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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글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스스로 밝히는 글] 국어독립운동과 ‘배달말 힘 기르기의 어제와 오늘’
 
이대로   기사입력  2008/09/29 [15:36]
왜 쉬운 우리 한글을 안 쓰려고 할까?

이 책을 쓰기로 한 것은 내가 평생 동안 한글사랑운동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왜 국어운동을 했으며,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정리해서 내 뒤에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를 바탕으로 더 잘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국어독립운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는 것이고 이 일을 우습게 보는 이들을 깨우치려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한글을 사랑하게 되었고, 대학교에 가서 국어운동학생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국어독립운동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41년째 우리말 독립을 꿈꾸고 있다. 이 일은 한국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보았으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자나 깨나 한글 조심, 앉으나 서나 한글 사랑’ 속에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한글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의문 때문이었다. 1963년, 충남 예산농업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예산농고는 농업학교로선 전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학교 가운데 하나였으며, 환경도 좋고 농업교육을 잘 가르치고 선생님들도 좋았다. 교장 선생님부터 국어와 영어, 수학 선생님들을 뺀 모든 선생님들이 학교 선배로서 학생들을 열심히 잘 가르치셨다. 그래서 나는 농업교육을 잘 받아서 훌륭한 농군이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이렇게 아무 불만이 없이 공부를 재미있게 하고 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쉬운 우리말 대신 어려운 일본식 한자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과수원예 시간에 ‘과일나무는 가지치기를 먼저 잘하고, 꽃을 솎아준 다음에, 열매도 잘생긴 것만 남기고 따주어야 맛있는 과일이 열린다’는 말을 “果木(과목)은 剪枝(전지), 摘花(적화)를 잘해야 맛있는 과일이 열린다”면서 흑판에‘果木’,‘剪枝’,‘摘花’라고 쓰며 한자를 강조했다.

한자를 많이 쓰셨던 과수원예 선생님은 대학을 나온 분이고 아주 똑똑하고 좋은 분이었다. 그런데 ‘과목’이라는 말은 학과의 ‘과목’과 발음이 같아 혼란스럽고, ‘전지’란 말도 전기를 충전한 ‘건전지’로 이해되기도 해서 쉽게 알 수 없었다. ‘적화’도 그 당시 북한이 노린다는 ‘적화 통일’이란 말이 떠오르게 했다.

벼농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도 농대를 나온 분인데 ‘논’을 ‘답(畓)’이라고 쓰고, ‘논농사’를 ‘수도작(水稻作)’이라고, ‘거름 준다’는 말을 ‘시비(施肥) 한다’고 말하고 쓰셨다. ‘시비한다’는 말은 ‘시비 걸다’라는 말과 헷갈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우리 고등학교만 나온 채소원예 선생님은 전처럼 변함없이 아주 쉬운 우리말로 가르치고 한글로 글씨를 예쁘고 깨끗하게 잘 쓰셔서 이해가 잘 되고 공부가 재미있었다.

세 분 모두 우리 고등학교 선배님이고 좋은 선생님들이었는데 말글살이는 서로 비교가 되고 차이가 있었다. 농대를 나온 두 분은 일본 농업잡지까지 가지고 오셔서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기에 열심이었고, 품종 연구도 하시는 훌륭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농업을 가르치는 데 한자를 강조함으로써 농업시간이 재미가 없어졌고 한문시간처럼 되어 버렸다.

나는 그때 쉬운 우리말로 하는 교육이 효과도 좋고 우리가 가야할 말글살이란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리고 왜 많이 배웠다는 어른들은 쉬운 우리말과 한글을 쓰지 않을까 의문을 갖게 되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교육, 근본을 벗어난 국어정책

▲ 우리말글 독립운동의 발자취     © 대자보
어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한글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이고 우리의 으뜸가는 자랑거리이며, 세종대왕은 위대한 조상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어른들은 말로만 ‘한글을 사랑하자’고 하면서 실제로 쓰지 않았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거북선은 세계 최초 철갑선으로서 우리의 위대한 발명품이고 이순신 장군은 왜적을 물리친 영웅이었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거북선이 어찌 생겼는지도 잘 모르고 있으며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훌륭한 한글을 잘 이용해서 우리 자주문화를 꽃피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또한 대단한 발명품인 거북선을 개선하고 발전시켜서 더 훌륭한 전투함도 만들고 기선을 만들지도 않았다. 한글이 진짜 좋은 글자라면 써야만 그 빛이 나고, 거북선이 진짜 대단한 군함이었으면 그걸 바탕으로 더 좋은 군함도 만들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앞뒤가 맞지 않는 교육이고, 잘못된 세상이며 모순이었다.

