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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당시 '복음의 원형'으로 돌아가라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우리 사회의 젊고 유능한 조카들에게 드리는 글
 
류상태   기사입력  2008/01/11 [11:27]
'자본주의 만세'를 함께 불러주마
 
조카뻘 되는 아가씨가 지난 3개월간 백억을 벌었단다. 무척이나 예쁘고 노래도 잘하는 이 친구는 이미 십여년 전부터 연예계의 중심에 우뚝 서더니 지금까지 롱런하고 있는 꽤 괜찮은 젊은이다. 마음껏 축하해주어야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솔직히 배가 아프다.
 
허망한 꿈 한번 꾸어 보겠다. 3개월간 백억을 벌었다는 이 아가씨가 내 조카뻘 되는 젊은이가 아니라 진짜 조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조카가 아니라 내 자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열두살 차이 띠동갑이니 사실 지금 많이 무리하고 있다). 만일 그게 현실이라면 나는 이 아이에게 번 돈의 절반만 달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뭘 하려고 그러냐고 묻겠지.
 
내 자식이 모두 열둘이라고 가정할 경우, 나는 이런 식으로 모든 아이들에게 수입의 절반을 거두고 싶다. 열둘 중에 한 달에 일억 원을 버는 아이가 있다면, 그 중 절반인 오천만원은 자기 마음대로 쓰게 하고, 오천만원은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한 달에 일백만원을 버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도 절반인 오십만원은 자기 마음대로 쓰게 하고, 오십만원은 거둬들인다. 가혹하지만 한 달에 십만원밖에 못 버는 아이에게도 자기 몫 오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오만원은 꼬박꼬박 내게 한다. 만일 일을 전혀 못할 정도로 지체가 불편한 장애아이가 있다면 물론 그 아이에게는 받을 게 없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열 두 아이들에게 똑같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주고 아프면 병원에 보내주는데 그 돈을 쓰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거둔 돈이 충분히 여유가 된다면, 돈을 전혀 벌지 못하는 장애아이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먹여주고(식문제), 재워주고(주거문제), 가르쳐주고(교육문제), 아프면 치료해주고(의료문제) 싶다.
 
이렇게 한 다음에는, 그들이 자기 몫 절반으로 무엇을 하건 전혀 간섭하지 않겠다. 한 달에 일억을 버는 아이가 BMW나 벤츠를 몰고 다니건, 수백만원짜리 코트를 걸치건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서 거둔 돈으로 똑같이 마련해준 음식이나 집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호텔에서 호화판 고급요리로 하루 세끼를 모두 떼우고, 수영장이 딸린 최고급 저택에 살아도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많은 수입의 절반을 식구들을 위해 내놓은 후에 나머지 절반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호쾌하게 쓸 줄 아는 자식의 호연지기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물론 법적으로 죄를 짓거나 가정을 해치는 못된 짓을 저지르는데 쓸 경우에는 가정 윤리, 혹은 사회법의 저촉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식들에게서 수입의 절반씩 거둔 돈으로 이런 기초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데는 부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는 하는 수 없이 돈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아껴가며 쓰되, 돈을 잘 벌건 못 벌건 내 아이들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네가지 기본적인 수요는 모두에게 공정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수입의 절반은 자신을 위해, 절반은 가정을 위해’라는 수입과 배분의 원칙은 꼭 지키고 싶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충분히 눈치를 챘을 것 같다. 내가 가장으로 자식들과 함께 이루고 싶어 하는 일을 나라에 적용하면 그대로 사회복지국가의 모델이 된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내 창의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서구의 복지국가들이 어느 정도 성취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단지 복잡한 경제문제를 가정문제로 단순화시켜 묘사했으며, 개인과 공동체의 몫을 똑같이 50:50으로 정한 것뿐이다.
 
