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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학교, 종교예배 참석 강요말아야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학교도 피해자'라는 주장을 할 자격 있는가
 
류상태   기사입력  2007/10/12 [19:36]
어느 농장에서 생긴 일
 
어느 가난한 노인의 농장에 늑대 한 마리와 어린 사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인이 늑대에게 말했다. “내 잠시 마을에 다녀오마. 여기 빵 4개를 남겨 둘 테니 사이좋게 두 개씩 나눠 먹어라. 그리고 사슴은 아직 어리고 몸이 약하니 네가 잘 돌봐주어야 한다.”
 
늑대는 그렇게 하겠다고 주인과 약속했다. 노인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가 나타나 늑대에게 말했다. “살고 싶으면 가진 것 전부 내놔라.”
 
늑대는 살려달라고 빌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빵 4개가 전부인데, 나와 사슴이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모두 가져가면 우린 굶어 죽게 되니, 두 개만 가져가시고 두 개는 남겨주십시오.”
 
호랑이는 늑대보다 사슴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빵 두 개를 남겨주었다. 뒷동산에서 뛰놀던 철모르는 사슴이 뒤늦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나타났다. “늑대 아저씨, 먹을 것 좀 줘. 배고파 죽겠단 말이야.”
 
늑대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얘야, 내 말을 잘 들어라. 주인님이 여행을 떠나시면서 너한테 빵 두 개, 나한테도 빵 두 개를 맡겨놓고 가셨거든? 그런데 호랑이 녀석이 나타나서 네가 먹어야 할 빵 두 개를 빼앗아 갔구나.”
 
사슴은 울상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배고파 죽겠어. 하나씩 갈라 먹자.”
 
늑대는 사슴을 점잖게 타이르며 말했다. “네가 어리고 철이 없어 내 말귀를 알아  듣지 못하는구나. 주인이 분명 두 개씩 먹으라고 했으니 두 개는 내 몫이야. 너의 몫은 호랑이가 가져갔으니 억울하면 호랑이한테 가서 말하라니까.”
 
강의석군이 학내 종교자유를 주장하며 단식으로 저항했을 때, 기독교학교 운영자들은 “학교 안에서 종교자유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고교평준화 정책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학교도 피해자’이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육당국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10월 5일 강의석군이 학교와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낸 소송은 기각했지만, 대광고를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서는 강의석군에게 승소판결을 내렸다. 기독교학교 관계자들은 판결에 문제가 있으므로 상소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한 피해자’의 변명
 
나는 지금부터 ‘학교도 피해자’라는 논리를 수용하고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 역시 사건 초기에는, ‘학교도 피해자’라는 말을 늘 하고 다녔다. 아니 ‘학교도 피해자’라는 논리 자체에는 지금도 일부 동의한다. 다만, “학교도 피해자이므로 우리는 학내 종교자유 문제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하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학교 운영자들의 주장대로 학교도 피해자이고 학생도 피해자라고 하자. 그런데 두 피해자 중 강자인 학교 운영자가 자기 권리만 주장하며 약자인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게다가 이 ‘강한 피해자’는 ‘약한 피해자’를 돌볼 책임이 있는 교육자들이다.
 
제도상의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교육제도상의 문제를 학생이 어떻게 풀 수 있는가? 문제가 있다면 교육기관인 학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부와 대화하고 해결해야지 피교육자인 학생에게 “정부 탓이니 우린 모른다”고 발뺌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게다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지난 30년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학생이 이의를 제기하니까 그제야 ‘나도 피해자’이니 억울하면 정부 당국자에게 알아보라니 이 사람들이 교육자 자격이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종교교육을 할 자유’와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 접점은 결국 선택권을 주는 것
 