오히려 똑똑하다는 국어학자들과 교수들이 한글 쓰기를 싫어했다. 정부는 한글만 써서 만들던 교과서에 한자를 섞어 쓰겠다고 발표했다. 앞으로 국어정책이 그렇게 갈 것이라고 하니, 우리 농업학교 선생님들도 한자를 강조하고 농업용어도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쓰면서 가르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던 농업공부도 흥미가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정부가 국어정책 깃발을 잘못된 쪽으로 드니 국어교육과 생활이 뒤틀리고 모든 교육까지 삐뚤어지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는 한글로 된 책이 없었다

지금도 ‘독서 주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때 가을엔 책을 읽기가 좋은 계절이라면서 독서 주간을 만들고 책 읽기를 권장했다. 그래서 나도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서관에 가보았다. 처음엔 어떤 책이 좋은지 잘 몰라서 신문만 읽었다.

그런데 신문도 조금 무게가 있다는 정치·경제면은 온통 한자혼용이고, 살인과 강도사건 기사가 많은 사회면과 소설·운동경기 소식을 적은 문화면만 한글이었다. 무언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로만 써도 아무 불편 없이 신문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데, 왜 정치?경제 소식은 한자혼용으로 써서 읽고 이해하기 힘들게 한단 말인가? 한글만 아는 국민은 어두운 사건과 사고 소식이나 알라는 것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나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짓겠다고 부모님과 약속하고 고등학교에 왔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때 많은 책을 읽어서 지식을 넓히겠다고 생각하고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그런데 정작 읽고 싶은 농업전문서적은 우리말, 우리글로 된 책이 없었다. 나는 농업학과여서 축산에 관한 교육은 깊게 배우지 않으니 도서관에서 책으로 축산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도서 목록에서 {養豚全書}란 책을 열람신청해보니 일본 책이었다. 다른 농업전문 서적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에 도서관이 있는 학교가 드물었으나, 우리 학교는 역사가 깊어서 도서관 건물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우리말로 된 책은 별로 없었다. 전문서적은 거의 일본말로 된 책이었다. 6·25 난리를 겪은 1950년대가 바로 지났을 때이니 제대로 된 책이 나오지도 않았고, 나왔어도 돈이 없어 도서관에 갖추지 못한 것 같았다.

예산읍내 책방에 가 봐도 한글로 읽기 쉽게 쓴 전문서적은 별로 없었다. 잡지라면 {새농민}, {학원}, {명랑} 같은 정도였다. 한글로 된 책은 소설과 시집 같은 문학 서적과 학교 참고서였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한글로 된 책을 찾아 읽다 보니 김소월의 시집, 이광수의 {흙}, {무정}, {유정}, {사랑} 등 소설과 {카네기의 처세술} 같은 책을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리고 외국 번역 소설과 시를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영어나 일본 말투여서 글이 매끄럽지 못해 별 재미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더러 우리말로 된 전문서적을 찾아 읽어보려고 해도, 한자혼용에다가 우리 말투가 아니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아 흥미가 떨어졌다. 일본 책을 번역한 이가 완전히 소화하고 쉽게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베낀 수준이었다. 학생이 스스로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넓히고 싶어도 우리말로 쓴 책이 많지 않아 읽기 어려웠다. 지금은 어느 책방에 가더라도 우리말로 된 책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그 당시는 안 그랬다.
죽는 날까지 국어독립운동을 하기로 다짐하다

