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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불치병 ‘선교 강박증’에서 벗어나라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사립대학 내 종교시설 설치안 문제 없나?
 
류상태   기사입력  2009/01/30 [11:07]
재작년 여름 나라 전체를 경악하게 했던 아프간 인질피랍 사태가 두 명의 희생자를 내고 해결된 지 겨우 일 년 반이 지났다. 개신교의 무모한 공격적 선교행위에 대한 논란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이때를 기다려 왔던 것일까? 당시 선교팀 파견을 주도했던 인터콥이라는 단체에서 파견한 20여명의 단기 봉사단원이 지난 1월 13일부터 러시아 인근 다게스탄공화국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다게스탄공화국은 지난해 10월 이슬람 반군의 공격으로 러시아 경찰 10여명이 죽거나 다치는 등 지난 수년간 테러와 폭력이 빈발해 여행제한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봉사팀은 그 곳의 교회 등에서 한방, 침술 치료 등 봉사활동을 벌이다 외교통상부의 ‘즉시 방문 중단 및 귀국 권고’를 받고 18일 현지를 출발, 귀국 길에 올랐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최근 선교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부 개신교인들의 행태로 많은 국민들은 또 한 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이처럼 많은 개신교인이 선교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예인이건 체육인이건 독실한 개신교인이라면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선교와 연관을 짓는 경우가 많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탄 개신교 연예인들이 한결같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모습을 독자들은 보았을 것이다. 축구 선수가 골을 넣은 후 잔디밭에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을 것이다.
 
▲ 지난 2007년 7월 아프가니스탄 무장세력에게 피랍된 샘물교회 선교단원들의 모습.     © CBS노컷뉴스

다른 종교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 유독 개신교인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제 어디서나 주위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의 언행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동기야 어쨌든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건 타박하기 어렵다.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거나 강요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표현되는 종교적 신념은 ‘표현의 자유’로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식이 집단으로 나타낼 때는 사회의 안녕을 크게 해칠 수 있다. 공직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신념을 함부로 표현하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적인 종교 신념을 이루겠다고 말하는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하물며 그것을 법으로 제정하려 한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위험한 발상, 사립대학 안의 종교시설 허용

사립대학교 안에 종교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안건이 얼마 전에 제기되었다. 지난 1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가 대학설립운영규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것이다. 개정안의 제3조 2항에 따르면, 학교 안에 ‘교육연구 및 복지시설 뿐 아니라 문화 및 집회시설, 종교시설(사립학교에 한한다), 노유자시설, 수련시설, 운동시설, 공공업무시설, 주차장 등 당해 대학의 교육연구 등의 활동과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는 시설’을 지어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사립학교에 한한다’는 단서조항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대학교 내에 종교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는 안건을 정부 부처가 내놓은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 정부는 끊임없이 종교차별 논란에 휩싸여 왔고, 그 때마다 이런저런 변명으로 위기를 넘겨왔다. 그런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이런 안을 내놓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특히 이번 안은 종교간 합의도 없었으며, 시민사회단체를 통한 공청회 등 충분한 사전 준비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부 부처에 의해 갑자기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혹 특정종교단체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입법 예고된 안건이기에 예상되는 파급 효과에 대해 최대한 긍정적인 측면에서부터 검토해 보겠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교회의 무리한 건물짓기 경쟁을 지양하고 교회 재산을 사회와 공유하여 남는 돈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 의식있는 진보 개신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일례로 학교에 강당이나 생활관 등을 지어주고 평소에는 학교에서 교육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주일에만 교회에서 이용하자는 제안이다. 이런 제안은 이미 성공적으로 실행되고 있다고 알려진 몇몇 모범적인 교회 사례를 통해서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실험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닐뿐더러, 학교 안에 들어선 종교시설이 과연 일요일이나 휴무일을 제외하고는 학교 교육에만 충실히 사용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종교시설을 지은 당해 종교기관에 의한 교육적 간섭이 일체 없었는지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보수 개신교인의 선교 강박증, 고칠 수 없는 병인가?

