.

이 모든 것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수립하려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하심 덕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의 발전 과정에 아무런 책임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해서, 그것을 어떤 것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전혀 쓸모 없다고 생각할 근거로 삼아서도 안 된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세상의 내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 미쳐야만 한다.

우리가 야기하는 변화들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 영원히 지속될 필요는 없다. 큰 재앙을 불러온 태풍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후, 미국 전역의 교회 봉사 단체들이 충분한 보험이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 재건축할 다른 수입이 없는 사람들의 집을 재건축하려고 [미국 미시시피 강변의 항구 도시인] 뉴올리언스를 찾아갔다. 그것은 힘들고 더딘 일이었다. 그런데도 일부 자원 봉사자들은 아직까지도 그곳을 찾아 긴 여행을 한다. 그러나 잠깐만! 그 재건축되고 있는 집들 중 최소한 일부는 큰 폭풍이 몰려오면 다시 물에 잠길 가능성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의 헌신적인 재건축 활동의 요점은 무엇인가?

물론 요점은,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태풍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미래를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당장에 살 곳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움직인다. 내년에 폭풍이 그들의 복구된 집들을 다시 덮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은 전혀 쓸데없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 발견하기.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내일 발견하기"(finding tomorrow)라고 부른다. 유대교에도 그것에 상응하는 것이 있다. "tikkun olam"으로 불리는 히브리어 구절은 "세상을 고침"(repairing the world)을 의미한다. 그 개념의 한 부분은 유대인들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어울려 살기 원하시는지에 대한 모델로서,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생각과 관련된다. 그러나 그 개념의 다른 부분은 "외부 지향적"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 사이에 모범적인 사회를 창출할 책임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번영에도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을 고침"과 "내일 발견하기"는 그들 자신에 의한 선한 일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킴도 균형 있게 고려하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단지 경제적 복지와 모두를 위한 평등한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세상을 고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필요도 있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인 내일이다. 그것은 역사의 목표이며 신실한 자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다. 그것의 도래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오늘과 궁극적인 내일 사이에는 "더 가까운 내일들"(nearer tomorrows)이 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정의와 사회적 혜택의 문이 그 내일들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그리고 영적 성취에 이르는 길의 뚜렷한 표지들이 있음을 확실히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이 저절로 시작되기를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로부터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현재의 순간과 미래의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일련의 내일들이 놓여 있다. 남을 위해 행동하는 기독교인들은 그 내일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낳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대꾸한다: "기독교는 즉각적인 해결책들이 아니라 막연한 미래의 어느 날에 대한 희망에 기초한다. 미래는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일 뿐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주로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생각"으로 간주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옳다. 기독교는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지점은,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생각"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따금, 그것은 비록 즉각적인 변화는 아닐지라도 긍정적인 변화의 통로 역할을 한다.       
   

* 예화

+ 11월의 나무처럼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이해인·수녀)

+ 오늘 하루

햇볕 한 줌 앞에서
물 한 방울 앞에서도
솔직하게 살자

꼭 한 번씩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도 진흙 속에서도
제대로 살자

수 천 번 수 만 번 맹세 따위
다 버리고 단 한 발짝을
사는 것처럼 살자

창호지 흔드는 바람 앞에서도
은사시 때리는 눈보라 앞에서도
오늘 하루를 사무치게 살자

돌멩이 하나 앞에서도
모래 한 알 앞에서도
(도종환·시인)

+ 오늘은 우리의 것

오늘이 새로운 날로 태어난다.
우리가 선이나 악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자랑하거나 슬퍼할 오늘을
시간의 은행이 빌려준다.

오늘이 여기 있다, 그 모든 시간과 함께.
그렇다, 그 24시간 모두
그 전날의 시간들보다
더 유익하게 쓰기 위해 노력하자.

새벽은 밝고 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씨를 뿌리려고 준비한다.
그리고 해가 쉬기 위해 넘어갈 때
작은 씨앗들은 자라날 것이다.
자라나는 식물들은 언젠가
풍성한 과일을 산출할 것이다.
만약 내가 오늘이라는 날을
잘 돌보기만 한다면!
(A.P. 페레이라)

+ 좁쌀 한 알

어느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어째서 '조 한 알'이라는 가벼운 호를 쓰십니까?"

장일순이 그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그시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하잘것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
(장일순,『좁쌀 한 알』)

+ 한 걸음

한 걸음이 당신을
그리 멀리 데려다주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걸어야 합니다.

한마디 말로 당신 자신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말해야 합니다.

한 인치가 당신을
크게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의 행동이 모든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은 아니어도
당신은 계속 행동해야 합니다.
(복음의 수난 시대에 살았던 무명의 그리스도인)

+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학력, 지위, 신분,  재산 등은 
이 세상에서만 통용되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세상의 성공도 어느 정도는 가치가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생명을
얼마나 가치 있게 사용했는지만을 물으실 것입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루가, 그리고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삶을 습관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뜬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오늘 하루의 생명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김홍언·신부)

+ 작은 것 안의 큰 것

하나의 과자 부스러기가 작은 새를 먹여 살리고,
하나의 사려 깊은 생각이 화난 말을 막는다.