6·25 전쟁이 끝나던 1953년에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중학교에 다닐 때 4·19 혁명과 5·16 정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도지사가 현역 육군 소장이었고, 학교에 와서 정신교육도 했다. 나라가 몹시 어렵고 어지러울 때 학교에 다닌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교실이 없어 천막을 치고 공부 했다. 공부시간에 운동장에 모래를 퍼 날라 뿌리기도 하고, 산에 나무도 심으러 다니고, 송충이 잡는 일을 하느라고 수업도 많이 빼먹었다. 중학교 때 반 학기 동안 국어 선생님이 없었던 일도 있고, 영어 선생님은 제대로 된 영문과를 나온 분이 아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다는 분이었다. 그래도 학교 다닌다는 게 좋고 사회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 가니 세상이 잘못된 것도 보이고 무언가 개혁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내가 다닌 예산농고는 교훈이 ‘국토개발’이었고 선생님들이 교과서 교육뿐만 아니라 농촌부흥운동과 애국을 유난히도 강조하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전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여러 유명 인사를 초빙해서 교양교육을 자주 했다. 그 여러 분들 가운데, 내게 사회운동에 나서도록 감동을 많이 주신 분은 농촌 운동가인 한인수 선배와, 예산이 고향으로서 미국 유타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이태규 박사다. 이 두 분은 모두 자신만 잘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라가 잘되게 힘써야 하고, 시골 사람이라도 큰 꿈을 가지고 더 큰일을 하라고 외치셨다.

그래서 나는 우물 안 개구리로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 것이 아니라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나라를 위한 더 큰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바로 농촌운동과 국어독립운동을 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대학 가기에 넉넉한 가정도 아니라서 학비가 걱정이었다.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등록금과 첫 달 하숙비만 내주시면, 내가 벌어서 학교에 다니겠다고 어렵게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시험을 봤으나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 친구인 한 씨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저렇게 공부하려고 하는 애를 일만 시켜선 안 되겠다.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애들을 가르치며 공부하게 하자”고 설득하셔서 서산읍내 한 씨 아저씨 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혼자 공부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때, 신문에서 한양대 김윤경 교수의 한글사랑에 관한 글을 읽었고, 바로 김 교수께 내 심정을 편지로 써 보냈더니 “나는 이제 늙어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웠다. 한글을 사랑하는 너 같은 젊은이를 만나니 반갑다. 꿈을 포기하지 말고 꼭 대학에 가라”고 바로 답장을 해주셨다.

그 뒤 다시 기가 살아서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글은 세계 최고 글자이고 우리의 자랑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가르치면서도 쓰지 않는 이 모순, 우리말과 글로 쓴 책이 없는 이 나라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이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내 한 삶을 바치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대학생 농촌운동 모임에 발 벗고 참여하고 스스로 국어운동학생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 이름도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택로(李澤魯)’란 한자 이름을 ‘이대로’라고 한글로 바꾸고 국어독립운동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배달말 홀로서기는 1천5백 년 된 배달겨레의 꿈

내가 국어독립운동을 하면서 보니, 이 일은 우리 겨레의 수천 년 동안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고, 많은 선조가 애썼으나 이루지 못한 겨레의 꿈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약 1천5백 년 동안 이어진 배달말 홀로서기운동(배달말 독립운동)이었으며 그 끝자락에 지금 내가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일을 우리 세대에 마무리하겠다는 욕심과 사명감을 갖게 되어서 남달리 싸운 것이다.

우리 겨레를 배달겨레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겨레는 수천 년 동안 겨레말은 있었으나 우리 글자가 없어서 중국의 한자를 빌려 썼다. 입으로 하는 말은 배달겨레말인데 눈으로 보는 글은 중국 한문이었다. 한문은 중국말을 적은 글이다. 우리말은 우리 겨레의 생각과 삶이 담긴 말이고, 중국말은 중국 사람의 생각과 삶이 담긴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과 글이 다른 절름발이 말글살이를 하다 보니 우리는 힘센 나라가 될 수 없었고 중국의 그늘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한아비(조상)는 삼국시대부터 이 불편한 말글살이를 우리다운 말글살이로 바꾸려고 애썼다. 신라 때부터 쓴 향찰, 이두식 글쓰기가 그 첫 흔적이다. 이는 비록 한자를 빌려 쓴 것이지만 중국식이 아닌 우리다운 글쓰기다.

