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태의 참예수를 찾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예수만이 구세주, 유일한 구원의 길인가?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종교의 언어는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고백의 언어
 
류상태   기사입력  2008/01/30 [19:31]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그 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이다.” 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 의도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위의 말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기독교 가치의 유일성을 전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면,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일단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인으로 공격받을만하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사용하는 ‘고백의 언어’라면 시비를 걸 필요가 없다.

위의 글을 고백의 언어로 이해하면 이렇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 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종교의 언어를 ‘객관적 진술’로 보느냐 ‘고백의 언어’로 보느냐의 문제는 이처럼 중요하다.

만일 위의 말이 이런 고백의 선언이라면, 이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에 매우 경건하고 충실하면서도 자신들과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존중하는 열린 종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도 당신들과 똑같이 믿어야 하는가?” 라고 믿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건 우리 공동체의 고백이다. 당신들의 고백은 무엇인가? 당신들의 구세주, 당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분(혹은 그것)은 누구(무엇)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내가 운영하는 다음(DAUM) 카페 <불거토피아>에 어느 벗님이 이런 질문을 올려놓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이 구절이 진실로 예수의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의 말이 아닌, 예수의 추종자들이 적은 고백의 언어인지 궁금합니다.”

이 벗님의 질문에서 수식어를 빼면 이렇게 된다. “예수의 말입니까? 예수의 추종자들이 적은 고백의 언어입니까?” 만일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둘 중 하나인지, 둘 다 아닌지, 둘 다 포함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차분히 이 문제에 집중해서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은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사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쓰여졌다.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서기 9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예수 사건이 실제로 서기 30년경에 있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 해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시대가 된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더욱 더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을 강조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언적 성격보다는 의미와 해석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는 말이다.

시대적으로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쓰여졌다는 점, 역사적 사실성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미와 해석에 중점을 둔다는 점, 영지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요한복음에서 실제로 예수가 “말했다는” 구절이 실제 예수의 말일 가능성은 다른 복음서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의심을 성서비평학자들로부터 받고 있다. <예수 세미나> 학자들의 경우, 요한복음에는 실제로 예수께서 한 말이 거의 없다고 보기까지 한다.

이런 학문적 배경을 전제하고 볼 때, 또한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서기 30년경에 실존하셨다는 가정 아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이다. (요즘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는 예수신화학파의 주장이 나오고는 있지만, 나는 역사적 예수의 실존에 더욱 큰 가능성을 두고 있으며, 역사적 예수가 개인인지 다수인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1) 위의 문장 전체(요한복음 14장 6절)를 예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을 가능성

만일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직접 하셨고, 그 말이 왜곡되지 않고 후대(기록 당시까지)에 전해진 것이라면, 전반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 삶을 사셨던 예수님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으며, 진리와 생명의 삶 가운데 있다는 깨우침의 선언으로 보인다.

후반부(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의 경우는, 예수께서 그런 깨우침을 통해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듯이, 신(궁극진리(ultimate-reality), 또는 도(道)라고 해도 좋다)과의 합일은 자신의 경우처럼, 깨우친 자아(각성된 각자의 진정한 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선언으로 보인다.

2)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후대의 고백이 결합되었을 가능성

이 가능성이 맞다면, 예수는 단지 자신이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 삶을 사셨기에 바른 길을 걷고 있으며, 진리와 생명의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그 깨우침의 선언을 제자들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히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어서) 또는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에만 종교적 최고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예수 개인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선언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3) 후대의 누군가가 예수님의 권위를 빌어 기록했을 가능성

어쩌면 이 문장은 예수와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교회나 특정 공동체, 또는 개인)에 의해 선의로 혹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선의로 기록되었다면 순수하게 예수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고백의 언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조직 (당시 교회, 혹은 요한공동체 등)의 조직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의 권위를 빌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상에서 제시한 세 가지 해석의 가능성은 물론 ‘나의 해석’일 뿐이다. 가능성을 말한 것이며 어느 것 하나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해석을 가능성으로 내놓는 것은 “이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교리 기독교의 해석이 다양한 본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한 채,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는 복음(복된 소식)이 아니라 특정 종교 조직의 강화를 위한 화음(화를 가져오는 소식)으로 악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종교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다. “그 때,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백했을까?”를 묻지 않고 “경전에 기록되었으므로 그대로 믿어야 한다.”(‘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성서 구절조차도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기록자의 고백의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있는 한, 종교는 사람을 그 종교 조직에 얽어매는 마약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렇게 마약에 중독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마약중독자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 조직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기에, 자신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기어코 자신의 종교 조직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살리는 숭고한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고 “진실로” 믿기 때문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1/30 [19:3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산중문답 2008/02/18 [00:41] 수정 | 삭제


  • 당연히! 이 글은 [여유반납]님 꼬리말에 대한 반론이다.

    이라며 글을 올리고 있는 존재는 인간인가, 초월자인가, 아니면 神 자신인가?...

    위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도 자명하고 틀림없는 이다. 곧, [여유반납]이라는 한 '인간' 이, '한글'이라는 언어를 도구로 올린 '글' 인 까닭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해서, 이같은 물음과 그에 대한 명백한 답만으로, 이미 여유님에 대한 반론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혹, 여유님이 '아쉽거나 이해가 안된다' 면, 좀더 설명한다.)





