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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낭자’ 우이, 고이즈미 무릎꿇린 사연
[란보라의 중국속으로] 경제력으로 일본 궁지에, 한국 ‘어부지리’ 노려야
 
란보라   기사입력  2005/05/28 [07:52]
[뉴스로 보는 중국인들의 심성_31] 중국의 국력, 일본 압박 들어가
 
중일간의 마찰이 민간으로부터 드디어 외교차원으로 올라갔고, 중일간의 외교마찰로 인한 언론의 가세, 일본의 조어도(센카쿠열도), 대만문제, 신사참배문제, 교과서 문제와 동해유전 문제 등으로 인한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로 치닫고 있다. 
 
▲ 중국 사이버 공간에서는 일본 야스꾸니 신사에 합사된 2차대전 당시 전쟁범죄자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내용들을 대폭 다루고 있다..     © 란보라
지난 23일, 17일부터 일본을 방문중이던 우이(吳儀) 중국 국무원 부총리의 일본 고이즈미 수상과의 회동을 앞둔 돌연한 귀국은 결국 중-일 정부간 과거의 감추려고 하던 마찰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우이 부총리는 "긴급공무"로 귀국한다고 했지만, 24일 몽골에 대한 방문을 미루지는 않았다.

우이 부총리의 돌연한 귀국을 두고 일본 언론과 정계에서는 갖은 억측과 이상한 말을 다하고 있지만, 중국측의 해석은 단 한마디,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의 중국인과 아시아 피해국가  국민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무책임한 발언으로 고이즈미 수상과의 회담에 유익한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았기에 귀국했다는 것이다.
 
중-일 마찰, 수 백년의 역사
 
중국은 1863년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 사실상 일본과 별로 가깝게 지낸 적이 거의 없다.
 
아편전쟁(1840년대)에서 중일갑오해전(甲午戰爭), 중일마관조약, 1931년의 9.18사변(동북침략 및 만주국 건립), 1937년의 7.7 북경 노구교사변(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 개시)과 항일전쟁(1938년부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일본은 백여년이나 전쟁상태를 계속했고,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재난을 겪었다.
 
통계에 따르면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중국은 3000여만명이 전쟁에서 사망했고, 일본의 대중국 침략전쟁으로 중국은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직접손실, 5000억 달러에 달하는 간접손실을 입었다.
 
손실도 손실이지만, 중국의 수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면적, 그것도 섬나라 일본에 침략을 당하고 일본이 중국의 동북을 16년간이나 강점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중국인들로 놓고 말하면 가슴에 걸린 돌이요, 역사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970년대, 중국의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 제1세대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중일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일간에는 근 20년이라는 밀월기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가 급성장하고 국력이 일층 신장하면서 중일간은 차츰 마찰이 생기기 시작, 최근에 고조를 이루고 있다.
 
역사문제와 대만, 조어도, 동해유전을 둘러싼 중일간의 민간전쟁

▲ 중국에서 쇠의 여인으로 통하는 국무원 부총리 우이. 우이는 사스가 광란하던 시기 중앙으로부터 위생부부장에 임명되어, 과단성있는 조치로 사스를 진압, 능력을 과시했다.            © 자료사진
우이 부총리가 일본을 방문하기 전, 일본의 상임이사국 가입과 일본의 역사왜곡교과서 문제, 조어도 문제로 중국인들의 대일본 감정은 고조에 달했고, 민간에서는 일본상품불매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상황으로 중일관계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었다. 이런 와중에 ‘愛知엑스포’ 중국의 날을 맞아 우이 부총리는 17일부터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우이 부총리가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는 소식을 두고 중국 언론은 이번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일본은 중국과의 외교문제 해결을 원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이번 박람회를 계기로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태는 생각 밖으로 돌변했다. 우이가 일본을 방문하는 기간, 고이즈미 수상은 "외부에서 신사참배를 하지 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라는 망언을 뱉었는가 하면 일본 정계의 기타 요인들도 일본의 1급전범을 두둔하는 발언(2차대전 후 일본 "전범에 대한 심판은 전승국들의 일방적인 심판이었다", 신사참배 반대는 일본 내정에 대한 간섭이라는 등)을 함으로써 중국측에서는 이는 일본 정치인들의 공공연한 도발행위로 인정, 우이 부총리는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견을 앞두고 돌연 귀국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번 방문에서 중국측에서는 일본과 조어도 문제, 대만 문제, 동해유전문제, 역사 문제 등을 둘러싸고 광범위한 교류를 원했었다. 물론 일본측에서도 중국과 이런 문제들을 두고 많은 교류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이가 일본을 방문한 시점에서 신사를 계속 참배하겠다고 한 고이즈미 수상의 발언은 우이 부총리, 나아가 중국정부에 대한 공공연한 도발과 무시라고 중국은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에서는 대만해협유사시에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는가 하면 조어도문제를 두고도 표지물을 세우는 등 일방적인 행동을 취했다. 
 
