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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인간의 권리, 발칙한 도발?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죽음을 자주적으로 선택할 권리도 생각할 때
 
류상태   기사입력  2008/05/14 [08:26]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은 오랫동안 신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한 석도 얻지 못해 정당법에 의해 당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기독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평화통일가정당은 호적제를 부활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성전환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생소한 공약까지 내걸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내세운 공약의 기본 이념은 가정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인간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도 신이 세워놓은 질서를 넘어서면 안된다는 기독교적 이념을 반영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삶의 선택권도 종교 이념에 의해 제한받는 현실에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선택권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발칙한 도발로 여겨질 수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안락사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논의자체를 금기시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음을 자주적으로 선택할 권리에 대해 이제는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에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저에게 매우 의미 깊게 다가온 두 가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년 전에 저는 건강하시던 아버지와 갑자기 사별했습니다. 일흔을 막 넘기신 아버님은 아침에 운동을 하시다 쓰러져 불과 몇 시간 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유언도 남기지 못하셨지요. 뇌출혈로 쓰러지신 아버지께서 병원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정상적인 회복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의사는 수술이 성공하여 생명을 건진다 해도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90%를 넘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수술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족들이 빨리 상의하여 결정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들 5형제 중에 저를 제외한 형과 아우들은 일단 아버님을 살려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술을 반대했고 결국 제 뜻대로 수술을 포기하여 아버님은 그 날 정오를 넘기자마자 숨을 거두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수술을 포기하자는 저의 말에 “너 아들 맞냐?”고 말하는 듯했던 형과 아우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기억합니다. 제가 아버님의 수술을 반대한 이유는 평상시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평소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없게 된다면 기꺼이 죽음을 택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병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면, 또는 누군가에게 의탁해야만 살 수 있는 처지가 된다면, 기어갈 힘만 있어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만일 아버님께서 의식이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틀림없이 수술을 거부하시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저는 기꺼이 불효자식이 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3월 1일부터 가톨릭 신부님이 세우신 노인요양원에서 상담사와 생활지도원(치매나 중풍 등에 걸리신 어르신들을 수발하는 돌보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두 가지 사건을 충격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헌신적인 돌보미들의 삶을 통해 맛보는 깊은 감동입니다. 몸과 마음이 아파 불편한 말년을 보내고 계신 어르신들을 친부모 이상으로 정성껏 돌보는 헌신적인 도우미들의 모습은 제 인생을 되돌아보게 할 만큼 충격이었고 감동이었습니다. 저는 그 돌보미들을 천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천사들을 만난 것이지요.

지난 몇 해 동안 저는 독선과 배타에 쌓인 보수 기독교와 정신없이 싸웠습니다. 그로 인해 제 안에는 치유되기 어려운 깊은 아픔과 상처, 분노가 자리잡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 마음의 병이 치유될 것 같기도 합니다. 천사들이 주는 감동으로 말입니다.

이곳에서 제가 충격으로 만난 또 하나의 사건은, 회복될 수 없는 병을 얻어 인생의 말년을 힘겹게 보내고 계신 어르신들의 처절한 삶입니다. 이곳에 계신 120여 분 어르신들의 평균 연령은 80이 넘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어르신들을 만나며 가장 많이 듣는 말씀 중 하나가 “죽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어르신들 말씀 중에 절대로 곧이들으면 안되는 것이 “죽고 싶다”는 말씀이라지요? 하지만 걸을 수도 없고 생리현상도 스스로 조절할 수 없어 도우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어르신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입니다. 어르신들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떨어대는 돌보미들의 말짓, 몸짓도 그저 잠시 웃음을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차라리 치매에 걸려 어린아이의 의식을 가진 분은 그 말년이 행복(?)할 수도 있지만, 의식이 온전하신 어르신들은 하루 빨리 이생에서의 삶을 접고 싶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침에도 한 어르신에게서 “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죽고 싶어. 정말이야. 내일 아침밥에 약을 넣어줘.”라는 애절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도, 사람이 존엄하게 살 권리도 충족되어야 하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는 그 생각이 더욱 굳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건강상태에서 그 존엄성이 박탈당한다면, 존엄한 삶의 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싸워야 하겠지요. 하지만 연로하여, 또는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은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 수 없는데도, ‘생명은 존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물리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사람은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간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불교의 인간관은, 사람이 조건과 환경에 관계없이 누구나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현대사회의 합의를 이루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늘처럼 존귀하므로 귀하게 살아야 한다는 종교의 가르침은 단지 물리적인 시간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종교적으로는 영적으로도) 사람답게, 존엄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존엄하게 살 권리’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해왔고,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그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권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연 상태라면 벌써 생을 마감했을 건강 상태에 있는 분들, 매일 매일을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분들, 또한 이제는 그만 생을 접기를 갈망하고 있는 분들을 여전히 현대 의술에 의탁하여 (본인의 의사는 무시한 채) 그저 물리적으로 살게 하는 것은 오히려 ‘존엄하게 살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는 것은 ‘존엄하게 살 권리’를 더욱 충족시키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2002년에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하여 시행하고 있는 네덜란드는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1) 환자들이 치유될 수 없고
2) 환자가 건강한 정신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안락사에 동의하며
3) 환자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클 경우.


네덜란드의 법안은 안락사를 시행하기에 앞서 반드시 이들 세가지 조건이 충족됐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료의사들과 협의해야만 한다는 단서를 내걸고 있습니다. 또한 안락사가 시행될 경우에는 법률가, 의사, 윤리학자 등 각 1명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에 보고해 사후 검토과정을 거쳐야 하며, 위원회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하면 기소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처럼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보다는 아직 안락사법에 동의하지 않거나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나라가 많고, 우리나라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주적인 선택, 즉 안락사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면에는 종교권, 특히 기독교권의 절대적인 거부감이 크게 작용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큰 죄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소유권은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신에게 있다는 생각은 숭고하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은 존엄하다’는 선언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기에, ‘존엄하게 살 권리’도 마땅히 누려야 하지만, ‘존엄성을 훼손당하면서까지는 살지 않을 권리’, 혹은 ‘고통스럽게 살지는 않을 권리’, 나아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서도 이제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존엄성이란 양적인 것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벗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글은 격월간지 <공동선> 2008년 5+6월호에 실린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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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5/14 [08: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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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arstar 2008/05/18 [00:42] 수정 | 삭제
  • 예전에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노환의 경우는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식물인간까지는 아니어도 의식은 있으나 몸을 움직일 수는 없는 상태에서
    생명을 연장하는 경우가 생기는 경우입니다.

    토지의 작가는 폐암이 발병했으나 이미 노쇠한 자기 몸에 억지를 부리기 싫어서 병원치료를 거부를 했습니다.
    그분은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과연 자살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치료의 소망을 가지고 현대의학에 자신의 몸을 의탁했으나 완전히 치료가 되지도 또는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도 없게 되는 애매한 경우로 삶의 시간이 연장되는 경우겠죠.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경우 치료를 포기하면 바로 사망이 되기 때문에 결정의 어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하면 과연 자살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인데 현대의학의 힘을 최대한도로 빌리지 않았다고 자살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의학의 힘을 중간에 포기했다고 해서 자살이라고 또는 타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살이라고 말하지 말고 치료의 포기라고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손이 결정하기 전에 본인들 스스로 미리 결정을 하고 자신이 의식을 잃어 의사를 표명할 수 없을 경우를 들어 자손들에게 말로 그리고 문서상의 유언으로 미리 남기는 것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만약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생명을 연장하기 원한다면 그 원함대로 해 드리는 것이 자손의 도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