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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매드슨 ‘너희가 전설을 아느냐!’
[비나리의 초록공명] <나는 전설이다> 냉전 이후 수많은 작품의 원형
 
우석훈   기사입력  2007/03/10 [12:24]
몰리에르 희곡선을 사러 교보에 나갔다가 다 절판되어서 포기했다. 예전에 불어로 사두었던게 어디 있기는 할텐데... 
 
얼마 전부터 오페라 <리골레또>를 제대로 보고 싶어서 DVD 를 사려고 했다가, 파바로티가 출연한 것밖에 없어서 못산 이후로 괜히 ‘프로토콜’이라고 부르는 고전을 보고 싶은 경향이 생겨서, 계속 고전 소설만 읽고 있다. 
 
꽤 전부터 ‘B급 호러 영화’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는데, 잘 모르면서 설쳤다가는 진짜 호러무비 전문가들에게 지나가다 칼 맞을 것 같아서 몸을 숨기는 중이다. 5월 달 정도에 쓰려고 하는 책이 마침 20세기 세계경제사에 관한 얘기다. 기회는 찬스라고, 이 책이 하고 싶었던 영화 얘기와 패션 얘기들을 담아낼 절호의 기회다. 오드리 햅번에 대한 헤어스타일과 크리스찬 디오르의 등장, 그리고 슈퍼모델의 등장까지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10년 동안 꾹 참고 있던 얘기들을 신나게 할 수 있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왜 공포소설을 다시 읽어도 되는지 핑게거리를 드디어 찾았다.  

오늘은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책을 몰리에르 대신 샀고, 들어오자마자 잽싸게 읽었다. 
 
역시 원형에 해당하는 책들은 시기와 상관없이 진한 감동으로... 역시 나는 진성 클래식 보다는 이런 B급 소설들이 잘 맞는다. 라흐마니노프의 서정성 높은 곡들보다는 오스카 피터슨의 명랑 가득한 스윙풍 재즈를 훨씬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1. 리처드 매드슨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표지. 이 소설은 1950년대 냉전 이후 수많은 작품의 원형과 영감을 제시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살아있는 사람이고, 또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시드니 샐던이 죽은 다음으로는 - 난 샐던 소설은 별로다 - 가장 최고의 베스트 셀러 작가로 알려진 스테판 킹이 가장 존경한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스테판 킹 역시 별로다. 훨씬 극우파 소설가지만, 잭 라이언을 만들어낸 톰 클랜시를 훨씬 좋아한다. (아마 내가 좌파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톰 클랜시처럼 살고 싶었을 가능성이 무척 높아 보인다.)  

스테판 킹과 리처드 매드슨의 관계는 오히려 스테판 쪽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 같지만, 조지 로메로와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나한테는 조지 로메로가 오히려 생각의 원형에 해당하는데, 그의 스승격인 리처드 매드슨은... 신성한 존재되겠다. 
 
조지 로메로는 <스타워즈>의 감독이자 제작자인 조지 루카스의 삶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68세대의 또 다른 길이고... (참고로 90년대 한국 영화를 짊어진다고 했던 그 헐리우드 키드들이 조지 루카스를 존경한다고 할 때부터, 그들이 어떤 짓을 할지 내가 알아봤다. 조지 로메로를 존경한다는 넘은 내가 들은 바로는 한 넘도 없었다.) 
 
내가 봤던 모든 영화와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무서웠던 장면은 환상특급에서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비행기 위에 나타난 날개달린 괴물편이었다. 정말 무서웠고, 특히 마지막 반전에 “정말 무서운 얘기 해줄까?”라는 대사는 무의식 속에서도 내 생각의 원형을 형성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늘 나는 무서운 얘기를 하고, 그리고도 또 “정말 무서운 얘기 해줄까?”라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을 갖는다. 가장 비슷한 상황이 몰리에르 연극이 그렇기는 하다.  