우리나라에는 분단이라는 현실적인 특성상 아직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면이 있지만,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어느 한 쪽 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국가나 개인은 지구마을에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지난 세기의 실험을 통해 인류는 순수자본주의의 포악성과 순수공산주의의 비현실성을 충분히 자각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포악성을 경고하여 수정자본주의로 가게 하는 ‘은혜’를 베풀었지만, 자신은 수정공산주의로 발빠르게 변신하지 못하여 체제공산주의의 몰락을 급속히 불러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공산주의 자체가 몰락했다는 일부 자본주의자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지금은 순수자본주의도 순수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의 몫과 공동체의 몫을 어느 선에서 조절하느냐의 선택이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대수의 사람들이 거의 동의하게 되기까지 인류는 지난 세기 내내 치열한 냉전과 갈등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개인’과 ‘자유’,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공동체’와 ‘평등’, 이것은 인류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세계에서 사회적 동물로 들어선 단계부터는 어쩔 수 없이 이 양자의 조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조화와 균형의 비율을 50:50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50:50. 어느 한 쪽으로 넘치지도 않고 처지지도 않는 비율. 이 비율이 중요한 이유는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 중에서,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중요하다거나 우선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든 가정의 예를 나라 경영에 적용시키자면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고 많은 연구를 해야겠지만 50:50의 비율을 황금비율로 삼는다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50:50을 황금비율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실험을 거쳐 가장 완벽에 가깝게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는 서구복지국가의 비율이 50:50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50:50으로 비율을 단순화하면, 단순화의 효율성이 작용하게 될 것이다. 기준이 복잡할수록 적용하는데 애를 먹을 수 있다. 또한 기준이나 제도가 복잡해지면 허점이 생기기도 쉽고, 자기 이익을 위해 그것에 흠집을 내거나 도피하려는 시도도 많아질 수 있다. 50:50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제도를 단순화하면 관리비용 절약에도 도움이 된다.
 
요즘 한국 교회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나는 진정한 기독교 정신을 되찾기 위해서는 초대교회가 아니라 예수 당시 복음의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초대교회의 실험 중에서 가장 가치를 인정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공동체 실험에 관한 부분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초대교회에는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이, ‘우리의 것’으로 모든 소유를 공동의 것으로 하며, 함께 먹고 나누는 100% 공동체를 시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내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인 그런 공동체에는 참여할 자신이 없다. 아니, 참여할 마음도 없다. ‘내 것에 대한 이기심’을 완전히 내려놓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순수공산주의가 비현실적이라고 공격받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내 것 반, 우리 것 반’을 황금비율로 생각하는 것이다.
 
체제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분석은 ‘인간의 본능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자본주의로 질주한다면 인간세계는 ‘동물의 왕국’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이념이 추구하는 이상의 조화를 이루어낸 것이 바로 북유럽 복지국가의 현실일 것이다.
 
기독교 성서의 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마르코)복음은, 예수의 첫 설교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공동번역 마르코 1장 15절)라는 말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전한 기독교 정신의 핵심이 ‘신의 나라 구현’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예수는 자신이 꿈꾸는 신의 나라가 ‘모든 생명이 한 근원인 신의 자녀이므로, 신분과 소유의 차별이 없는 평등하고 공정하며 풍요를 누리는 사회공동체를 구현하고, 그것이 더욱 발전하여 나라공동체와 세계공동체로 발전하는 것’에 있음을 자신의 삶과 말씀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런데 예수는 신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대전제로,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이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경제적인 문제로 씨름해 왔으니 끝까지 경제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진정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신의 나라가 구현되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연봉 일억을 버는 사람이 오천만원을 착취당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고 기꺼이 공동체를 위해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오천만원을 아까워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것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며, 세상의 안정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는 것인지, 또한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과 함께 누리는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데 얼마나 큰 밑거름이 되는지를 자각하고 그런 나라, 그런 세상의 실현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이 아닐까.
 
20이 80을 갖고, 80이 20을 나누어 갖는다는 20:80의 법칙은 너무 잔인하다. 잘나고 똑똑하여 상위 20%에 드는 젊은이들이 기꺼이 번 돈의 절반을 사회공동체를 위해 내놓을 수 있다면, 그들은 내놓은 것 이상의 존경과 평화,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인류가 오래도록 꿈꾸어왔던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우리 ‘한민족’은 ‘한(큰, 또는 하나인) 민족’이라 한다. 기독교 성서는 인류가 한 조상에서 나온 같은 핏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한 가족이 맞지 아니한가? 어떤가, 자본주의의 자유와 풍요를 즐기는 젊고 유능한 조카들이여! 그대들이 번 돈의 절반을 내놓지 않겠는가? 그대들이 기꺼이 절반을 가족(사회, 국가)을 위해 내놓는다면, 이십대부터 빨갱이 소리를 들어왔던 나도 기꺼이 ‘자본주의 만세’를 함께 불러주겠다!
 
* 본문은 격월간지인 <공동선> 11+12월호에 ‘자본주의 경제와 신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올린 필자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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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1/11 [11: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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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교 2008/02/11 [19:56] 수정 | 삭제
  • 교회를 가면 친구도 형제도 가족도 멀어진다. 물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무조건 묵사와 교인만 좋아한다. 왜 그럴까. 나는 그래서 교회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