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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 저항없이 민주주의도 없다
[각골명심 칼럼] 진영주의는 민중의 적, 민중민주주의의 극복대상
 
각골명심   기사입력  2009/06/30 [16:52]
"좋은 좌익 진영도 없고, 나쁜 우익 진영도 없다. 그저 진영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싸움이 났다. 싸르트르는, 우리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우리는 공개적으로 그걸 무시해야 한다고...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이지 스탈린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까뮈가, 그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만약 모든 진영이 좌익이라면 자신은 우익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카뮈의 모든 걸 공격했다." - <게오르크 클라저의 회고:어떤 대화로부터(1990)>  
 
진영주의에 희생되는 민중의 삶
 
까뮈의 위에 주장을 뒤집어 보면, "당신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겠다"던 볼테르의 말이 떠오른다. 오늘날 고상하게 똘레랑스(Tolerantia;관용)라는 말로 일반화되어 대중에 자주 회자되긴 하지만, 그러나 진영주의가 체질화 되어있는 한국 정치판에서 아마 누군가 저런 소릴 했다가는 배신자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그날로 정치판 자체를 떠나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최근 '중도와 서민'이란 용어와 이미지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떡볶이집 논쟁' 같은 것이 아마 그 단적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나는 민주당파든 한나라당파든 애초에 떡볶이집 경제를 걱정하는 마음 같은 것은 -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면 - 아예 있지도, 관심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단지 그러한 서민적 이미지가 중요할 뿐이고, 그것으로 상징화 해서 얻을 수 있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보다 중요한 것일테니 말이다. 해서 그들은 '자본의 시녀'라는 자신들의 본래 정체는, '비양심'이라는 그들만의 주머니 속에 꼭꼭 숨겨두고 일푼의 가치도 없는 말꼬리들이나 잡으며 맨날 철없는 계집아이들 처럼 아옹다옹, 소꼽놀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 이른바 '중도 강화론'을 전면에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5일 서울 이문동 재래시장을 방문했다.     ©청와대

그리고 언론은 이런게 마치 국민이 꼭 알아야 될 알거리나 된다는 듯 잔뜩 흥분해서는, 자신들이 속한 진영의 입장에서 '선점, 선점!'을 외치며 중계 해대기에 바쁘고, 또 숙제 받아든 두 진영의 지지자들은 입에 거품까지 물고선, 더많이 더넓게 전파하고 재생산 해내기에 바쁘다. 비합리와 반이성이 만나서 일회용 소품종 다량생산으로 폐기장 소각비도 못건지는 지극히 비능률적 정치체제의 엄호자들을 자임하고 있는 꼴이다.
 
이것이 오늘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실상이고, 진영주의에 포획된 민주화 22년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실종과 딱 정비례해 민중의 삶은 사망선고장 받아 쥔지 이미 오래고 그 시간 만큼의 죄없는 삶들이 억울하게 스러져 갔고, 또 그렇게 가고 있다. 악~ 소리도 한번 못해보고 말이다.

자본의 독과점체제, 금권정치
 
박정희는 자신의 군사독재 파시즘을 일컬어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했다. 한마디로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고 자유고 미뤄둬야 한다는 주장인데, 왜 이것들이 희생돼야만 잘먹고 잘살 수 있다는 것인지의 당위성을 총칼이 대신했던.. 그러니 오늘날 경제학자들이 들으면 배꼽 잡을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민주당은 현재 이명박식 조폭정치를 87년 상황에 억지로 끼워맞춰 '제2의 6.29선언'이 필요하다고 부르짖는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의 기만책에 불과했던 6.29선언의 본질은 차제하고 라도, 이렇게 딱 87년 사고에 화석화 되어있는 소위 민주화 개혁세력들의 민주주의觀이란 것도 허접하기는 오십보 백보다.
 
단적으로 지금 민주당이 내 걸고 있는 이명박 사죄, 책임자 문책, 국정조사 및 특검실시 등 5대 요구사항이 계속 무시되고 있으니 제2의 6.29선언이 필요하다는 건데, 그렇다면 이게 관철되면 민생이 좋아지나? 비정규직이 해소되나? 쌍용차 문제가 해결되나? 아니면 떡볶이집 장사가 더 잘되나?...더 본질적으로 그렇게 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민주주의가 회복된다는 걸까?... 이거야 말로 지배계층의 또다른 아전인수식 민주주의 일뿐, 주권자인 민중이 당연히 누려야할 실질적 민주주의와는 한참 먼, 자신들만의 삽질인 것이다. 
 
▲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조사 실시 등 5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CBS노컷뉴스

그렇다. 민주주의의 선행조건은 자본이 발전해야 존재한다는 주장은 분명 황당하지만, 그러나 민주주의가 자본을 제어하지 못하면 위기로 직결된다는 주장은 진실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뼈져리게 증명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권력과 결합하면 금권정치가 되는 것이지, 그것을 더이상 민주정치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말해 자본이 가진 일방향의 독점욕이 직접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정치를 도구화 함으로써 나아가 시장의 룰이 지배와 독점의 개념으로서만 기능하게 된 후로, 도대체 이땅 어디에 어떤 민주주의가 있단 말인가.
 