그러나 이두가 우리말식의 글쓰기라고는 하지만 중국 한자를 빌려 쓴 글이라서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으며 누구나 쉽게 쓰기에 힘든 글쓰기였다. 그런 말글살이를 천 년 가깝게 하다가 마침내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적기 좋은 진짜 우리 글자를 만들었다. 지금부터 약 6백 년 전에 온누리에서 으뜸가는 글자인 한글(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우리말이 독립할 수 있는 길을 닦아놓았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길든 한문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강대국인 중국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문이 일부 지배층의 출세와 권력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지배층은 쓰기 쉽고 알기 쉬운 한글보다 어렵고 까다로운 한문을 더 즐겨 썼다. 우리 글자가 있는데도 공문서와 책을 한문으로 쓰고, 시와 소설도 한문으로 적고, 편지도 한문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중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바꾸고 우리 글자를 나라글자로 인정하고 공문서에 쓰기 시작했다. 더욱이 서양 사람들이 쓰는 로마자가 우리 한글과 똑같은 소리글자이고, 한글이 한자보다 좋다는 것을 깨달은 주시경과 서재필 등, 선각자인 민족 지도자들이 애쓰면서 겨레 자주정신이 꽃피었다.

그런데 우리말이 살아나고 힘 있는 자주국가가 되기 전에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니 우리말은 다시 사라질 뻔 한다. 그리고 중국 한문을 좋아하던 지배층이 일본말에 길들고 일본식 한자 섞어 쓰기를 좋아하게 되어 한글만 쓰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해서 우리가 나라를 되찾고 한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 온다. 한글로 공문서도 적고, 교과서도 만들고, 신문도 만든다.

한글과 한자의 싸움이 50년 남짓 이어오다가 이제 한글이 이겨서 우리말이 독립하나 했더니 미국말 숭배자들이 다시 우리말 독립을 가로막고 있다. 중국의 영향 아래 있을 때는 중국 한문을 섬기고, 일본의 식민지 때는 일본말을 떠받들고, 미국의 그늘에 살게 되니 미국말 배우기에 목숨을 걸고 있다. 그런 말글살이를 여러 즈믄 해[수천 년]나 하게 되니 우리(토박이)말이 점점 사라지고 한글은 제 빛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강대국에 빌붙어 자신의 이익과 출세만 생각하는 사대주의, 기회주의, 이기주의에 빠진 자들이 판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달말 홀로서기는 끝나지 않은 싸움이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다.

왜 우리말이 홀로서야 하나?

그럼 먼저 배달말 홀로서기란 무엇인가 따져보자.

첫째, 우리말을 한글로만 적는 말글살이를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책도, 정부에서 쓰는 공문서도, 신문도, 문학작품, 학술논문도 우리 말글로만 쓰는 것이다. 둘째, 사람이름과 회사이름, 모임의 이름도 우리 말글로 짓고 쓰는 것이다. 중국 한자나 미국 영문이 아닌 우리 말글로만 이름을 짓고, 낱말을 만들어 쓰는 말글살이다. 셋째, 우리 말글을 스스로 바르게 쓰고 빛내는 일이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우리글로 마음대로 쓰며 우리뿐만 아니라 영어처럼 온누리 사람들이 즐겨 배우고 쓰게 만드는 일들이 배달말 홀로서기이고 한국어독립운동이다.

그런데 ‘왜 우리말이 굳이 독립해야 하는가’ 묻는 이가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을 지배하고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말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동물 가운데서 코끼리나 고래가 사람보다도 힘은 더 셀 것이고, 싸움은 호랑이나 사자가 더 잘할 것이고, 예쁘기는 새나 나비가 더 예쁠 것이고, 하늘을 더 빨리 날기는 제비나 독수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할 줄 모르고 글을 쓸 줄 몰라서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동물의 대장이 되지 못한다. 사람은 말로 서로 뜻과 마음과 지식을 주고받으며 뭉치고, 더 큰 힘을 쓸 수 있어 모든 동식물을 지배하는 만물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여러 겨레나 나라 가운데서도 말글을 잘 다루고, 좋은 말글을 가진 겨레와 나라가 더 잘살고 힘센 나라가 된다. 한마디로 제 나라의 말꽃[문학]과 글꽃[학문]이 활짝 필 때 문화강국이 되고, 정치, 경제, 과학도 발달하고 잘살게 된다. 중국이 일찍부터 한문으로 힘센 나라가 되었고, 영국?프랑스도 라틴말에서 영어나 불어가 독립함으로써 영국, 프랑스 문화가 꽃피고 힘센 나라들이 되었다. 이탈리아가 그랬고 독일도 그랬다.

