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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쓴 '일본군 위안부'의 만행, <딸들의 아리랑>
[사람] 정대협의 산증인, "일본 사죄·배상할 때까지" 싸우겠다는 김혜원
 
최방식   기사입력  2007/08/09 [17:16]
▲ 김혜원씨 저술 '딸들의 아리랑'   ©허원미디어
“처음 위안부 운동을 시작할 땐 그저 한 5년이면 끝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름도 그래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로 했지요. 20여년이 흘렀는데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1세대 운동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재능 있는 예술인이 대중적 영화를 하나 만들어줬음 좋겠습니다. 27년 전 광주민주화운동을 되살린 ‘화려한 휴가’처럼요.”

위안부 운동사 ‘딸들의 아리랑’(허원미디어)을 펴낸 김혜원씨의 회고이자 간절한 바람이다. 교사에서 평범한 주부 그리고 교회여성 활동을 하다 친구의 꾐에 정신대연구에 참여하게 된 김씨. 정대협 탄생에서부터 20여년 ‘위안부 운동’에 인생 후반을 바친 그가 아픈 역사를 자그마한 한권의 책으로 정리하며 우리에게 건넨 메시지는 손자가 서대문형무소 방명록에 남겼다는 ‘ㅅㅂㄴ’이었다.

‘망각은 죄’라고 그랬다. 망각이 범죄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지만 피를 부르는 전쟁과 인권유린이 되풀이되기에 한 말일 것이다. 범죄를 예방하려면 공식적으로 기록하라는 것이다. 공개적 반성을 위해. 전쟁범죄가 거듭되고 변명하고 망각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에. 그러니 위안부 운동의 산증인인 김씨는 회고록으로, 이를 잘 모르는 손자는 ‘씨발놈’으로 기록한 건 적어도 이들 혈육만큼은 망각의 늪에서 벗어났음을 말하는 것 아니겠나.
 
‘망각의 늪’과 ‘ㅅㅂㄴ’
 
지난 7일 ‘딸들의 아리랑’의 저자 김혜원씨가 본지 사무실을 방문했다. 일흔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다. 한 일이 많아서 그런지 말도 거침이 없다. 이력이 궁금해서 책을 들춰보니 35년 전남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뒤 수도여고 영어교사. 사퇴 및 주부생활. 교도소 교화위원 30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위안부 연구 참여 뒤 20년 위안부 운동. 소설·논픽션 입상경력도 있다. 저서도 ‘...아리랑’ 외 2권 있다.
 
김씨는 ‘위안부 운동’의 대모이자 선배인 윤정옥씨의 삶을 반추하며 저술을 시작했다. ‘윤정옥이 뿌린 씨앗’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일본이 전쟁을 위해 ‘총동원령’을 내렸던 1943년. 윤씨를 포함한 이화여전 학생들은 ‘푸른 문서’에 자필서명을 했다. 낌새를 알아차린 윤씨 부친의 강권으로 ‘학도병과 결혼’ 사유를 내고 자퇴를 했다. 일본이 위안부를 강제로 모아 전선으로 보내던 때다. 당시 자퇴를 하지 않은 학생들은 전국에 파견돼 ‘군국여성지도자’ 교육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씨는 자신이 ‘위안부 운동’에 직접 참여한 계기가 됐던 88년 2월 15일간의 일본연구여행을 언급했다. 윤정옥, 김신실과 함께 답사에 참여했는데 임종국씨가 쓴 ‘정신대’를 읽었다는 이유로 그리됐다는 것이었다. 셋은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열도를 뒤지며 생존 피해자, 목격자, 연구자, 시민단체 관계자를 만나고 다녔다. 그 때 가진 아픔과 분노는 고스란히 정대협 운동으로 열매를 맺었다.
 
이 책은 위안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경위인 윤정옥씨와 만남, 그리고 15일간의 일본열도 탐사, 정대협의 출범과 17년간 이어오는 수요시위, 일본의 기만적 ‘국민기금’, 국제사회와 UN인권위의 위안부 활동, ‘군대 위안부’ 저자 김일면씨 이야기,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인 배봉기·김경순·윤두리·강덕경·문옥주씨의 삶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위안부 운동의 과제도 언급하고 있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건립 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 주차장 옆 매점자리에 170평 규모의 부지는 확보(서울시 제공키로)된 상태다. 후대에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성노예 범죄를 제대로 알리려는 것이다. 일본군이 2차 대전 중 위안소를 뒀던 지역(나라)을 지도로 그려 부록으로 올렸다. 정대협 역사일지와 함께. 저자 김씨는 인세를 건립기금에 사용키로 했다. 허원미디어 출판. 값 9500원. 전화 02-766-9273. 다음은 김씨와 일문일답.
 
