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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과 신학자들의 빗나간 구약논쟁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종교는 사람을 얽매는 것 아닌 행복 위해 존재
 
류상태   기사입력  2007/02/26 [14:30]
도올 논쟁에 대하여- 구약, 차라리 폐기하는 게 낫다

노자와 유교 강의에서 여러 차례 한국교회를 비판했던 도올 선생이 이번에는 요한복음을 강의하면서 또 한차례 한국 기독교계를 흔들고 있다. 그는 “구약을 믿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성황당을 믿는 것과 다름없다”는 등의 공격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구약의 한계를 지적하다가, 보수적인 교계가 반발하자 아예 ‘구약 폐기론’을 들고 나왔다.

도올은 구약이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라며, “예수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된 만큼 구약은 당연히 효력이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기총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는, “그것은 ‘성서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얘기이며, 성서는 신앙의 눈으로 봐야지, 과학의 눈으로 보면 열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태의 와중에서 도올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예 한 술 더 떠서,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정통 기독교인’이며, 심지어는 ‘진짜 보수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다.

사태가 흑백으로 갈리자 진보신학의 거두라 할 수 있는 김경재 교수가 나섰다. “구약폐기론은 잘못이지만, 도올이 전하고자 하는 뜻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교수가 구약폐기론에 반대하는 근거는 “구약을 제거해버리면 도올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평등과 존엄성 등을 담은 헤브라이즘이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자답게 “구약과 신약은 서로를 비춰주는 빛이며, 기독교가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는데, 그 뿌리를 제거해버리면 기독교가 천박해진다”고 했다.

나는 도올과 그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그들의 주장보다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말하고 있나?”에 관심이 간다.
 
도올은 기독교인인가

우선 도올의 의도부터 짚어보고 싶다. 그의 주장을 순진하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과거 행적에 비해 너무나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으로 돌변했다. 내가 “돌변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과거에는 기독교 신념체계에 대한 그의 개인적 신앙고백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이 ‘열등한 종교’를 오래 전에 졸업(?)하고 종교에 대한 매임이 없이 자유로운 영적 여행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도올만큼 종교 전반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평을 듣는 그가 스스로 ‘기독교인’을 넘어 ‘정통 기독교인’, 심지어는 ‘진짜 보수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고 은혜를 받는 진보기독교인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나는 기독교인이며, 힌두교인이고, 동시에 무슬림이다.”라고 말했던 간디의 고백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금 한국 교계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도올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도 환갑이 다됐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비판해봤지만 효과가 없어서 이제는 기독교가 정도로 가게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기독교단체들은 나와 협조하는 게 좋다. 나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를 부흥시키는 게 현명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새겨들으면, 그는 전략적으로 기독교를 돕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직한 대화로는 도저히 통하지 않는 이 ‘무식하고 형편없는 종교’를 좀 구원해 볼까 하는 애타는 심정으로 말이다.

과학, 이성과 충돌하는 신앙은 사이비

한기총 사람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할 말을 잃는다. “성서는 신앙의 눈으로 봐야지, 과학의 눈으로 보면 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신앙이 과학을 초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초과학적, 초이성적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어야지, 비과학적, 비이성적인 것을 수용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과학과 이성을 부정하는 신앙은 ‘사람 잡는 신앙’일 뿐임을 기독교 역사는 여러 차례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성서를 ‘사람의 기록’으로는 보지 않고 ‘하늘의 계시’로만 보는데 있다. 성서의 모든 기록을 ‘하늘의 계시’라고 믿게 되면, ‘사람의 이성’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원시 유대교 혹은 기독교 공동체가 갖는 어쩔 수없는 ‘그들의 한계’는, 때로는 비인간적인 만행으로, 때로는 말도 안되는 모순과 독선으로 성서에 기록되었다. 성서가 ‘사람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만행과 모순, 독선을 ‘하늘의 계시’로 믿는다면, 비판도 할 수 없고 그냥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종교는 ‘아편’이 된다.

이런 신앙이 자라면 이성이 마비되고 판단력이 사라진다.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성서의 절대성’을 들먹이는 사람들을 보면, 판단력이 마비된 바보들이거나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성서에는 ‘하늘의 계시’도 담겨있고 ‘사람의 한계’도 담겨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없는 비상식, 비이성, 비과학적인 원시신앙까지 온통 ‘하늘의 계시’라니...

