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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국민작가로 불리는 한 소설가의 고단한 길찾기
 
이태경   기사입력  2004/03/17 [14:37]
이문열 소설의 강점은 넓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바탕으로 하는 압도적 교양주의와 이러한 교양주의를 매우 효과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문체(文體)에 있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대체적인 평이다. 사실 그와 같이 폭넓은 작품세계를 보여준 작가는 한국소설사에서도 그리 흔치 않았다.

그는 신화와 전설부터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과 인류가 쌓아올린 지적 성취들을 소설의 질료(質料)로 해서 수다(數多)한 작품들을 써내었고, 그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평단의 우호적인 평가와 독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곤 했다. 또한 그의 소설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광휘(光輝)를 덧씌우는 기능을 하는 특유의 문체는 그 현란함과 아름다움 면에서 어깨를 겨룰 짝을 찾기 어려운 지경이다.

그의 소설들은 작품성과 흥행성의 행복한 결합을 보여주는 드문 예였고, 그는 한국사회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반드시 배고픈 일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실증하는 좋은 모범이었다. 아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했다. 어느새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권력에 비견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까지 올라섰고,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등장하고는 했다.

'불의 시대'라고 불렸던 80년대에 그는 권력과의 불편함이나 길항(拮抗)관계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고, 단지 '민주화'라는 시대정신과의 불화(不和)를 거듭하였을 뿐이었다. 또한 패미니즘(feminism)이 새로운 시대정신이었던 90년대에는 패미니스트들에 맞서서 가부장제와 기존 질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 보여준 그의 행보는 자못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2001년 세무조사 정국에서는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조.중.동'을 위한 언론자유를 외쳤다. 80년대가 아닌 2000년대에 나온 그의 발언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생뚱맞다는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보수세력의 패배는 소설가 이문열에게 격렬한 위기의식을 안겨주었고, 무너져가는 한국사회의 자유민주주주의(?)를 보수주의자들-그러나 그에게 수구와 보수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였다-이 지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4.15총선을 얼마 앞둔 시점에 그를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이끌고, 드디어 정치의 한복판에 서게 한 것은 아마도 그런 소명의식의 발로(發露)였을 것이다.

최근의 탄핵정국의 소용돌이에서 보여준 소설가 이문열의 활약은 눈부시다. 역시 당대의 문장가 답게 말의 성찬(盛饌)을 늘어놓고 있다. 탄핵발의 직후 "칼을 뽑았으면 휘둘러야 한다"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독전(督戰)하였던 이 소설가는 탄핵소추안 가결 며칠 후 가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정치적 지향의 일단(一端)을 드려냈다.

그는 이번 탄핵소추안 의결의 합헌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탄핵안 의결을 국민들의 온정주의에 대한 기대를 가지면서 유도된 노무현 대통령의 계획이라고 의심하였고, 시민들의 광범위하고 자발적인 촛불집회를 변형된 개인숭배의 맹아(萌芽)로 걱정하였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결국 "내가 서있는 논리적 입장으로 본다면 탄핵이 되어야 하겠다"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소설가 이문열에게는 탄핵소추에 관하여 헌법이 규정한 형식적 요건만 구비되면-국회 재적위원 과반수 발의와 3분의 2이상의 찬성-언제라도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촘촘한 논리의 체로 무장한 그에게는 헌법 65조가 정한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라는 조문과 그에 대한 해석은 최대한 엄격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의결과정의 위법성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하다. 물론 이문열 자신은 노무현 대통령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과 법률을 중대하게 위배하였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 그런 생각을 하는 시민들은 30%가 되지 않는다.

또한 이번 탄핵정국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인식은 매우 음모론적인데,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의 온정주의에 기대서 탄핵이 의결되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의심하는 태도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아마도 그는 수구부패정당들의 작동원리와 위기돌파방식이 그러하였기에 노무현 대통령 역시 그럴 것이라는 사고(思考)의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닐지.

마지막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탄핵무효 촛불집회에서 변형된 개인숭배의 싹을 본다는 그의 혜안(慧眼)과 통찰력에 새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국민작가 정도 되면 이 정도의 문학적 상상력은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돌이켜 보면 소설가 이문열은 동서고금의 해박한 지식과 빼어나게 아름다운 문체를 바탕으로 빛나는 '언어의 성채(城砦)'를 쌓아올렸다. 정치(精緻)한 논리와 이념에 대한 가치중립의 자세는 그의 소설들을 한결 값지게 했다. 그러나 바야흐로 그의 시대는 그가 꿈꾸고 지향했던 정치적 가치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나가고 있다.

이제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소설가 이문열이 어느 작품에선가 썼던 것처럼, 논리적인 것이 반드시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들을 그의 소설과 그의 언행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다. 또한 작품속에서 정치와 이념에 대해서 중립적 자세를 취했던 소설가 이문열의 정치적 지향이 역사허무주의에 다름아님도 속속 발견되고 있다.

역사 발전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그가 지은 '언어의 집'은 그토록 빛나고 화려하였지만, 반면에 모래성처럼 취약하다. 한국사회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구성원들에 대한 애정이 없기에 그의 소설에는 온기(溫氣)가 없다. 그의 소설들이 많은 미덕과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관념적일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기존 질서와 가치들에 대한 승인(承認)에 머무르고 마는 이유는, 영남 남인 출신이라는 자부심과 아버지의 월북이 남긴 심리적 외상(外傷)이 소설가 이문열의 정신세계를 대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오해일까? 그의 소설과 정치적 발언들에서 일쑤 발견되곤 하는 과도한 엘리트 의식은 아직도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을 봉건시대의 우매한 민초(民草)로 여기는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의 인식과는 다르게 역사는 느리지만 전진하고 있고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은 깨어나고 있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참여민주주의와 효율성을 동반한 경제정의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이번 의회쿠데타의 실패는 그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이 그간 한국사회를 주름잡았던 수구세력의 퇴장을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는 그의 최근 정치적 행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의 발언들은 이미 희화화(戱畵化)되고 있다. 소설가 이문열이 지향하고 꿈꾸는 세상으로의 길찾기는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그 행로는 험하고 고단하기만 할 뿐 아무런 소득도 그에게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좋은 일들은 앞날에 있을 것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 있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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