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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가?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 주신 분
 
정연복   기사입력  2009/06/10 [10:26]
나는 왜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가? -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 주신 분
    
     우리가 '인간적'(human)이라고 부르고
     또한 '신적'(divine)이라고 부르는 자질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 통하는 것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이 모든 인간의 삶의 핵심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인간성과 신성은 서로 통한다.
     요한문서 기자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랑 안에 계십니다"(요한1서 4:16)라고
     주장했을 때,
     말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접근하고자 하는 한 존재,
     즉 바깥에 계시며 초자연적이며 유신론적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심층적 차원에서 발견되는 현존(presence)이며,
     생명의 잠재력, 사랑의 능력, 존재의 용기 속에서
     발견되는 현존이다.
     하나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계시한 것은
     바로 예수의 존재,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이었다.
     또한 우리를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의미와 연결시킬 것도
     역시 우리 각자의 존재,
     우리의 완전한 인간성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내가 충만한 삶을 통해, 무진장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창조한
     모든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용기를 통해,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을 닮음에 있어서
     예수의 능력을 얻는 것만을 요구한다.
     내가 이처럼 비유신론적 하나님,
     혹은 이처럼 계시적인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완전한 인간성이 발휘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이 제거된 세상을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길이다.
    
     예수는 나에게 신학적·인간적 성실성을 지니고
     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진리다.
     예수는 나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생명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주장한다.
     (존 쉘비 스퐁, 김준우 역,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 165-168쪽.)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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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6/10 [10: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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