솔직히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은 김경재 교수님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싶다. 그 분은 나에게 큰 영향을 준 다원주의 신학의 대표주자 가운데 한 분이다. 지금도 그 분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지만, 요즘은 그의 강의를 듣거나 글을 대할 때마다, 자꾸 몸을 사리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구약을 제거해버리면 도올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평등과 존엄성 등을 담은 헤브라이즘이 빠져버린다”는 그의 지적이나 “구약과 신약은 서로를 비춰주는 빛이며, 기독교의 뿌리가 구약”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것이 없다. 그러나 성서가 갖는 한계를 보다 분명하고 명쾌하게 지적하지 않는, 혹은 지적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언젠가 김교수님은 “이제는 성서를 여러 고전 가운데 하나로 보자.”고 말씀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 때가 김교수님이 가장 솔직했던 때가 아닐까. 그 말씀은 성서의 ‘절대성’을 이제는 내려놓자는 말이며, 또한 성서를 철저히 ‘수단화’하자는 말이었다고 나는 이해했다. 그런 분이 도올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 폐기론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기 전에 그의 의도를 먼저 깊이 헤아리고, 성서 전반에 대한 한국 교회의 잘못을 질타하는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비록 김경재 교수 뿐 아니라 오늘날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에게서 느껴지는 한계는, 그들은 자기 밥통을 내려놓을 각오로 정직하게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먹물들의 한계’라고나 할까.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을 쓴 돈 큐핏이 지적한 대로, 오늘날 진보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면서도 “내 때에는 참으소서!”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차라리, 몇 년 전 한 개그맨의 입담에 담긴 “약간만 비겁해지면 인생이 행복해진다.”는 조소가 인간세상의 실상을 꿰뚫은 명언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진정 성서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적 여행을 즐기는 사람, 즉 진정 예수를 닮은 사람은, 자신이야말로 ‘진짜 보수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도올이 아닐까.

신약은 문제가 없는가

구약이 문제가 된다면 신약은 어떨까? 구약이라고 ‘하늘의 계시’가 전혀 담기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기록’이기에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의 한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면,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날 “문자가 아닌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면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폐기하자는 것이 도올의 주장이라고 생각되지만), 신약 역시 2천년 전 히브리-헬라 사람들이 가진 ‘인식의 한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신약이 갖는 독선과 배타는 구약보다 더욱 무섭다. 구약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사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 중에는 이방인을 배제하려는 종교지도자들을 치열하게 공격하고 사해동포주의를 외친 선각자도 많다), 신약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독선과 배타의 횡포는 더욱 크다. 그러나 구약이건 신약이건 성서는 ‘책’일 뿐이다. 가려 읽으면 된다. ‘하늘의 계시’라고 할 수 있는 빼어난 가르침은 인류와 함께 나누고, ‘인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독선과 배타에 대해서는 ‘그들의 인식이 갖는 한계’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대들은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대해, 그대들의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가? 여전히 마음 깊이 존경하는 선생님께 결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다. 내가 잘못 보는 것이라면 죄송한 일이지만, ‘한국 기독교의 지성’으로, 후학들에게 길을 제시했던 노학자가 교계의 눈치를 살피느라 할 말을 못한다면 슬픈 일이다.

“칼이 유익하냐 무익하냐?”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칼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가치중립적인 ‘물건’일 뿐이다. 칼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칼이 주로 사람을 해치는데 사용된다면, 다소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낫다. 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구약 뿐 아니라 신약도, 예수도, 하나님마저도 철저히 종교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이런 실정이라면, 모두 폐기처분하는 게 차라리 옳지 않겠는가? 종교가 사람을 얽어매서는 안된다. 종교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가? 비록 그가 그런 발칙한 말을 가리지 않고 뱉어내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억울하게 처형되었지만.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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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2/26 [14: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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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탈 2007/03/04 [09:25] 수정 | 삭제
  • 요즈음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트랜스지방의 유해성 논란을 보며 종교논란과 비슷하지 않은가를 생각합니다.
    유해성을 모를 때는 맛잇게 먹엇는데 그 유해성이 밝혀진 후에 많은 이들이 먹거리에 고민을 하게 됩니다.
    고민을 않하면 사람이 아니겠지요.
    아직 그 정보를 접하지 않은 사람은 심적 부담없이 계속 하겠지만 일단 알고 나면 계속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종교는 정신계의 트랜스지방이라고 보는 것이 인간의 공허남이나 허탈감이나 소외감을 위로 한답시고 들어온 종교가 서서히 그 모습이 변형되어 인간을 종교의노예화 하여 또 다른 늪으로 끌고 들어 갑니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이끌어 주기 보다는 종교의 노얘로 전락시켜 온갖 만행을 정당화 시키는 야만인으로 만드는 결과를 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종교의 폐해를 지구 곳곳에서 목도하고 잇습니다.
    고로 종교는 인류가 버려야할 트랜스 지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