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그 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이다.” 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 의도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위의 말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기독교 가치의 유일성을 전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면,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일단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인으로 공격받을만하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사용하는 ‘고백의 언어’라면 시비를 걸 필요가 없다.
위의 글을 고백의 언어로 이해하면 이렇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 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종교의 언어를 ‘객관적 진술’로 보느냐 ‘고백의 언어’로 보느냐의 문제는 이처럼 중요하다.
만일 위의 말이 이런 고백의 선언이라면, 이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에 매우 경건하고 충실하면서도 자신들과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존중하는 열린 종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도 당신들과 똑같이 믿어야 하는가?” 라고 믿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건 우리 공동체의 고백이다. 당신들의 고백은 무엇인가? 당신들의 구세주, 당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분(혹은 그것)은 누구(무엇)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내가 운영하는 다음(DAUM) 카페 <불거토피아>에 어느 벗님이 이런 질문을 올려놓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이 구절이 진실로 예수의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의 말이 아닌, 예수의 추종자들이 적은 고백의 언어인지 궁금합니다.”
이 벗님의 질문에서 수식어를 빼면 이렇게 된다. “예수의 말입니까? 예수의 추종자들이 적은 고백의 언어입니까?” 만일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둘 중 하나인지, 둘 다 아닌지, 둘 다 포함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차분히 이 문제에 집중해서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은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사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쓰여졌다.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서기 9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예수 사건이 실제로 서기 30년경에 있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 해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시대가 된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더욱 더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을 강조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언적 성격보다는 의미와 해석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는 말이다.
시대적으로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쓰여졌다는 점, 역사적 사실성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미와 해석에 중점을 둔다는 점, 영지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요한복음에서 실제로 예수가 “말했다는” 구절이 실제 예수의 말일 가능성은 다른 복음서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의심을 성서비평학자들로부터 받고 있다. <예수 세미나> 학자들의 경우, 요한복음에는 실제로 예수께서 한 말이 거의 없다고 보기까지 한다.
이런 학문적 배경을 전제하고 볼 때, 또한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서기 30년경에 실존하셨다는 가정 아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이다. (요즘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는 예수신화학파의 주장이 나오고는 있지만, 나는 역사적 예수의 실존에 더욱 큰 가능성을 두고 있으며, 역사적 예수가 개인인지 다수인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1) 위의 문장 전체(요한복음 14장 6절)를 예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을 가능성
만일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직접 하셨고, 그 말이 왜곡되지 않고 후대(기록 당시까지)에 전해진 것이라면, 전반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 삶을 사셨던 예수님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으며, 진리와 생명의 삶 가운데 있다는 깨우침의 선언으로 보인다.
후반부(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의 경우는, 예수께서 그런 깨우침을 통해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듯이, 신(궁극진리(ultimate-reality), 또는 도(道)라고 해도 좋다)과의 합일은 자신의 경우처럼, 깨우친 자아(각성된 각자의 진정한 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선언으로 보인다.
2)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후대의 고백이 결합되었을 가능성
이 가능성이 맞다면, 예수는 단지 자신이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 삶을 사셨기에 바른 길을 걷고 있으며, 진리와 생명의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그 깨우침의 선언을 제자들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히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어서) 또는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에만 종교적 최고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예수 개인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선언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3) 후대의 누군가가 예수님의 권위를 빌어 기록했을 가능성
어쩌면 이 문장은 예수와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교회나 특정 공동체, 또는 개인)에 의해 선의로 혹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선의로 기록되었다면 순수하게 예수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고백의 언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조직 (당시 교회, 혹은 요한공동체 등)의 조직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의 권위를 빌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상에서 제시한 세 가지 해석의 가능성은 물론 ‘나의 해석’일 뿐이다. 가능성을 말한 것이며 어느 것 하나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해석을 가능성으로 내놓는 것은 “이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교리 기독교의 해석이 다양한 본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한 채,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는 복음(복된 소식)이 아니라 특정 종교 조직의 강화를 위한 화음(화를 가져오는 소식)으로 악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종교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다. “그 때,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백했을까?”를 묻지 않고 “경전에 기록되었으므로 그대로 믿어야 한다.”(‘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성서 구절조차도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기록자의 고백의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있는 한, 종교는 사람을 그 종교 조직에 얽어매는 마약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렇게 마약에 중독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마약중독자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 조직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기에, 자신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기어코 자신의 종교 조직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살리는 숭고한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고 “진실로”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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