조어도는 사실상, 일본이 1895년 갑오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이미 패전상태에 들어섰을 때 강점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2차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이 관리하게 되었고, 냉전시대에 미국에서는 조어도를 일본에 넘겨주어 일본이 실제 통제하게 된 것이다. 동해유전문제를 두고도 중국 민간과 언론은 일본에 매우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 대륙붕에 따른 배타적 수역 주장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중간선을 고집하고 있다. 이런 모순이 있는 해역에서 유전을 개발하면서 중국에서는 자기의 주장에 따라 대륙붕에 따른 배타구역에서 유전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말하는 중간선 중국측에서 유전을 개발했다. 그러자 일본은 중국에서 유전을 개발함으로 "빨대"원리에 따라 "일본측"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중국유전에 흘러들어가게 된다고 하면서 중국에서 유전개발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나 중국측의 단호한 거절을 받았다.
 
비록 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정치인들과는 달리, 중국측에서는 시종 담담한 표현을 보였다.
 
후진타오(胡錦濤)주석의 5가지 주장
 
지난달 22일 중국 후진타오 주석은 고이즈미를 만난 자리에서 중일관계에 대해 일본을 향해 5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지난 4월 22일, 알카다에서 회동한 중국 후진타오 주석과 일본 고이즈미 수상. 이번 회견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중일관계의 5개 주장을 내놓았다.  주석의 접견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는 일본측에 단순히 자기의 의사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일본측에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자료사진
 
즉, 1] 중일간의 3가지 기본문서에서 약속한 대로 확실히 신용을 지킬 것, 2] 역사를 정시하고 확실한 반성을 할 것, 3] 대만문제에서 "대만독립"을 지지하지 말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다는 약속을 지킬 것, 4] 대화와 평등의 원칙에서 중일간의 분기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고, 중일관계의 발전을 교란하는 일을 하지 말것, 5] 광범위한 교류로 중일관계를 일층 발전시킬 것.
 
후진타오 주석의 주장의 핵심은 일본의 국제사회와 중국과 한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다. 일본은 한때는 역사를 반성한다 했다가 돌아서서는 또 신사를 참배하는가 하면, 중국 요원들과는 "중국은 하나"라고 인정을 한다고 하지만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적극 지지하며, 심지어 대만해협 유사시에 개입하겠다는 입장까지 공식 밝히는 등 중국을 자극하는 행위를 삼가지 않았다.
 
이번 우이 부총리의 일본방문기간, 일본정치인들의 신사참배와 역사문제, 조어도 문제에 대한 발언을 두고, 22일 후진타오 주석은 중일간의 우의란 "벽돌을 쌓듯이 한장 한장 쌓아야 하지만, 무너진다 하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음표를 달고 있다.
 
홍콩 봉황TV는 이를 정면으로 추측하지 않고, 과거의 역사사실로 비추어 보고 있다.
 
1961년 중국과 인도사이 국토분쟁이 발생한 뒤, 1962년 인도주재 중국대사가 귀국했다. 이로부터 15년간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영사급으로 추락, 1979년 중국과 베트남이 관계가 긴장상태로 돌아서고 대사를 소환한 뒤 양국간에는 전쟁이 일어났으며, 1991년과 1992년 프랑스에서 대만에 구축함과 전투기를 판매함으로 중국 정부는 프랑스 광주영사관 폐쇄를 요구, 양국관계는 1994년에야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봉황TV는 중국정부는 이제 일본의 태도를 보아가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역시 일본 정치인들의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으니, 이제는 말은 듣고 그 하는 행실을 볼 것이라고 했다.
 
일본정치인들의 착각
 
사실상 이번 중국 우이 부총리의 돌연 귀국은 일본 정치인들의 착각으로, 중일관계의 해빙기를 맞이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 것이다.
 
▲일본방문기간 연설하는 우이 부총리.     ©자료사진
우이 부총리가 일본을 방문할 당시까지도 중국 민간의 반일정서는 최고조에 치달아 있는 상태였고,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마저도 자기 부모나 친척들을 보고 일본 물건을 사지 말라는 정도로, 중국 민간에서 반일정서가 가라앉기 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이 부총리가 일본을 방문하게 되자, 일본 정치인들은 중국의 경제가 일본을 떠날 수 없다고 착각을 했을 것이고, 이런 시점에서 우이 부총리가 일본에 있는 기간 “신사를 참배하겠다”, "국제법에 따라 전쟁을 했다"는 등 발언을 함으로 중국에 압력을 가하고, 이런 압력 아래서도 우이 부총리가 계속 고이즈미 총리와 회담을 하게 된다면 일본은 자연 회담에서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미국이 중국에서 환율을 조절하지 않으면 무역보복까지 하겠다는 압력을 가함으로 일본정치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해도 미국의 압력아래서 중국이 어쩌지 못할 줄로 착각했다.
 