이 환상특급 시리즈의 작가 역시 리처드 매드슨이다. 이야기꾼이라고 한다면 세익스피어나 몰리에르 아니면 카프카 같은 이야기꾼은 못되더라도 상당히 뛰어난 이야기꾼 중의 한 명이 바로 리처드 매드슨이다. 조지 로메로의 70년대 좀비 시리즈는 50년대에 나온 <나는 전설이다>의 얘기를 좀비 버전으로 확장시킨 셈이다. 
 
2. 벰파이어 시리즈와 좀비 시리즈의 차이  

벰파이어든 좀비든 아니면 아내에 며느리까지 줄줄이 가족사로 번져나간 프랑캔슈타인 시리즈든 현대 사회를 만나게 된 것은 콜럼비아 영화사의 호러 시리즈에서 시작된 일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원작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혹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스위스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아니면 그 원작의 부제가 Modern Prometheus였다는 사실을... 그런 건 필요없다. 이 시리즈는 콜럼비아사의 호러 시리즈에서 부활했다는 얘기만으로 충분하다. 
 
이 모든 것들은 1929년의 대공황이 끌어들인 이야기들이다. 문학적으로 보자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나 채플린 영화들과 다 궤를 같이하는 영화들이다. 대공황을 맞으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아니면 그 무서움에 대한 대중적 발산이라도 하자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고, 패션의 눈으로 보면 미니스커트와 다 궤를 같이 하는 예술들이다. 
 
국적으로 따지자면 벰파이어는 루마니아의 동유럽, 프랑켄슈타인은 스위스, 그리고 좀비는 서아프리카 혹은 그들이 나중에 정착한 중남미를 국적으로 하는 괴물들이다.  

얘기의 기원만 따지자면 드라큐라 백작과 프랑캔슈타인은 자본주의의 정점에 선 영국인들이 무서워한 괴물들이고, 좀비는 흑인 노예를 부렸던 미국인들이 두려워한 괴물들이다. 
 
구조적으로는 드라큐라는 자본가들에게 발생하는 질병이고, 좀비는 민중들에게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래서 드라큐라는 사유가 무섭고, 좀비는 행동이 무섭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과 조금 궤를 달리 하는 본격적인 맨하탄형 괴물도 있기는 하다. 영화 <로즈마리의 아기>에 로즈마리로 나온 그 여자가 바로 <앨리스>의 주인공이자, 우디 알렌과 치정사건에 얽힌 '순희 김'과의 사건으로 상처 받은 그 미아 패로우이다. 이 영화가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이 광신도들이 실제 감독의 만삭이었던 부인을 죽이고 말았다는 현실 때문이다. 
 
조지 로메로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3이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었던 좀비 2편에서 B급 호러물은 본격적으로 경제학과 만나게 된다. 
 
나쁜 것은 착취하는 자본가, 즉 드라큐라가 아니라, 쇼핑몰에서 물건 사면서 좋아하는 너네 노동귀족들이야...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마초에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을 70년대 68세대들은 좀비라고 불렀다. 너네는 민중 아냐... 좀비일 뿐이야. 
 
영국의 클렌베리스가 CNN을 보면서 맥주 마시고 좋아하는 전쟁광들을 노래했던 ‘좀비’도 이렇게 연결된다. 
 
순 우리말로 표현하면 조선일보 보면서 이라크에 공수부대 보내라고 했던 사람들을 좀비라고 불렀고, 그들이 그럴 줄 알고 “우리는 밑지는 장사는 안했다”고 하는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을 벰파이어라고 부르는 것이 대충 70년대에서 80년대, 미국의 B급 호러물 지지자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다. 
 
“누가 케네디를 죽였는가?” 
 

이 질문은 종종 B급 영화에서 무한 반복되며 계속되는 질문이다. 좀비야, 벰파이어야? 우리가 대충 미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세계적 전쟁을 일삼는다고 부르는 그 전쟁광들의 한 가운데에서 사회적 질문을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들은 좀비와 벰파이어 같은 상징물들을 끌어들였다.  

<로즈매리의 아기>를 찍었던 젊은 폴란드 감독의 부인을 살해했던 그 시기에, 누가 케네디를 죽였는가 아니면 누가 월남전에 파병했는가 혹은 원자폭탄은 누가 양산하라고 했는가와 같은 질문은 목 걸고 해야 하는 너무 위험한 질문이었다. 
 