모든 질서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단순 도그마로 흘러왔고,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사회가 과연 제대로된 민주주의 사회일 수 있을까. 그러니 - 알고보면 지향할 바도 아니지만 - 미국식 민주주의에서 기대해 볼 수 있는 기업의 윤리성이나 사회적 책임같은 건 아예 기대조차 해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사회적 안전장치마저도 터무니 없이 부족한 이 사회에서, 오로지 노동 착취와 배제가 기업경영에 최고의 노하우처럼 되어버린 이 극단적 상황의 반복은 분명 한국 민중들만이 과도하게 겪어야 하는 지나친 형벌에 다름 아니다.
 
돌이켜보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자조인지 자긍심인지 모를 소리를 했던 노무현의 선언은 사실상 민주화 개혁세력의 정치적 파산선고 였으며, 동시에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없다는 항복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뒤집어 보면, 국민의 행복과 이익을 대변하라고 뽑아놓은 대표들이 죄다 자본에 몰려가 그들의 수호자가 되어버리는 비가역성(非可逆性)의 반복일뿐인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그 당시 이미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들의 욕구로 부터 사망선고를 받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체제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소모적 찌꺼기만 대량생산 해내는 눈먼 진영주의에 있다.
 
진영주의 넘어 자본에 저항할때
 
한국의 진영주의는 '반공과 가난'에 포로가 된 '자유주의 군사세력'과 '형식적 민주주의'에 포로가 된 '자유주의 개혁세력'으로 양분된다. 일명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증상은 한마디로 인질범에 대해 인질들이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동화되어 오히려 인질범을 두둔하게 되는 심리학적 현상으로서, 지난 22년간 민중들의 삶이 갈수록 악화되어 오면서 이에 따른 팍팍한 삶이 주는 심한 스트레스와 두려움이라는 극한상황들이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제공한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세력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온정주의로 급격히 전이되어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특히 인터넷 발달과 정치적 파퓰리즘에 탁월했던 참여정부들어 이는 보다 확장되어 마치 상시 전쟁상태와도 같은 '진지전(陣地戰)'으로까지 확전되어온 측면이 있다. 덧붙여 특정 진보-보수 언론들이 다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를 의도적으로 부추기고 조장해온 측면도 결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     © 대자보

어찌되었든 이 이원적 진영주의 주류체제가 지난 22년 동안 새로운 질서를 전혀 허용하지 않고 갈수록 독점, 고착화 되면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정체시키고 나아가 민중의 삶 자체를 정치 외적인 문제로 밀어내는 악순환의 고리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질서에는 '반공-자유수호'나, '반독재-민주수호'라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상징적 자긍심은 있을지언정, 이러한 추상들이 속된말로 우리 민중에게 밥먹여주고 인간답게 살 터전을 제공해 주는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영주의야말로 '민중의 적'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한국의 주류정당들이 모두 지역주의를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진영주의를 깨지 않고는 결코 지역주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관점에서 보더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 고리를 단절해 내야만 한다.
 
생각해 보라.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사실상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자본의 수호자가 된 세력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을 줄 수 있으며, 더구나 이 껍데기뿐인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다 나은 민주주의로 이행시킬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자본에 저항해야만 한다. 동시에 자본의 친구인 정치 기득권과도 이제 싸움을 시작해야 산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피아를 넘어 정치라는 영역에서 우리 민중이 있고, 우리의 절망적 삶을 정치에 반영해 낼 수 있으며, 우리가 끝내 쟁취해 내야할 삶속에 녹아있는 민주주의 다운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천번이고 만번이고 강조하건데, 오늘날 모든 위기의 근원인 자본에 저항하지 못하면 이제 민주주의도 없다. 다시말해 진영주의 극복은 민중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선결조건이고, 자본의 극복은 그 최종 목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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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6/30 [16: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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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골명심 2009/07/01 [08:10] 수정 | 삭제
  •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해석 될 수도 있겠군요...
  • 유유 2009/07/01 [04:23] 수정 | 삭제
  • 말씀의 대부분은동의하지만 "맨날 철없는 계집아이들 처럼 아옹다옹, 소꼽놀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는 적절치 않은 비교라는 생각입니다. 철없는 아이들이라고 표현하셨어도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철없는 어른이니 철없는 아이들 보다 못한 것이고, 어린이들이 다 철이 없는것도 아닐테고, 어찌보면 철없이 크는것이 아이들다운 것이기도 하구요. 더구나 "철없는 계집아이"라는 표현은 좋지 않군요. 계집은 사전적의미로 보면 1.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 2. ‘아내’를 낮잡아 이르는 말.임을 모르지 않으실터인데. 여자 어린이들이 들으면 화낼 말씀이십니다. 더불어 여성들이 듣기 에도 아주 나쁘군요. 다른 표현을 쓰실 수 있는 충분한 어휘력이 있으신 분이.
  • gg 2009/06/30 [18:15] 수정 | 삭제
  • 컬럼 처음 읽는데, 공감한다. 이런 류의 주장을 편 기사를 대한 적이 없었다.
    평소 이 점에 의문이었던 바, 기사가 사뭇 반갑다.
    필자의 다른 기사를 죽 점검해 보고 싶다.
    건필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