그러나 일본 정치인들은 중국 누리꾼들의 말을 빈다면 "정치계의 유치원생"에 지나지 않는다.
 
1950년대, 중국은 자본주의로부터 고립을 받고, 그처럼 가난한 상황에서도 당시 사회주의 진영의 "큰형님"인 소련과 맞섰고, 소련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19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경제가 극히 어려운 상황임에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베트남을 도와 미국에 대항했었다. 그런 중국이, 지금처럼 경제와 국력이 신장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경제문제로 자기의 주장을 굽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중국 누리꾼들의 말을 빈다면 더구나 웃기는 일은 우이 부총리가 돌연 귀국한 뒤, 중국에서 사과하라고 주장하던 일본정치인들이 26일에는 미국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양국관계의 개선을 위해 사과는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중국의 사과는 일본의 일방적인 소원에 지나지 않으며, 중국에서는 사과할 수도, 사과할 리도 없는 것이 현실인데 이런 것도 제대로 판단을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냐 하는 것이다.
 
이런 일본정치인들의 한치보기식 경거망동은 금년 초, 대중국 정부지원 차관문제에서도 있었다. 처음 고이즈미 수상은 중국은 엔화차관의 졸업생이 될 때가 되었다고 했고, 일본언론도 대중차관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중국에서 끔쩍하지 않자 곧바로 또 말을 바꾸어 양국이 협상해야 한다는 등,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둥 입장을 바꾸었다.
 
이를 두고 중국의 누리꾼들은 "정치의 유치원생이 정치대국을 꿈꾼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하고 있다.
 
중일관계의 전망과 한국에 미칠 영향
 
중일관계는 단기간 내에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에서 우익이 득세하고, 또 경제와 군사대국 꿈을 꾸고 있는 일본이 쉽게 역사문제를 반성하지 않을 것이며, 또 정치인들은 국내정치의 상황으로 신사참배를 계속하게 될 것이며, 미국에 붙어 자기의 정치대국 꿈을 이루려는 일본이 대만문제에서 중국과 충돌이 생기기는 뻔한 일이다.
 

▲ 이번기 중국 지도층은 중국언론과 평민들로부터 실무정부로 인정받고 있으며 말뿐이 아닌 행동하는 정부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에이즈 촌(에이즈병 환자가 많은 마을)"을 방문한 부총리 겸 위생부 부장 우이. 이 사진으로 중국의 누리꾼들은 우이부총리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 자료사진

전문가들도 중국과 일본의 마찰은 사실상 중국이 국제사회에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영향력이 커지고 국력이 놀랍게 신장하게 되자 이에 불안한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면서, 아시아에서 일본을 견제할 나라는 사실상 중국밖에 없음으로, 중국은 결국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환태평양국가들의 지지를 받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대만문제, 조어도문제, 동해유전, 역사문제 등에서 일본과 손톱만한 타협도 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경제의 원인으로 중국측에서가 아니라 일본측에서 양보를 하게 될 것이다. 지난해 일본의 대중국무역액은 1600억 달러, 금년에는 이보다 더 높은 2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이로 보았을 때 중국이 대일본 경제의존도가 높은 것이 아니라, 경제부진상태인 일본이 대중국경제의존도가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과거의 처리방식으로 보았을 때, 경제에서 어떤 손실을 입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절대 양보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본이 계속 대만문제에서 중국의 심기을 건드리고, 역사반성, 조어도 문제 등에서 실질적인, 중국이 만족할 만한 반응이 없을 때, 중일관계는 자연 후진타오 주석의 말대로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지금처럼 정치만 극한 대립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역시 대립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지금의 상황에서 일본제품들을 대체할 제품들을 찾고 있는 것이 중국 시장의 실정이다. 이는 어쩌면 승용차, 전자제품과 하이테크영역에서 일본을 뛰어넘을려고 노력하는 한국기업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만약의 경우를 위한 대응책이 필요하다. 진정 중일간의 외교분쟁이 격화되어 경제영역까지 미칠 경우, 한국은 과연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상당히 궁금한 부분이기도 하다.
* 한-중 문화교류와 상호이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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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5/28 [07: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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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쯧쯧 2005/06/09 [03:26] 수정 | 삭제
  • 말이 필요없다 쓰레기 중공넘들
  • 김현숙 2005/05/31 [19:19] 수정 | 삭제
  • 요즘 "대륙의 딸들"? 을 읽고 있는데.. 중국 정치에 대해서 들으니 솔깃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