3. 좀비에서 에일리언으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순진한 방법과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 방법이다.  

순진한 방법으로 이 책을 읽으면 카프카의 <변신>과 비슷한 실존주의 소설이 된다. 급격하게 변화하며 움직여나가는 세상에서 아직도 구 세대의 가치관을 유지하려고 했던 사람이 통조림, 냉동음식, 그리고 냉장고와 같은 물건 속에서 숨막혀했던 개인이라는 눈으로 보면 소설은 하나의 흐름을 관통하며 읽을 수 있다. 그가 유일하게 찬미한 것은 LP를 통해서 듣게 되는 음악들, 흡혈귀들이 벽을 긁으며 집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그 소음들을 차단하고자 하는 불안한 중산층의 유일한 희망 그리고 그에게 이동성과 속도를 주었던 ‘자동차’라는 발명품이다. 
 
소설은 쇤베르그에서 시작해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20여개의 음악을 끊임없이 소화하며 대량생산의 포디즘에서 그래도 좋아진 것은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캔에 들은 음식과 냉동된 콩을 먹으면서 “정말 식욕이 없다”라고 반복하면서 말 하다가도 엔진음을 들으면 140킬로로 골목길을 질주하던 순간의 마음과 그 쾌감을 정말 꾸밈없이 묘사한다. 이 소설이 50년대 중산층 남자의 강박관념으로 이해되는 것은 이런 문화적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이건 순진하게 이 소설을 읽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비슷해 보이는 B급 호러 영화에서 이러한 장치들은 원작자의 세계관을 읽을 때 중요한 단서가 된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역시 B급 영화 중에서 <이온>이나 <울트라 바이올렛>으로 이어지는 파시즘 시리즈의 원형이 된 <이퀼리브리엄>의 경우가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에이츠의 시와 LP를 통해서 들려오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시대가 이미 리처드 매디슨의 시대와 50년이 지났기 때문에 음악이나 시와 같은 소도구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건 CNN과 MTV에 대한 반감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주몽이나 연개소문에 대한 반감과 마찬가지인 상징이다.  

에이츠의 시와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CNN 전쟁광의 주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다니, 순진하기도 하셔라... 막걸리를 마시면 농촌을 사랑한다는 박정희의 주술과 전적으로 같은 것이고, 빨간 노트북을 들고 나와서 “나 컴 좀 알아”라고 하는 노무현의 상징조작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어머, 하이마트에서 샀나봐! (그 이후로 하이마트 광고는 컴에 붉은 색을 쓰기 시작한다...) 
 
순진하지 않은 방식으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읽는다면, 이건 완전히 반공 소설이다. 이건 50년대에서 60년대를 뒤엎은, 상징으로 말하자면 존 웨인의 <그린 베레>와 완전히 궤를 같이 하는 소설로 읽힐 수 있다.  

대체적으로 50년대의 최초의 괴물영화에서 나오는 일련의 모티브들은 “공산주의는 바이러스”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아주 오랫동안 주인공 네빌이 세상을 뒤엎은 이 흡혈귀들의 작동원리를 탐사하는 - 페이지로 세어보니까 전체의 1/3 정도를 이걸 밝히는데 사용했다 - 과정은 그 당시의 냉전 상황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항하는 자본주의 블록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철학적 접근과 거의 일치한다. 
 
언젠가 공산주의 사상이 내 주위를 모두 뒤엎어, 나의 아내와 나의 자식들을 내 손으로 쏘아죽일지도 모르는 일이 생긴다... 
 
50년대 예술과 소설에는 이런 무서움이 아주 많이 등장한다. 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서 007 시리즈에 공산당 아닌 적들이 등장하는 것들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원형에 해당하는 소설이라서 해석은 그 어느 쪽으로 다 가능하다. 
 
조지 로메로는 이 원형을 들고, “아니야, 전쟁은 하면 안돼”라고 외쳤던 사람이다. 
 