하나의 씨가 많은 꽃을 피우고
한 방울의 비가 소나기를 알린다.

하나의 지푸라기가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고
한 마디의 따스한 말이 오랜 원한을 녹여 내린다.

하나의 등대 불빛이 많은 목숨을 구해 내고
한 조각의 작은 의지가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겸손한 손이 구호에 앞장서고
한 사람의 단순한 삶이 천국이 앞에 있게 한다.

한 어린이가 현자를 정신없게 만들고
한 마리의 종달새가 하늘 끝에서 노래한다.

한 줄기 햇빛이 세상을 즐겁게 하고
자연은 명랑한 목소리로 노래 부른다.
(J. 모러스, 『오늘은 우리의 것』)

+ 마음속의 시계

사람의 시간은 모두 같습니다만
사람들 마음속의 시간은 저마다 다릅니다

사람들이 갖고자 하는 시간은 짧고
사람들이 버리고자 하는 시간은 길고
사람들이 맞고자 하는 시간은 더디고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단 한 줄의 위안은 이것입니다

마음의 시계를 늦춘다면,
행복은 좀더 길게 당신 곁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엔젤트리, 『느린 날의 행복편지』)

+ 시간은 흘러가는 돈이다

열심히 땀 흘리지 않은 자는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매일 매일을 휴일처럼
보내는 사람이
진정한 휴식의 즐거움을 어찌 알겠는가.

진정한 휴식의 기쁨은
열심히 땀 흘려 일한 뒤에 맞이하는
단 몇 분간의 휴식에서도 얻을 수 있다.

성취감 뒤에 맛보는
그 뿌듯한 희열을 게으른 자가 어찌 알겠는가.

시간을 '흘러가는 돈'이라고 생각하라.

시간을 소홀히 다루는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는
보물을 놓쳐 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다.
(작자 미상)

+ 바로 지금

우리 모두는
삶, 사랑, 모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그것들을 시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로만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은 언뜻
우리를 보호해 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가두고
삶에 거리를 두게 합니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만일 타야 할 자전거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그것을 할 때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 수업』)

+ 모든 날이 곧 신이 준 날 
 

책에서 본 인디언들의 글이 생각난다.

사냥을 나간 인디언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말을 잃을 때가 있었다.
바위산 위에는 검은 먹구름과 함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푸른 심장부에서 하얀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드넓은 평원에서는 석양빛이 하루의 작별을 고했다.

그런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예배하는 자세를 갖추곤 했다.

그러기에 인디언은 굳이 일주일 중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이 준 날이기에!
(김남희,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 4』, 미래M&B)

+ 참 아름다운 분량, 하루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다"(에이브러햄 링컨).

'하루'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참으로 적당하고 아름다운 분량입니다.
이보다 길면 얼마나 지루할까요.
이보다 짧으면 얼마나 바쁘고 아쉬울까요.

해가 떴다가 지는 사이,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고 느낍니다.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오면 힘들고 곤란할 겁니다.
다행히 이렇게 하루하루 꼭 알맞게 나뉘어 다가옵니다.
참 고맙고 즐거운 일입니다.
행복한 미래를 원한다면 '하루'를 사랑하세요
(정용철, 『씨앗 주머니』)

+ 시간관리 십계명

질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 즉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다음의 시간관리 십계명이 도움이 된다.

1. 시간 사용 내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한다.
2. 사소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한다.
3. 해야 할 일들은 반드시 기한 내에 마무리 짓는다.
4. 자투리 시간을 생산적으로 활용한다.
5. 핵심적인 일에 치중하고 나머지는 적임자에게 위임한다.
6. 맺고 끊는 것을 명확히 하고 가능한 한 삶을 단순화한다.
7.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실천한다.
8. 불필요한 요구는 단호하되 지혜롭게 거절한다.
9.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버릴 것은 그때그때 버린다.
10. 자기만의 안식처를 갖고 휴식시간을 철저히 지킨다.
(프랭크 루박,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 상상요법    
     

현대의 심리 마케팅 기법 중에 상상요법이라는 게 있다. 그 물건을 구매했을 때 생겨날 행복한 결과를 고객 스스로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엔 물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다. 강요도 없다. 단지 호기심을 자극해서 긍정적 결과를 상상하도록 유도하기만 하면 된다. 반짝하는 단기간의 실적은 없을지라도 장기간의 성과를 거두는 데에는 더없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의식 개혁이나 변화와 같은 장기간의 열매도 마찬가지다. '∼을 하자, ∼을 하지 말자'와 같이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춘 접근은 강압적이고 진부하며 소극적이다. 대신 '그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흥분되지 않습니까?'와 같은 적극적인 상상이 훨씬 더 변화에 주효할 것이다.

