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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 워>와 영화비평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의 눈] 디지털 기술은 어떻게 영화를 변화시키는가?
 
이택광   기사입력  2007/08/25 [13:10]
<디 워>를 둘러싼 논란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개봉하기 전부터 인터넷 게시판을 달궜던 이 영화를 둘러싼 논란들은 여전하다. 대체로 이 영화를 둘러싼 평을 보면, 그래픽은 그럭저럭 볼 만한데, 여전히 구성력이나 영화서사의 측면에서 전편 <용가리>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를 둘러싼 전문가와 대중의 대립이 이전의 경우보다도 극명하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대중은 이 영화를 “한국 영화의 신기원”을 열어줄 작품이라고 기대하는 반면, 전문가들은 “할리우드 판타지 장르에 대한 단순모방”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이런 대립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입장 차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하나의 ‘문화생산물’로서 <디 워>를 ‘판단’하고 있다면, 대중은 하나의 ‘문화상품’으로서 이 영화를 ‘평가’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얼마나 이 상품이 소비를 통해 쾌락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나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별반 중요하지 않다. <디 워>는 할리우드의 반복이지만, 이렇게 한국 대중이 자신들의 욕망을 기입하는 순간 한국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출연배우들과 사용한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모두 ‘미국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 우물을 파는 심형래 감독의 인간승리”이지, <디 워>의 작품성이 아니다.

물론 전문가들이라고 해서 이 영화의 작품성을 놓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를 B급 괴수영화 장르에 속하는 것이라고 사전에 규정하고 들어가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고전적 영화담론에서 <디 워>와 같은 영화가 차지할 자리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은 영화비평이 고상하고 비평가들이 거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른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대해서 고전적인 영화비평이 해줄 말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디 워>와 같은 영화는 영화 내적 문제보다, 영화 외적 현상으로 의미를 갖는 영화이다. 텍스트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더 이상 영화가 발언하지 않게 되었다는 현실은 영화라는 것이 무의식의 변증법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제 영화는 세계와 자신을 소외시켜 ‘비판적 역할’을 수행했던 ‘아름다운’ 과거를 종식시키고, 다른 대중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여럿 중의 하나’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디 워>는 영화 내적 논리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디 워>는 줄거리도 엉터리고 연기도 엉망이니까 나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쾌락을 얻은 대중은 이런 평가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도대체 이 거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루카치처럼 대중조작 시대에 상품 물신주의에 세뇌된 대중의 환각상태로 이 거부의 의미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지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중은 스스로 똑똑하다는 지식의 현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루카치가 몰랐고 푸코가 알았던 것은 이처럼 인식 또는 지식이 대중조작의 근본적 가면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대중이 조작된 현실에 놀아난다는 가설은 아주 예전부터 제기되어온 가설이다. 그러나 이 가설의 효력을 여전히 인정한다고 해도, 동일한 문제를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방안을 한번 탐구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결정적으로 나는 <디 워>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를 묻기보다, 대중이 왜 <디 워>같은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은 <디 워>라는 영화 자체를 분석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디 워>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영화담론으로 포섭되지 않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영화비평의 대상일 수 없는 무엇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이제 영화는 과거의 영화이기를 그만두고 전혀 종류가 다른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디 워>를 둘러싼 현상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라고 믿어왔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과연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포르노그래피와 디지털 리얼리즘

영화를 보는 행위는 이제 대중에게 일종의 제식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영화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다른 차원에서 특수하게 소비되는 문화상품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여전히 ‘예술의 아우라’를 흔적으로나마 간직하고 있기에 대중은 영화를 보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오늘날 영화가 경쟁자이기도 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더 강렬한 시각효과를 보여주는 길이다.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서 영화는 규모와 효과에서 압도적인 시각성을 선보인다. 이런 전략이 지금 할리우드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장르의 구조를 표현한다.