◇김혜원씨와 일문일답
 
▲ 김혜원씨.     © 인터넷저널
 -위안부 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뭐죠?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활동을 하고 있던 88년이었습니다. 윤정옥, 김신실이 2월 12일부터 보름간 정신대 연구를 위한 일본답사를 한다고 그랬습니다. 난 임종국씨가 펴낸 ‘정신대’라는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그들과 함께하게 됐죠. 그 15일 셋은 일본 열도를 다니며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파했습니다. 분노가 끓어올랐죠. 정대협의 동력이 된 겁니다.
 
그리고 정대협이 탄생했습니다. 90년 아키히토 일왕 초청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는데 정신대에 동원된 조선여성 명단을 받아오라고 요청하는 캠페인을 벌이며 여성단체들이 뜻을 모아 결성식을 가진 거죠. 정신대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여서 곧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임시기구 성격으로 창립된 거죠. 이름도 ‘문제’, ‘대책협의’ 등의 단어를 썼고요. 한데 이렇게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지금도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상태이고요.
 
-88년 일본 답사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오키나와에서 배봉기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일본사회에서 커밍아웃을 해 위안부 피해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어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한데 3번이나 문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았더니 겨우 문틈으로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선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느냐”며 “나 좀 내버려 둬라”고 그러더군요. 그게 끝이었습니다.
 
한 일본인의 증언도 생생합니다. 당시 70대였으니 지금쯤은 돌아가셨을 겁니다. 오키나와 전쟁당시 일본군에게 집을 빼앗겼던 분입니다. 군은 그 집을 위안소로 사용했고요. 그는 헛간에서 살며 위안소를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7명의 조선인 위안부의 삶을 낱낱이 증언해줬고요. 교포 재야사학자인 김일면씨(작고)도 큰 도움을 줬습니다. 이런 모든 자료를 모아 정대협을 시작했습니다.
 
“나 좀 내버려 둬...”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인 여자 피해자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중일전쟁 초기에는 일본 직업여성으로 위안소를 운영했습니다. 직업여성이다 보니 성병이 말썽이었죠. 그래서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은 현지에서 위안부를 조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탄로나면 곤란하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식민지에서 데려오는 게 안전하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조선과 대만에서 성병 위험이 없는 처녀들을 강제로 끌어간 겁니다. ‘돈벌이’·‘취직’이라고 속여 데려간 사실을 가지고 강제가 아니라고 우기는데 군·경찰·행정조직이 총동원한 사기인데 ‘자발적’이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직까지는 기록이 없으니 위안부 규모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죠. 다만 김일면씨가 쓴 ‘군대 위안부’(일본어판, 나중에 임종국씨가 번역해 한글로 나옴)에 따르면, 1945년 종전 당시 일본군 규모는 7백만명 쯤 됩니다. ‘니구이치’라는 말이 일본 군 안에선 돌았고요. ‘29 대 1’이라는 뜻인데 병사 29명 당 1명의 위안부를 동원했다는 거죠. 위안부를 20~30만명 정도 동원했음을 의미합니다. 중국에 20만명의 위안부 피해자가 있다고 하니 절반정도 인정하면 15만~20만명을 조선,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에서 동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구자들은 조선 여성 피해자가 10만~15만명 쯤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군의 증언에 따르면, 위안부는 징용자와 다르답니다. 위안부는 천왕을 위해 싸우는 일본군 병사에게 천왕이 하사한 선물이었다는 거죠. 위안소는 일본군이 주둔하는 덴 어디든 세워졌습니다. 한국에도 있었고, 일본에도 있었죠. 심지어 동경에 있는 천왕과 정부 요직이 대피할 지하시설인 ‘마쓰시로 본영’에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전쟁터인 남아시아, 중국 등지에 있었고요.
 
‘니구이치’ 셈으로 10만명
  
© 인터넷저널
-‘민족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있던데 무슨 의미지요?
 