한 개인과 가정과 직장에서의 문제 해결도 그렇다. 문제의 제거에만 골몰하기보다는, 다가올 가능성을 믿음으로 상상하는 '비전'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대일·안양성결교회 목사)

+ 가장 좋은 나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나이는 언제일까?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12명의 방청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린 소녀가 대답했다. "두 달 된 아기 때요. 모두가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잖아요. 그리고 모두가 사랑해 주고 관심도 보여주니까요."

"18살입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자동차를 몰고 어디든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가도 되니까요."

성인 남자가  대답했다. "25살이 제일 좋은 나이죠. 혈기 왕성한  나이니까요." 43살인 그는 이제 야트막한 고개를 오를 때조차 숨이 가쁘다. 25살 때는 한밤중까지 일을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지금은 저녁 9시만 되면 잠이 쏟아진다고  덧붙였다.

어떤 이는 40살이 인생의 정점이고 활기도 남아 있어 가장 좋은 때라고 했다. 어느 숙녀는 55살이 되면 자식을 부양하는 가사 책임감에서 벗어나서 좋은 나이라고 했다. 65살이 좋다는 남자는 그 나이에 직장에서 은퇴한 다음 인생을  편안하게 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방청객  가운데 대답을 하지 않은 사람은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한 사람뿐이었다. 그 할머니는 모든 사람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든 나이가 다 좋은 나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자기 나이가 주는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세요."
(작자 미상, 『세상을 바꾸는 작은 관심』)

+ 블룸하르트와 마차

블룸하르트는 남독일 시골 마을의 목사였다. 그저 평범한 시골 목사에 불과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종말론 신앙'이 기독교사에서 꽤 의미 있게 다루어졌다.

블룸하르트는 예수의 재림을 살아 생전에 보리라고 예언하며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그의 집 마당에는 늘 마차 한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자마자 그 장소로 달려가려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끝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종말론 사상 때문에 사회나 현실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일깨워 줌으로써 큰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물론 그의 생애 동안에 예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끝날에 대한 확신 가운데 깨어 한 시대를 생기 있게 살다간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곳 워싱턴市의 흑인들이 돈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지 집을 사거나 세를 들고 집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꿈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땅에서 아모스의 예언이 실현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며, 진리가 거대한 분류처럼 흐르게 되는 꿈입니다.

나는 지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생명, 자유, 행복추구 등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받았다는 제퍼슨의 말을 인정하게 되는 꿈입니다.

나는 지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산골짜기가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이 주저앉으며, 거친 곳이 평탄해지고, 굽어진 곳이 곧게 펴지며, 주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인간이 함께 그것을 볼 수 있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나는 지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형제가 되는 꿈입니다.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나서서 절망의 산에다 희망의 터널을 뚫겠습니다 .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나서서 어둠의 어제를 광명의 내 일로 바꾸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날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아이들이 흑인이건 백인이건, 유태인이건 非유태인이건, 개신교도이건 가톨릭 교도이건, 손을 잡고 "자유가 왔다! 자유가 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흑인 영가를 부를 수 있는 날을 만들 수 있습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에서 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아 열린 평화행진에 참가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중 마지막 부분)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주님!
주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축복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치료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그 손으로 저를 만져 주소서.

주님!
주님의 손은 격려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나눔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봉사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은 해결의 손입니다.
그 손으로 저를 쓰다듬어 주소서.
(최용우·전도사, '주님의 손')

+ 한 목소리로 드리는 기도

오 주님, 제게
샘물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을 주소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심 없는 마음을 주소서.
기쁘게 베푸는 아량 있는 마음,
고난을 겪는 이들을 둘러보는 인정 많은 마음,
원한을 품지 않는 용서하는 마음,
친절한 행위를 절대 잊지 않는 감사하는 마음을 주소서.
온유하고 검소하며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사랑하길 열망하는 마음을 주소서.
비꼬지 않고 감사하게 대하며,
불평 없이 잊어버리는 고상하고 용기 있는 마음을.
(J. 모러스, 마음을 주소서')

+ 자연을 위한 기도
 

생명의 하느님,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깨우쳐 주소서.
그들이 숲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기억하겠나이다.
그들이 도시에서 겪는 푸대접을 기억하겠나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보호자, 섭리자의 역할을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주게 하소서.
우리가 들짐승을 잔인하게 대하지 않도록 금지하소서.
존경심에서 나오는 부드러움을 우리에게 주소서.
나보다 약한 피조물을 경애하도록 가르쳐 주소서.
모든 생명의 물줄기는 당신의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
생명이란 지금도 우리에게는 신비일 뿐,
우리가 짐승과 새와 친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 피곤함과 추위,
집을 잃고 헤매는 고통에 공감하도록 도우소서.
우리의 기도 속에 그들의 어려움도 끼워 넣도록 도우소서.
(조지 마테슨)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이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왔구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순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이해인·수녀, '몽당연필')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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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0/22 [12: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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