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한국말, 영어로 문장 만들다 죽는 줄 알았다
[도끼빗의 갈라치기] 퇴행하는 한국어, 절망적인 지성인들의 글쓰기 실력
 
도끼빗   기사입력  2006/12/04 [11:25]
용돈벌이 좀 해보려고 번역 일을 하나 맡았다가 아주 죽을 맛이다. 어떤 정치학과 대학원생의 미국 대학 박사과정 지원에 필요한 writng sample을 영어로 번역해주는 것이다.
 
10페이지 안팎이라니 대충 한나절 남짓이려니 하고 아침에 시작했는데 아직도 3페이지나 남았다. 실로 고역스럽다. 작업 시간의 대부분은 영어 문장 쓰기가 아니라 그(녀)가 쓴 한국말 독해에 쓰여지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의 문장을 보자.
 
"이 과정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통상교섭본부의 FTA국에서 수집한 정보와 정책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결정됨으로 공식적으로 이 과정에서 veto 권을 행사 할 수 있는 경로는 차단되어 있다."
 
세상에 이런 문장이 어디있단 말인가. 우선 이 문장의 주어는 도대체 무엇인가. 혹시 "과정"인가. 그리고 "결정"되는 것은 무엇인가.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보와 정책이 수집된다는 것인가 국무회의에서 결정된다는 것인가. veto 권은 누가 행사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대통령을 중심으로....결정됨으로"의 문장의 앞 부분에서 veto 권 행사의 경로가 차단되는 이유가 설명이 되었는가.
 
죽을 맛이다. 꼭 63 빌딩에서 떨어진 프랑켄쉬타인 시체마냥 조각조각 박살이 나 있는 이런 문장을 주어 시제 일치 동사 전치사구 복문 중문 엄격하게 articulate 되어야 성립하는 영어 문장으로 어떻게 옮기는가. 그러니 우선 그 조각들을 다시 실과 바늘로 꿰어맞춰 우선 대충이나마 몰골을 얽어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FTA에 대한 정보의 수집과 또 관련된 정책의 수립은 대통령 직할의 통상교섭본부 안에 있는 FTA국에서 독점하고 있으며, 그렇게 제안된 정책의 최종 결정 또한 국무회의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의회이건 정당이건 행정부 밖에 있는 행위자가 이 과정에서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로는 공식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셈이다." 
 
이러니 내가 지금 영어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한국어 논술 선생질을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고 있다. 1시간 일하면 그 중 한국말과 씨름하는 것이 50분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좀 안되었지만, 이 사람은 미국 유학을 꿈꿀 일이 아니라 한국의 대학교를 다시 다녀서 한국말 구사나 좀 제대로 익혀야 할 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이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인문 사회과학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친분으로 또 돈벌이로 교수 박사들이 쓴 글들을 영문으로 옮겨본 경험이 있는데, 이 요령부득의 한국말 문장실력들은 대동소이하다.
 
사유는 명징해야 한다. 사유는 logos 이며, 이는 "말"을 정연한 질서로서 배치하는 수놓기 작업이다. 이 점에서 감정적 공감이나 상징의 비약이므로 의미가 마구 달려나가는 pathos 나 mythos와 명확하게 구별된다. "언어적 이성의 극복"? 이런 소리는 달나라가서 해라. 이딴 소리 할 거면 기운 가사입고 탁발하면서 참선하고 직관지나 익혀라. 사람들과 소통하자고 있는 것이 이성이요 로고스이거늘 이딴 식으로 글쓰고 사유할 거라면 월급받고 존경받는 교수 박사 행세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한국어는 갈수록 퇴행하고 있는 것 같다.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의 저 깐깐한 산문을 떠올려본다. 그렇게 사유하고 있는 한국말로 쓰여진 글을 도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감성적인 단어 몇 개를 휘두르든가 고식적인 개념어들을 동어반복적으로 지리하게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글들 뿐이다. 갈수록 "한국에서의 정신의 갱생"을 바라는 내 간절한 소망은 점점 비관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6/12/04 [11:25]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지나는 길에 2006/12/05 [00:33] 수정 | 삭제
  • 제발 '되어지다'체 쓰지들 말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

    '되다' 자체로도 피동(수동) 또는 생성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문맥상 가늠할 수 있는 것인데, 어째서 식자라는 사람들은 굳이 '되어지다'를 쓰는 건지... 그러면 더욱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표현이 될 듯이 말입니다...

  • 미친이반 2006/12/04 [16:28] 수정 | 삭제
  • 아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이 안되잖아요. 단어의 나열이지 문장이 아니라니까요.
  • ghost 2006/12/04 [13:09] 수정 | 삭제
  • 글쓰기를 언급하기 이전에 이런 표현은 좀 삼가해주셨으면 합니다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입니다.
  • 피동태 2006/12/04 [11:53] 수정 | 삭제
  • 갈수록 "한국에서의 정신의 갱생"을 바라는 내 간절한 소망은 점점 비관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되어가고 있다."
    - 글쓰기를 언급하기 이전에 이런 표현은 좀 삼가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