우리도 우리 말글을 살려 쓰려고 한 세종 때 문화와 과학이 발전했다. 오늘날 우리 경제와 문화가 빨리 발전한 것도 우리말을 한글로 적음으로써 글장님이 없는 나라, 똑똑한 국민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쉬운 말글살이가 국민 지식수준을 높아지게 해서 국력을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백 년 전 대한제국이 망할 때 주시경 선생이 “그 나라의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나니”라고 하며 우리말과 한글을 살리고 빛내는 일에 힘쓴 것은 힘센 겨레,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는 뜻에서 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정보통신 강국이 되는 기초를 닦은 한글기계화 선구자인 공병우 박사는 “말글은 총칼보다도 강하다”고 했다. 최신 문화 창조 무기인 한글로 세계 최대 문화강국이 될 수 있다면서 셈틀(컴퓨터)로 한글 세상을 만들자고 외쳤다. 공 박사의 말씀대로 지금은 우리가 셈틀시대를 맞이해 한글이 빛나고 정보통신 선진국이 되었다.

그 겨레말이 튼튼할 때 그 겨레도 튼튼해지고 잘살게 된다. 한 겨레의 말은 그 겨레의 얼이고 나라가 잘되는 뿌리요, 길이다. 또한 우리 자주 문화가 꽃피게 하고 인류 문화발전에도 이바지한다. 우리말이 남의 말에 치여 흔들리고 약해지지 말아야 우리 문화가 꽃핀다. 지금 우리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말이 독립해야 힘센 나라가 되어 강대국들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기에 국어독립을 외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국어가 독립하나?

먼저 우리말보다 힘센 남의 나라말을 더 우러러보는 버릇부터 버려야 한다. 한문이나 영어를 제 나라말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보, 외국 말글을 더 섬기는 풍조를 씻어내야 한다. 나는 지난날 우리 겨레의 마음에 남의 나라말과 강대국 것을 더 섬기는 사상이 깊게 박혔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사대사상에 깊게 물든 민족이란 것이다. 이는 우리 말글의 독립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가 발전하고 독립하는 데도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문이나 영어를 섬겨야 잘살고 출세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 겨레끼리는 우리말을 주고받아야 한다. 귀로 들어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그 우리말을 한글로만 적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정부나 학자나 언론이 쓰는 글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든지 쉽게 읽고 알아볼 수 있게 해야 한다.

특히 누리통신시대를 맞이해서 온 국민이 우리 말글만으로도 쉽고 마음대로 통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누리네(인터넷 주소)도 영문이 아닌 우리 말글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게 하고, 학술이나 전문 용어를 한자말이나 미국말이 아닌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 입으로만 한글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살리자고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 우리 말법에 맞는 말글로 좋은 글을 써야 한다. 신문이나 공문서, 명함, 간판은 우리 말글로 써야 한다. 우리 말글의 규정과 법을 국민 모두 잘알고 지켜야 한다. 누구나 우리 말글을 남의 말글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정부와 언론은 말할 것 없고 온 겨레가 우리 말글을 갈고 닦고 빛내는 일에 함께 나서야 한다. 남의 글자나 말에 기대지 않고,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어서 서로 아는 것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과 뜻이 통하고 국민 지식수준이 높아지며, 뭉칠 수 있어 힘센 나라가 된다.

그런데 지금 일본 한자말과 한문과 영어에서 온 외국 전문용어를 그대로 쓰다 보니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식수준도 빨리 높아지지 않고, 교육의 낭비가 많다. 외국에서 온 전문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될 수 있으면 우리 토박이말을 찾아 쓰는 노력과 정책이 절실하다.

우리 국민끼리는 우리 말글로만 지식과 정보를 마음대로 주고받고, 우리 말글로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겨레가 1천5백 년 동안 노력한 일이고 꿈이다. 한문과 중국 문화로부터 해방되는 이 꿈이 이루어지려 하는데 새삼 영어 숭배자들이 우리 말글 독립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어 가슴 아프다. 

* <대자보> 상임고문이시며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이신 이대로 선생님이 그동안 발표하신 글을 모아 <우리말글 독립운동의 발자취>(지식산업사 출판)를 펴내셨습니다. 본문은 책의 서문으로 저자이신 이대로 선생님이 우리말글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형성하게 된 배경과 각오를 밝힌 글이라 소개해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축하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편잡주 주.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한글이름짓기연구소 소장
세종대왕나신곳찾기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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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9/29 [15: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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