이 원형이 다른 식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역시 또 다른 B급 호러물의 원형이 된 “The Thing”이라는 영화이다. 
 
4. The Thing과 에일리언에 대한 다른 해석들 
 
1952년 버전의 더싱(The Thing)은 1982년에 리메이크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두 개 다 무섭다. 흑백 영화를 즐겁게 감상할 정도의 상상력이 있다면 에일리언 보다 훨씬 무섭다. 
 
더 싱은 정말 단순하게 공산주의는 싫어요... 를 외치는 영화이다. 이런 계열의 원형의 영화와 소설들은 훨씬 많지만, 하여간 이런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바이러스가 뇌에 일단 들어가면 공산주의가 된다... 이런 설정이다. 실제로 영화 <레드 옥터버>까지 이어지는, 동구의 개방을 실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의 많은 영화들은 이런 반공영화들이다. 
 
조지 로메로가 대단하게 지금까지 평가 받는 것은 반공영화들에 불과한 괴물 영화들에 “보안관”과 같은 장치를 집어넣어서, 갑자기 배경을 공산주의 간첩들과 싸우는 동베를린이나 시베리아에서 처들어오는 북극과 같은 곳에서 펼쳐지는 단순한 반공 영화들에서, 아니야, 이건 월남전이야기야... 라고 바꾸었다는 점에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새벽>이 영화사와 예술사에 남게 된 것은 이 하나의 반전 때문이다. 아냐, 이 좀비는 바로 <그린 베레>의 존 웨인이야... 
 
그가 한 번 더 반전을 한 것은 76년에, “아니야, 이 좀비는 맨하탄 백화점의 바로 너네들이야”라고 말했던 시점이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너네끼리 사니까 좋아요라고 얘기한 타워 팰리스, 너네가 바로 좀비야”라는, 정말 골 아픈 질문되겠다. 
 
더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악마는 프라다” 외치고 청담동 퓨전 레스토랑에서 해방을 느낀다는 너네들, 니가 바로 좀비야... (조지 로메로가 이렇게 외치고 있을 때 조지 루카스는 “아니, 내가 니 애비야”를 영화 <스타워즈>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대충 이렇게 해서 ‘바이러스’ 논쟁은 체계 논쟁이며, 삶의 질 논쟁으로 대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이런 괴물 논쟁을 바다 건너편에서 즐기는 동안에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성”을 통한 자본주의 해석을 하고 있었고, 그의 제자인 보드리아르는 “대중 소비의 사회‘라는 책으로 단단히 철학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 논쟁이 결정판에서 폭발한 것이 1979년 그 유명한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이었다. 
 
공산주의? 그것인 바이러스가 아니라 에일리언이라는 거야. 이러게 읽어도 된다. 그런데 여기에 얼토당또 않게 시고니 위버라는 여전사를 넣으면서, 해병대, 이 마초들, 너네는 세상을 구하지 못해...  

에일리언 시리즈는 그래서 오랫동안 격론에 휩싸였다. 이게 반전 영화야, 아니면 반공 영화야, 아니면 여성주의 영화야?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이 영화를 단순 공포영화로 분류했다. 
 
그 뒤에 나온 람보 시리즈는 “아냐, 고민 하지마”, M60이 모든 것을 해결해줘라고 하면서 세상을 이어나갔지만, 리들리 스콧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어려움으로 남았다. 
 
요즘의 표준 해석은 에일리언 1편은 반공 영화일 뿐이다가 주류이다. 왜냐고? 1편의 맨 마지막에 결국 여왕 에일리언을 죽이는 비전의 카드가 바로 핵폭탄이기 때문이다. 핵폭탄, 그것은 인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장치일지도 모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렇게 좀비 논쟁에서 도망가 버렸다. (<글래디에이터>의 리들리 스콧, 정말 좃이다!) 
 
영화 <아마겟돈>에서도 이 해석은 유효하다. 씨벌, 지구를 향해서 돌진하는 혜성도 날려서 지구를 구하는게 바로 핵폭탄이란 말이야... 
 