<디 워>는 이런 할리우드 영화의 전략을 한국 영화시장에 도입하는 또 하나의 시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를 옹호하고 지지함으로써 한국 관객은 이제 더 이상 영화가 예술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추인해주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제식에서 오락으로, <디 워>는 강렬한 시청각 효과를 선보이는 영화 아닌 영상물로 영화의 본질을 다시 규정해버린다. 심형래 감독은 영화를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시각효과를 보여주기 위한 기능적 장치들뿐이다. <디 워>만큼 이야기 구조 자체를 컴퓨터그래픽에 복속된 기능으로만 전락시킨 경우는 유례가 드문 일이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 구조는 컴퓨터그래픽을 위한 보조물로 기능할 뿐이다. 배우의 연기와 모든 플롯이 실제로 컴퓨터그래픽을 보여주기 위한 역할에 충실할 뿐 그 자체가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어떤 종합적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디 워>는 포르노그래피와 유사한 형식구조를 보여준다.

인터넷 상에서 애국심 논란을 일으킨 심형래 감독의 감독의 <디 워> ⓒ영구아트무비

영화 <디 워>의 홍보 포스터. 개봉 전부터 논란이 일었던 이 영화는 영화를 소비하는 대중과 비평하는 전문가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으면서 영화에 대한 새로운 눈을 요구하고 있다.

포르노그래피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오직 성행위를 보여주기 위해 플롯과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형식이다. 포르노그래피에서 이야기는 지루한 반복적 성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디 워>에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근거를 제공할 뿐, 그 자체로 아무런 독자성을 갖지 못한다. 나는 이런 원리에 충실한 <디 워>라는 영화에 대한 미적 판단을 내릴 생각이 없다. 포르노그래피를 미학 범주로 설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디 워>라는 영화를 가능하게 만든 숨은 충동을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이 충동은 한국영화도 할리우드처럼 되어야 한다는 ‘인정욕구’이며,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디 워>를 옹호해야 한다는 맹목적 애국주의 논리이며, 심형래라는 개인에 대한 동정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현상 또한 좀더 원초적인 충동이 불러일으킨 이차적 효과일지도 모른다. 이 충동이야말로 좀더 사실적인 괴수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디지털 리얼리즘의 욕망과 잇닿아 있는 것이다.

이런 리얼리즘은 루카치가 염두에 두었던 ‘문학적 리얼리즘’과 정반대 차원에 놓여 있는 ‘거울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루카치의 일도양단과 달리, 이런 방식의 모방행위는 유토피아 충동을 내재하고 있다. 현실에서 부족한 점을 메우려고 하는 욕망이 이런 시각효과에 대한 갈구를 드러낸다. 따라서 문제는 두 가지이다. <디 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상과 <디 워>라는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대중의 욕망 말이다.

<디 워>를 둘러싼 현상은 분명 우려스러운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반대 의견을 제출하는 행위를 이단시하는 행태들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태는 마케팅이라는 명목으로 악의적으로 흘러 다니는 근거 없는 ‘나쁜 믿음들’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디 워>를 둘러싼 많은 근거 없는 믿음 중 하나가 <디 워>는 충무로와 관계없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디 워>는 엄연히 충무로에서도 투자를 했고, 충무로 배급사라고 할 수 있는 쇼박스가 배급과 마케팅을 하고 있는 영화이다.