배타적 교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 교회가 학교에 들어선 종교시설을 선교의 거점으로 이용하지 않고 순수한 교육의 장으로 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독실한 보수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불치병이라고 할만한 이 선교의식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는 이만저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직장이건 학교건 어디서나 독실한 개신교인들을 만나면 “교회 나오세요.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습니다.”는 전교를 수시로 받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 선교가 법으로 금지된 곳에서도 개신교인들이 선교활동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한 네티즌에게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그들이 버리지 못하는 선교 강박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 중 두 가지 답변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선교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필리핀 오지이건 아프리카 식인종이건 중동의 사지이건 어디이건 당연히 해야 할 선교입니다. 중국이건 북한이건 러시아이건 이슬람나라이건 불교나라이건 이스라엘이건 어디든지 가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 그리스도인들에겐 선교는 즉 전도는 사랑의 전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려주려 그곳에 가며 내 몸처럼 그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베풂과 선교는 동시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위험한 곳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자신의 모든 것을 타인에게 나누는 베풂은 바로 선교의 진정한 모습이며 사랑입니다.”


이렇듯 독실한 교리기독교인에게 봉사와 선교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순수한 봉사임을 강조하더라도 결국은 기독교의 배타적이고 교리적인 선교와 분리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것은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었던 당시 ‘선교가 아니라 봉사’라고 변명했던 당해 교회 담임목사가 인질들이 돌아온 후 발언을 번복하여 “봉사와 선교는 분리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개정안은 종교간 합의와 시민사회의 공청회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개신교는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거대 권력집단으로 남아있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끊임없이 유입되는 자본의 힘에 있다. 소득의 십 분의 일을 십일조라 하여 세금처럼 거두어들이는 막강한 자본은 그대로 권력이 된다.
 
▲ 서울소재 모 대학 구성원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학내 종교자유를 촉구하고 있다.     © CBS노컷뉴스

예를 들어 교인이 수십만을 헤아린다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민일보사라는 언론과 한세대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매체와 교육기관을 통해 강력한 선교정책을 펴고 있다. 종단 차원이 아닌 개별종교기관에서 이런 능력을 보유한 종교는 개신교밖에 없다.

자본의 힘과 결탁한 종교단체에 법에 의한 울타리까지 쳐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결과적으로 교육부가 입법 예고한 이번 안은 개신교에 대한 혜택으로 나타나게 될 공산이 크고, 개신교 선교전략에 악용될 소지가 농후하다.

종교는 절대신념체계에 속하기에 다른 신념을 가진 이웃을 배려하기 어려운 속성을 갖고 있다. 특히 유일신종교는 그 성격상 다른 종교를 배려하기는커녕 배타와 독선으로 흐르기 쉬운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기에 이 문제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은 종교간 협의를 충분히 거쳐 합의를 얻어 추진해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의 공청회 등도 거쳐 사회갈등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불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보고 싶다

몇 달 전, 어느 불자님들의 모임에서 ‘그리스도교 이해’를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활동에 대한 이유를 묻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곤혹스런 답변과 함께 변명의 여지없이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난감했던 상황에서 도저히 지워질 수 없는 가슴 아린 기억이 남게 되었다. 불자님들이 보수 기독교인이라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맹목적 선교행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성서에 기록된 문자의 명령에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오로지 순종만을 강조하는 이 독특한 종교, 그러기에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 무례하고 사나운 종교에 대해 ‘동물원을 탈출한 맹수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 같은’ 걱정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지극한 사랑의 종교가 되었어야 한다. 완전한 정의와 평화의 세계인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역동하는 종교가 되었어야 한다. 가난한 이웃, 멸시당하는 사람들, 잘못된 제도에 의해 불태워지는 철거민의 아픔을 보고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치는 종교가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 기독교는 오히려 그들의 꺼져가는 꿈마저 짓밟고 오로지 ‘예수 믿고 천국’만을 외치는 우리사회의 이방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기적을 보고 싶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교리기독교가 복음의 원형을 되찾아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는 꿈이 실현되는 기적을 보고 싶다. 일그러지고 뭉개진 내 자매형제들의 불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보고 싶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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