5. 원형에 대한 찬미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라는 소설은 반자본주의 소설로, 반공주의 소설로, 혹은 휴머니즘 소설로 - “사람은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 - 혹은 극단적인 생태주의 소설 그 어느 편으로도 읽힐 수 있다. 심지어 해석에 따라서는 ‘에코 파시즘’에 대한 찬미로도 읽을 수 있다.
 
소설에서는 틈틈히 "나는 이 여인을 강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마초주의 시각이 나타난다. 뒤집으면 "너네가 하는 일은 전부 강간이야"라고 볼 수 있다. 50년대에 막 2차 대전을 승전으로 이끈 군인들이 힘쓰던 사회 미국에서 이런 표현을 했다니... 놀랍다. 조금 더 나가면 다원주의이다. 아니, 유태인과 아랍인 흡혈귀가 십자가를 보고 무서워할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코란을 봐야 무서워할텐데... 마늘은 또 도대체 뭐람? 왜 흡혈귀는 마늘을 무서워하는거야, 양파가 아니고... 양파는 사방에 많은데 하필 구하기 어려운 마늘일게 뭐람... 
 
그 어느 편이면 어떻겠느냐... 일단 원저자의 손을 떠난 예술은 사회적 진화를 하는 것이고, 탈고하는 순간에 저자는 더 이상 자기 작품에 대한 해석은 물론 참견의 권리도 사라지는데 말이다.  

양희은이 어느 날 작심한듯 <아침 이슬>은 데모하라고 만든 노래가 아니라고 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청와대에 있던, 혹은 거기에서 나와서 공기업에 감사로 간 그 '꼴통'들은 골프장에서도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자기들끼리 어깨 동무 하는데, 누가 그들에게 아침이슬을 거기에서 그런 의미로 부르지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청와대 그 '꼴통'들이 원 포인트 개헌이라는 걸 올려놓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친다지만, 그 호헌철폐가 전두환을 겨냥했던 거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무슨 소용있겠나, 요즘 세상에...  

심지어는 며칠 전 대통령이 참모들과 새우깡 한 봉지 들고 깡소주 마시면서 세상 한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새우깡에 마시는 깡소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암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원형을 보는 것은 그 뒤에 진화된 수 십년 동안의 예술들이 어떻게 진화하게 되었는가, 그 첫 번째 진화점에 서보는 의미가 있다.  

리처드 매드슨은 아직 살아있지만, 그에게는 그의 흡혈귀 시리즈와 좀비 시리즈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뭐였다는 말을 할 권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여간 50년대에 나왔던 이 소설 한 편이 그후 냉전 시대에 수없는 영화와 소설 그리고 각종 만화로 변주되었고, 심지어는 일본에서 사무라이 시대로 돌아간 자위대 부대의 얘기에 관한 영화가 나온 것도 본 적이 있다. 모두 그 원형은 이 소설 한 편이다. 
 

기왕 소설 한 편을 볼 것이라면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변이하고 변형된 책이 아니라, 이런 ‘원형’에 해당하는 것을 보기를 권해주고 싶다. 악마, 프라다 같은 책을 살 돈이 있다면, 몰리에르를 보고, 찰스 디킨즈의 <데이빗 코퍼필드> 같은 원형들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세계를 휩쓴 마술사 데이빗 코버필드라는 이름도 바로 이 소설에서 따 온 이름이다. 이중번역 논란에 휩쓸리는 책들이나 다른 사람이 써준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증거부족으로 아무도 시비 붙지 못하는 그런 야릇한 베스트셀러들이 아니라... 
 
정말 원형을 보고 한 번쯤 그 이후의 진화가 시작된 초입에 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반공주의자가 되든, 민족주의자가 되든, 아니면 더 처절한 극우파가 되든,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 원형에 서서 진화의 첫 단계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역사의 심오함 같은데 한 번쯤 여러분들이 서볼 수 있기를 권하고 싶다.
 
ps. 영화 <콘스탄틴>의 감독 프란시스 로렌스가 지금 이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중이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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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3/10 [12: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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