이런 맥락에서 <디 워>는 충무로 영화이자 한국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이와 별도로 과연 <디 워>가 한국적인 영화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단순하게 <디 워>가 할리우드 개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적 불명의 영화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다른 점은 오직 하나다. 바로 공공연하게 영화가 ‘상품’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일부 대중은 이 영화의 성공을 곧 한국 경제의 성공과 동일시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아닌 영화가 있을 수 없겠지만, <디 워>처럼 공개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으로 규정하고 시작한 경우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총아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시장논리에 저항하면서 입지를 넓혀온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역사’인 셈인데, <디 워>는 이런 역사 자체를 깡그리 무시하고 태어난 괴물 같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비평으로 접근할 수 없는 ‘이상한 영상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특징은 <디 워>라는 영화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심형래 감독은 개그맨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평론가들과 충무로가 무시한다고 끊임없이 읍소를 했지만, 반드시 그의 말이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디 워>에 대한 평이 좋지 않거나 미흡한 것은 컴퓨터그래픽영화 전체의 문제이지 꼭 개그맨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작품성 자체가 함량 미달이라는 지적도 많은데, 이건 다른 컴퓨터그래픽영화에서 견주어 조금 더 발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맥락에서 내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디 워>는 원칙적으로 기존의 영화비평 방식을 통해 접근해갈 수 없는 새로운 범주에 속하는 영상물이고,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비평적으로 논할 가치가 없다는 맥락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디 워>의 출현은 한국 영화시장의 발전이나 문화산업 양식의 전환과 무관한 것이 아니고, 이런 흐름으로 보았을 때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에 대해 본능적 직감 이외에 다른 성찰을 갖지 못한 심형래 감독이 이와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방향은 옳았으나, 그 방향으로 차를 모는 운전수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곤혹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심형래 감독에 대한 폄하가 아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디지털 영화란 무엇인가?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할리우드 영화 <300>은 지금 할리우드 영화 장르의 발전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실사이면서 실사의 느낌을 전달하지 않는다. 장편 극영화로 데뷔하기 전까지 광고계에서 알아주던 실력파였던 잭 스나이더 감독의 전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시각효과가 그렇게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독의 성향이나 의도를 제쳐두고 본다면, 이 영화는 <쥬라기 공원> 이후, 컴퓨터 기술과 장르가 상호 침투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의 경향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역사는 곧 기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은 기술의 발전이 어떻게 영화의 미적 형식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실례다. 큐브릭의 영화들은 곧 영화 기술이나 기계의 개발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큐브릭은 자신의 영화를 위해 직접 촬영 기계를 개발하고 촬영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영화는 기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영화는 기술의 예술적 사용과 과학적 사용이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혁명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런 영화와 기술의 관계는 요즘 우리가 목격하는 이른바 ‘컴퓨터영화’가 출현하기 전까지 영화를 위해 기술이 존재한다는 비대칭적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추세였다. 그러나 컴퓨터영화는 일단 출현한 뒤로부터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바꿔놓고 있다. 영화는 궁극적으로 사진술이 꿈꾸었던 것을 실현한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운동 이미지를 정지시킨 것이지만, 영화는 운동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사진을 이어 붙인 단순한 조립품은 아니다. 영화는 사진과 달리 시간을 편집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운동 이미지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해서 시간 이미지를 표현한다.

클로즈업과 느린 화면은 우리의 삶에 감춰져 있는 세부들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일상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움직임들을 영화의 이미지들은 다시 현재 속으로 불러들인다.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는 그 낯선 경험들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현실성에 대한 반응이다. 이 반응은 흥미롭게도 사진 속에 재현되어 있는 현실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현실성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그 기술력에 대한 것이다.

최근 개봉한 <트랜스포머>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할리우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인공의 이미지는 완벽하게 현실의 실감을 대체한다. 물론 이런 효과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실사 전쟁영화에서 성취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트랜스포머>가 보여주는 것은 이런 실사영화의 실감이 허무맹랑한 현실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이클 베이 감독이 만든 <트랜스포머>는 지금까지 컴퓨터영화에 도입되었던 여러 가지 실감 효과의 기술들이 집대성되어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사영화에 고유한 것이라고 여겨졌던 시간 편집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그 어떤 실사영화보다도 실감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가상의 로봇이 쏘아대는 포격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어떤 전쟁영화보다도 더 끔찍하게 전쟁의 공포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트랜스포머>라는 SF영화에서 이라크전쟁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과연 이런 극대화된 실감 효과의 체험을 단순하게 가상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가 사라졌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설명은 너무 안이한 자세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제 영화가 더 이상 실사와 컴퓨터그래픽 사이를 갈라놓는 장애를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의 원리다. 디지털은 모든 것을 해체해서 1과 0의 조합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원리에 따르면 현실에서 찍힌 이미지도 모니터의 픽셀을 통해 재현되는 영상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비평가들은 이렇게 디지털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영화를 일컬어 ‘디지털 영화’라고 부른다. 물론 한국에서 디지털 영화라는 용어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촬영제작 시에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영화와 실사이미지를 제작한 후 디지털 기술, 특히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이용해서 보정을 하는 영화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영화를 지칭하는 더욱 넓은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다.