기독교학교 운영자들이 계속 주장하는 ‘종교교육을 할 자유’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강의석군은 종교교육을 하지 말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강군이 주장한 것은 “예배 참석을 강요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꺼낼 때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다. 기독교학교 운영자들이 진정으로 기독교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기독교 정신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라도 강요해선 안된다. 제도적으로 강제한다고 해서 통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강요할수록 학생들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또한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예배에 참석시키는 짓은 자신들의 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예배는 거룩하게 드려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학교에서 강제로 드려지는 예배 현장은 어떠한가? 억지로 불려 와서는 졸고 떠드는 아이들, 그들을 억지로 깨우기 위해 매를 들고 돌아다니는 교사들의 숨바꼭질 속에서 예배의식을 받아야 하는 신의 마음이 어떠실지 생각해 보라. 당신들의 신을 그렇게 초라한 분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이렇게까지 말해주어도 모르겠거든, 차라리 가톨릭 계통의 미션스쿨에서 하는 것을 보고 벤치마킹이라도 하라. 그들은 아무나 미사에 참석시키지 않는다. 학생들이 원해도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일정 과정을 밟게 한 다음, 진정 마음으로 예배드릴 자세가 되었다고 판단될 때 학생들에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전체 학생이 참석하는 미사형식의 예식도 일 년에 몇 차례는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건 길거리에서건 가리지 않고 열심을 다해 전도하는 개신교는 신자 수가 계속 줄고 “아무나 붙여줄 수 없다”는 식으로 배짱(?)을 부리는 가톨릭은 신자 수가 폭증하는 현실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가? 기독교학교 운영자들은 예배 참석을 강요하기 전에, 무엇이 진정한 예배인지, 무엇이 진정 효과적인 선교인지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기독교학교 운영자들에게 부탁한다. 종교교육을 열심히 하라. 단, 맹목적인 열심만 내지 말고 시대의 변화를 읽어가며 제대로 열심히 하라. 싫다는 학생을 억지로 예배에 참석시키지 말고 선택권을 주어 내용으로 승부하라. 그러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토록 쉬운 문제를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설명하고 제안했지만 마이동풍이기에, 기독교학교 운영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종교예식에 참석시키는 것은 문화적(종교적) 강간행위
 
▲류상태 목사가 오랜 침잠 끝에 내놓은 <당신들의 예수> 그동안 기고한 글들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도서출판 삼인, 2007
막강한 권력자를 아버지로 둔 B군은 A양을 “진실로” 사랑하였다. 어느 날 B군이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A양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B군이 강간을 저질렀다고 수군댔지만 B군은 떳떳했다. 자신은 진실로 A양을 사랑했으며, 자신이 A양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것은 A양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B군은 A양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한 데 대해 자부심까지 갖고 있다. B군은 이제 자신의 사랑행위를 통해 A양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될 것이고 결국 자신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B군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B군은 사람들의 비난을 비웃고 만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진실되고 순수한 사랑의 의미를 어찌 알겠는가고 생각하면서... 기특하게도 B군은 사람들이 비난을 퍼붓는 것도 그저 뭘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에 따른 비난일 뿐이므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고, 그저 불쌍한 마음으로 품어주어야 한다고 너그러운(?) 마음까지 가져준다. 그런 자신의 넓은 마음, 아니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마저 용서하고 이해하는 희생적 사랑에 스스로 감동하면서 역시 자신은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종교예식에 참석시키는 것은 문화적(종교적) 강간이다. 우리 사회에는, 일상생활에서는 제대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똑똑한 사람인데 특정분야에 대해서는 뇌가 마비된듯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무뇌아’라고 부른다.) 그들은 신사적으로(?) 문화적 강간행위를 저지르기도 하며, 그런 강간범을 논리적으로 변호하기도 한다. 그들과 합리적인 대화로 문제를 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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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0/12 [19: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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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류장화 2007/10/19 [23:20] 수정 | 삭제
  • 자꾸 토달면 스토커 같아서 가끔은 무시해야 하는데... 어쨌든...

    선택이 필수라면 그 논리는 종교계 학교의 예배에 적용될 것이 아니라
    학교의 학생 선택이나, 학생의 학교 선택에 적용되어야 한다.

    평준화제도만 사라지면 학교의 예배 필수가 문제가 안 되는 것 아닌가?
    예배를 선택할 학생만 그 학교를 선택할 것이므로...

    종교계 학교의 선택권은 무시해도 되는 권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