△일본 탐사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인 88년 2월 12일이 마침 아들 중학교 졸업식이었습니다. 전 딸만 셋 낳아 오매불망 기다려 아들을 막내로 얻었습니다. 남편이 12남매 중 맏이인데 대를 이을 아들이니 금지옥엽 키웠을 테고. 고민 많이 했지요. 아들에게 “네 엄마로 만족할까, 아님 민족의 엄마로 살까”고 물어봤죠.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일본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간 활동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90년 정대협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윤정옥씨가 회장을 맡고 제가 서기, 김신실이 회계를 맡았습니다. 그 뒤 정대협 안에서 ‘할머니 복지위’ 초대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할머니들을 정기적으로 찾아뵙고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자리죠. 상근직이 아닌데도 이 일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바빴죠. 사료관 건립준비위원장을 맡았고요. 목표가 좀 커져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됐고 건립기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총 53억원 중 4억원 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위원장을 맡았고요.
 
-애로사항이 있다면...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나오면 불같이 끓어오르다가도 금방 잊어버린 다는 겁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과거에 매달려 뭐하냐는 보수 언론의 비판도 받았죠. 정치경제적 보수화도 문젭니다. 경제논리에 밀리는 거죠. 분노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 시민의식도 문제고요. 누군가 해주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죠. 역사를 바로잡아야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인권이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일본과 친구도 될 수 있고요.
 
‘민족의 어머니’가 되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전 위안부 운동 1세대로 나름의 노력을 했습니다. 이젠 2세대들이 더 결집하고 국제연대를 확대해가야죠. 1세대 운동역사를 기록해야 2세대들이 운동을 이해하고 더 잘할 수 있겠다 싶었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어머니의 말투로 책을 썼습니다.
 
-미 하원이 ‘위안부 사과’ 권고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는데...
 
△미국에서 한국동포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대협 등 한국의 인권운동이 노력한 결과이고요. 유엔인권소위를 통해 국제적 압력을 가한 노력도 반영된 겁니다. 또 하나 일본의 대국화와 우향우에 대한 미국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중국이 최근 난징대학살 등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대대적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기도 해 미국으로서는 이에 대응할 필요도 있었을 겁니다.
 
이 결의안을 제안한 혼다 의원은 결의안이 통과되고 “이게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고 했다고 그럽니다. 저희도 “기초는 다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가시적 건물을 짓는 일을 해야 할 때죠. 아베 총리가 언급한 ‘아름다운 일본’을 위해서라도 일본 정부는 과거의 범죄를 매듭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후손들이 떳떳하게 살지 않겠어요?
 
우리 역시 일본은 가까운 이웃입니다. 일본 좋아해야죠. 그러려면 과거사 정리가 먼저입니다. 공식적으로 사과를 받아야죠. 만족할 만큼은 안되더라도 납득할 정도의 사과와 배상은 해야합니다.
 
 
© 인터넷저널
내가 책을 내고 TV인터뷰 한 걸 보고서 손주 녀석이 “전 일본 좋은데...”라고 하더군요. 좋은 일본이 되려면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줬죠. 범죄를 숨기고 잘못한 적이 없다는 사람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냐고요.
 
“이게 끝이 아니고 시작”
 
-위안부 범죄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을 정리해주신다면?
 
△전쟁은 성범죄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르완다가 그렇고 보스니아가 그렇죠. 민족청소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있죠. 전쟁이 나면 여성을 성노리개로 취급한다는 겁니다. 위안소라는 조직적 성범죄도 그 중 하나이고요.
 
또 하나는 성범죄 그자체입니다. 권력과 돈은 여성을 상품화하고 대상화하죠. 갈수록 매매춘이 흥행하고 있고요.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여성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는 야만의 사회가 돼가고 있는 거죠. 그러니 여성들이 나서서 매매춘을 근절시키도록 노력해야죠. 남성들도 이런 성범죄의 심각성을 깨달아주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부탁이 하나 있는데 훌륭한 영화인이 나와 위안부 관련 대중적 영화를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화려한 휴가’가 잊혀 가는 27년전의 아픔을 되새기듯이요. 그리고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전쟁범죄 기록보관소는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 중국, 한국 등 동남아 곳곳에 그 박물관을 만들어 일본이 한 전쟁범죄를 분명하게 되새겨야합니다.
 
/인터넷저널(http://www.injournal.net/sub_read.html?uid=2697&section=section10) 제공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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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8/09 [17: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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