디지털 기술은 영화의 제작뿐만 아니라 배급과 상영까지도 모두 변화시키고 있는데, 디지털 영화라는 용어는 이런 변화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새로운 용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디지털영화는 영화의 소비방식도 함께 변화시켰다. 이제 영화는 단순하게 극장에 걸려서 몇만 관객을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의 디스크에서 다른 디스크로 손쉽게 전송될 수 있는 영화는 언제 어디서든지 관객과 접속할 수 있도록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 변화는 사소하게 보이지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더 깊은 의미를 이런 변화가 감추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찍기에서 그리기로

실제로 디지털영화, 또는 컴퓨터영화를 논할 때 주로 거론되는 문제가 이야기 구조의 단순성이나 허약함이다. 그러나 영화가 디지털의 원리를 만나 컴퓨터영화가 되는 순간, 문제는 그냥 이야기라는 고전적 영화의 범주를 넘어가 버린다. 이제 디지털의 원리는 영화를 역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판명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형식 자체가 컴퓨터 영상의 화려함을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내포된 의미는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이 단순하게 영상제작의 보완물 정도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제작공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핵심적 원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디 워>는 이런 변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과도한 컴퓨터그래픽이 어떻게 영화의 형식을 위협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주로 컴퓨터에 기반을 둔 그래픽형상기술(CGI)로써 영상이미지를 보정한 경우를 말한다. 이런 보정 작업이야말로 기존에 우리가 믿어왔던 영화라는 물건에 대한 근본 생각을 바꾸게 만드는 요소이다. <디 워>는 순수 국산 기술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지만, 실제로 이 사후 보정 작업을 이필름(EFILM)이라는 미국 회사에 맡겼다는 점에서 과연 어디까지가 국산 기술인지 명확하지 않다. 실제로 영화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있는 것은 컴퓨터그래픽 자체보다 이 보정 작업의 과정이다. 보정 작업은 편집과 마찬가지로 영화 이미지의 본래성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른바 ‘뽀샵질’은 이런 보정 작업이 어떻게 원판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지 실생활에서 우리가 체감할 수 있게 만든다. 개인 사진이 이 수준인데, 영화에 이 작업 과정이 적용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컴퓨터를 사용한 사후 보정 기술의 발달은 나중에 수행할 보정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촬영하는 전도현상을 초래한다.

초기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론머맨>과 같은 영화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실사와 컴퓨터그래픽이미지를 구분할 수가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영화인 <기차의 도착>은 실제 기차의 움직임에 비해 어딘가 서투르고 엉성했다. 말하자면, 언제나 영화는 현실에 비해 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이런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허물어버린다. 컴퓨터그래픽형상기술이 출현하기 전에 영화는 언제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간주되었지만, 컴퓨터를 이용한 후 보정 작업은 이제 이런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오히려 디지털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미지를 덜 현실적이라고 느낀다. 영화는 이런 실감 효과에 대한 관객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초기 탄생부터 영화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자 하는 자연주의적 충동에 충실했다. 영화의 본령을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은 언제나 이미지에 대한 실감 효과를 변화시킨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실감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과거의 실감에 대한 반응을 둔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 관객은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욕망을 학습한다. 새로운 기술은 기존의 지각 방식을 바꾸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기술의 혁신을 통해 현재에 지배적인 실감 효과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기술이 영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이유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은 영화 제작에서 중요한 화두로 작용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카메라 렌즈 앞에 있는 것을 찍으면 된다”는 생각은 디지털 시대에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디지털 기술은 렌즈 앞에 무엇이 있었던가에 대해 무관심하다. 디지털 시대에 중요한 것은 그 렌즈를 통과해서 나온 이미지이고, 그 이미지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드는 이후의 보정 작업이다.