    위 역시 여유님 자신의 생각이다. 한 인간 개인의 것이다. 여기에 그런 판단과 확신이 '누구로부터 시작했는가' 를 떠올리면 더더욱 좋겠다. 물론, 자신이 오로지 홀로 터득하고 깨달은 내용일 수도 있게지만, 직/간접으로 그러한 생각을 갖게된 동기와 원인이 교회이든,바이블이든,목사의 설교든,책이든 존재할 것도 분명하니 말이다. 아무튼, 어떤 경우이든 100%! 여유님 자신을 포함한 '인간' 들 자신의 결과물일게다.


    그렇다고, 이 글을 쓰는 산중문답이 '神 야훼의 부존재' 를 확언하거나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럴 의향도 없다. 내 스스로 '(부존재) 증명을 하지 못한다' 것 역시 너무도 잘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여유님의 위같은 단정과 확언처럼 '증거' 없이 말하진 않는다. 그런 면에선, 최소한 산중문답이나 본문 필자인 류상태씨가 여유님이나 님의 본문같은 견해와 거진 비슷하게 주장하는 현재의 대다수 '한국기독교도들보단 훨씬 정직하고 또 솔직하다' 고 생각한다. 또한, 그리도 神 야훼와 삼위일체 메시아 예수, 그리고 그들의 섭리와 진리의 뜻을 바이블을 통해 그리도 관통하고 꿰뚫어 안다면.. 그가 곧 그리스도요 메시아가 아니겠는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언행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다시 말해..

    여유님같이 주장하는 '자칭 크리스천' 자신들부터, 스스로 강변하는 神 야훼와 그리스도 예수의 에 대한 '명백하고 확실하며 충분한 증거' 를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재현가능성 있는' 논리를 두며 부터 하라! 지난 2천 년 간..(제임스 어셔에 의한 바이블 연대기에 의하면, 유대교까지 합치면 6천 년 간이나 되고) 도대체 제대로 증명해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그러면서도 거의 자신들이 예수처럼 神을 자처하는 - (요 10:34~38) 구절처럼 - 모양새다. 당장 산중문답이 제시한 요한복음 해당구절의 의미가 기독교계에서 통일되어 있던가? 수없이 사분오열 되어 있으면서도 저마다 라는 극명한 아이러니와 모순만을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지 않는가! 가령, '말씀을 받은 자가 神이다' 라는 35절 자체도, '예수' 가 직접 적은게 아니라 '요한' 이 기록한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한 사실 인식에 입각하면.. 가 보다 사료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적 접근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단 하나일까? 분명히 아니다. 또, 한국 기독교계의 현주소만 보아도 실제로 수도 없이 많다. 현실이 이 지경인데도.. 오직! 여유님이 그 구절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하며 동조하는 내용만이 '옳고 바르며 맞다' 고 님은 확신할 수 있나? 또, 혹여 '그렇다' 라면 그 확신과 확언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윗글로 보아, 여유님 자신의 이해와 해석, 관점을 몹시 확신하고 있는 듯 강변과 단언으로 일관하고 있는 까닭이다. 해서..




    라는 [여유반납]님 발언이야말로 적반하장의 의식구조를 적나라게 드러낸다. 글 하나로 상대를 쉽사리 재단하고 합당한 이유와 논거조차 없는 태도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득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다.


    [여유반납]님..

    님부터 솔선수범해서 여유를 반납하고 바이블의 참뜻, 예수의 언행에 대한 진의를 더욱 깨치는데 용왕매진해 볼 의향은 없는지요?

    산중문답은..

    최소한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생각을 그리도 잘 안다' 라는 들이야말로, 그런 강변 자체가 그들의 뜻을 너무도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숭배,신앙하는 존재자들마저 자신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한심한 작태라는 것만은 분명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 여유반납 2008/02/02 [23:15] 수정 | 삭제
  • 이 사이트 얘기를 우연히 듣고, 처음 읽는 글이지만, 진리를 다루는 인간의 시각이 얼마나 오만한지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드는 글같아서, 의견을 남길까 한다. 성경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진리는 시간과 환경을 초원하는 개념이며,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범주를 훨씬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믿자고 결심하는 믿음을 훨씬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그러한 "진리"가 과연 무엇이 있는지 질문하는 사람은 수도없이 많다. 그리고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여 진리를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을 자신의 혼을 관통하는 진리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겠는가? 그를 1) 2) 3)의 경우에 대비하여 인간적 오만으로 판별할 수 있겠는가?

    진리에 대하여 결코 포기할수 없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선언이 어째거 진리가 될 수 있는지를 성경 전문을 탐독하며 연구해 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전통 유대인에게, 자신이 제시한 천국에 대한 실상, 그리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성전조차 3일만에 다시 세울수 있다는 외침이 무엇인지, 그 진정한 의미부터 간파했어야 한다.

    어찌 이런 진리를 알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거나, 혹 믿으면 그저 종교적 신앙이 그 바탕이 된다는 인간의 동물적 속성에서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진리를 알고자 노력하지 않는 인간의 오만이 진리는 없다는 외침으로 들리는 것 같아서, 저자의 경력을 감안할 깨 특히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길"이라는 의미와 "진리"라는 의미와 "생명"이 가르키는 진정한 의미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성경 그 자에에서 찾아보시기 바란다. 이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평가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하느님의 사자로서의 예수가 어떤 자세를 펼치셨는지, 진지하게 조명해보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가 자신있게 선포한 길, 진리, 생명의 의미를 다시 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