픽사애니메이션은 이와 같은 국면에서 출몰한 위기의 장르이다. 실사를 배제한, 오직 컴퓨터 삼차원 영상과 스캔된 이미지의 합성을 통해 탄생한 이 장르는 기술이 어떻게 영화의 형식성에 개입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아직까지 컴퓨터애니메이션은 실사에 비해 투박한 현실성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매트릭스>처럼 실사이미지를 디지털이미지가 보정했을 때, 그 실감의 효과는 실사 그 자체보다 강렬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더 이상 ‘찍기’가 아니라 ‘그리기’이다. 사후 보정 작업은 기계를 통해 이루어진다기보다, 정교한 수작업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다. 캔버스와 물감 대신에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이것은 ‘그리기’와 동일한 것이다.

영화가 ‘찍기’가 아니라 ‘그리기’로 바뀐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화비평은 이제 영화의 이미지를 논하는 길에서 그래픽이미지의 실감 효과나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낸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쪽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지만,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빠질 수 없다.

대중문화의 관건은 몰입에 있는데, 컴퓨터영화는 이런 몰입의 경험을 고조시키기 위해 더 선명한 그래픽이미지를 선보이려고 경쟁한다.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흥행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컴퓨터영화의 화두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실사영화들조차도 컴퓨터 기술을 이용한 이미지 보정은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객들은 이제 보정하지 않은 이미지를 낯선 것으로 받아들일 지경이 되었다.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이 개봉되었을 때, 관객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것은 이미 사후 보정 작업을 거쳐 나온 ‘기술적’ 이미지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날것’에 가까운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몰입성의 획득을 위해 사후 보정이 일반화되는 것은 영화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체성을 위협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더 이상 기록물이 아니라, 오히려 회화의 하위 장르가 되어버렸다. 이제 영상이미지의 실감은 카메라의 성능이나 촬영기사의 미적 감각에 달린 것이 아니라,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잘 다루는 손재주가 좌우하게 되었다.

특수효과는 이제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특수효과에 지배당했다. 한국영화 제작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상 제작 후 컴퓨터를 이용한 보정 작업은 필수가 되었다. 따라서 <디 워>는 한국영화 제작방식 바깥에서 생뚱맞게 등장한 것이라기보다, 이와 같은 큰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출몰한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실사이미지를 컴퓨터그래픽으로 대체하고 있는 이유로 여러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제작비를 줄이고, 표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컴퓨터그래픽이고, 강렬한 시각효과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다. 또한 기술을 영화제작에 도입함으로써, 영화 노동인력의 수급과 고용 회전을 빨리 할 수 있다는 산업적 이유도 있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는 이런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내적 논리를 한국에 적용하려는 시도였을 뿐이고, 이런 시도는 <디 워>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그러니 그가 충무로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한국의 영화집단도 이런 흐름에 대한 자각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알고 보면 심형래 감독과 충무로는 그렇게 이질적인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심형래 감독이나 충무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비평가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영화가 더 이상 영화비평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리고 영화비평가의 담론이 더 이상 상품 가치를 상실했을 때, 영화비평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영화비평가들 스스로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시장에서 교환가치를 갖지 못할 때 영화비평은 이제 어떤 형태로 존속할 수 있을까? 컴퓨터영화는 바로 이 질문을 던지며 영화비평에게 도전하고 있는 셈이고, 이것이 위험수위를 넘보는 광기의 형태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 글쓴이는 광운대 교수·문화평론가입니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 2007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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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8/25 [13: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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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끌끌 2007/09/06 [05:16] 수정 | 삭제
  • 꼴같잖은 놈 잘 들어라. 싸움 건게 누구냐고? 바로 니들 개디빠들이었다. 디워 개봉 전부터 이미 기자들 블로그 개박살나고 있었다. 물론 디빠들의 만행으로. 이 병신들은 이동진같은 심씨에 호의적이던 사람의 블로그도 말귀를 못알아듣고 아작냈으며, 'B급영화'라는 장르적 표현으로 디워를 옹호하던 기자의 블로그 역시 'A급'이라고 안그랬다고 개박살내놨다. 그 개지랄을 보다못한 이송희일, 김조광수가 한마디했다가 블로그 초토화된 것이고, 진중권이 바로 여기에 꼭지가 돌아서 100분토론에 나와 디빠들과 일당백만의 혈투를 자처하게 된거다. 자, 구국병신아 누가 나쁜 놈이냐? 같잖은 영화에 미쳐서 심형래 칭찬해주는 사람들까지 싸잡아 짓밟고 개행패부린 저 인간같지 않은 놈들이냐 그런 양아치 저질깡패짓들 하지 말라고 호통친 진중권이냐? 엉?
  • 끌끌 2007/09/06 [05:06] 수정 | 삭제
  • 조금이라도 디워 비판 비스무레한 글만 보였다하면 그냥 달려들어 개버블을 문다만, 니네들 지랄도 조만간 타임아웃이다. 디워는 한국에서 흥행 이미 개망했고, 미국에서도 쪽박찰게 자명하다. 심씨 하는 소리 들어봐라. 헐리웃 정복에 사활을 걸더니 인디영화 개봉수준도 안돼는 극장 1500개 잡아놓고 '미국은 극장보다 DVD가 중요하다'며 오리발 내밀고 있다. 그 DVD라는 게 그나마 판권 계약도 아니고 '판매대행'이다. 이런 개사기낚시에 얼씨구 좋다고 떡밥물고 대롱거린 천하의 ㅄ들이 바로 니들 디빠인 거다. ㅉㅉㅉ

  • 2007/08/26 [22:14] 수정 | 삭제
  • 뭐 님이 쓴 윗 글에는 그간의 논쟁에 비해 별다른 관점이 돋보이지 않으니
    할 말이 없지만....이제 교수 자리에 앉아계시는군요.

    님이 그간 출간한 서적 두어권들은 정말 목볼인견의 수준이던데..
    ( 프레드릭 제임슨 번역서는 완전히 엉망이고,
    들뢰즈 어쩌구의 영화 보기는 정말 민망하던데..)

    아무리 유학 시절에 대충 정리해서 출간했더라도
    독자들을 생각한다면 막 출판하면 안된다는 것 쯤은 아실텐데..

    여러 매체에 글 실을 정도의 용기시라면
    지난날의 오류를 이제 자신의 힘으로 바로 잡고 재출간하심이
    어떨지...기다려보겠습니다.
  • 구국결단 2007/08/26 [10:49] 수정 | 삭제
  • "영화비평이 해줄말이 없는" 영화에 대해 공연히 입방정 떨어 싸움 건 사람이 누군가? 누가 말해달라고 한 적도 없고, 전통적 영화비평 입장에서 별로 해줄말도 없는 영화에 대해 전문적인 영화평론가도 아닌 진중권이가 자칭 "퍼포먼스"식 배설을 내뱉은 것이 문제의 시발 아닌가?

    네티즌들은 단지 "다수"라는 죄밖에 없다. 실질적으로 언어의 "저급성""폭력성"만 개별적으로 놓고보면 진중권이 더하면 더했지 못할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