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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제, 프랑스혁명의 사생아이자 괴물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2] 시민의 의무와 권리, 성인남성의 군역으로 대체
 
최재희   기사입력  2005/07/14 [01:52]

징병제와 프랑스혁명
 
‘혁명’은 듣기만 해도 흥분을 자아내는 단어이다. 혁명이란 용어 자체에는 우리의 가치판단이 내재되어 있다. 즉 혁명은 인류의 진보에 긍정적이고 결정적인 기여를 한, 또는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사회 전반에 걸친 격변을 의미한다. 반대의 경우에 우리는 반란, 쿠데타 등의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일부 역사학자는 영국혁명을 혁명이 아니라 내란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입장이서 볼 때, 미국독립전쟁은 반란이었다. 미국은 독립의 의미를 드높이기 위해 미국혁명이란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혁명이란 용어와 혁명이란 이름이 붙은 역사적 사건은 모두가 그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받은 상태라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평가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혁명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이해관계가 직접 충돌하는 사건이다. 혁명 당시는 물론이고 역사가들의 혁명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절대 부패하지 않는 인민의 벗’이기도 했고 ‘피에 굶주린 독재자’이기도 했다. 특히 현대의 러시아혁명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획일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자유와 정의, 평등, 진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혁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질서와 안정, 조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한쪽은 지배자에 대한 민중의 승리와 속박에서의 해방을 떠올리고, 다른 한쪽은 폭력과 혼란, 공포정치를 강조한다.
 
이렇듯 혁명에 대한 상반된 평가 가운데에서도 특이한 현상이 보인다. 혁명의 지지자나 반대파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있다. 프랑스대혁명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징병제가 바로 그것이다.
 
혁명전쟁 초기에 프랑스혁명군이 수세에 몰리자 국민공회는 1793년 2월 24일 30만 명의 징집을 명하고 각 현별로 이를 할당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8월 23일에는 대체복무의 어떠한 예외 없이 18-25세의 모든 미혼남성을 징집한다고 선언했다. 포고령의 내용 일부를 살펴보자. “지금부터 적군이 공화국의 영토에서 물러날 때까지 모든 프랑스인은 군 복무를 위해 영구 징집된다. 젊은이는 전쟁터로 갈 것이다. 기혼남성은 무기를 제조하고 식량을 운반하며, 부녀자들은 막사와 제복을 만들고 병원에서 간호를 맡을 것이며, 아이들은 외과용 가제를 만들고, 노인들은 광장에 모여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군주에 대한 증오심과 공화국의 덕성을 가르칠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체계적인 제도로서의 징병제가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나온 일종의 국민총동원령이었다.
 
징병제의 도입에 따라 1794년 프랑스군의 전체 병력 숫자는 전해의 26만 명에서 74만9000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이것은 부르봉왕조의 상비군 수에 비해 5배나 증가한 수치였다. 당시 유럽의 모든 전제군주들은 프랑스혁명에 반대하는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구축했었고, 결국 1792년 4월부터 이들과 프랑스공화국과의 혁명전쟁이 발발했다. 주로 귀족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의 장교들은 혁명과정에서 대부분 사망하거나 망명한 상태였다. 국민방위군은 혁명 이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혁명에의 열의는 높았지만 전투 수행에 적합한 체계적인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다. 총사령관 뒤무리에 같은 이는 전투 도중 적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군이 유럽의 모든 전제군주들의 상비군에 맞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혁명군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프랑스혁명을 지켜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전제군주의 폭정에 시달리는 다른 나라의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혁명전쟁을 확대했고,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정복했다. 알프스 등정을 포함한 나폴레옹의 신화 또한 이때 만들어졌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개항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서양인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선조들은 나폴레옹이 혁명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한 인물로 인식했고, 나폴레옹 전기를 소개하면서 그와 같은 인물이 조선에도 출현하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군의 승리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전술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고, 혁명군의 자발성과 높은 사기를 꼽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빠질 수 없는 요인이 징병제의 실시를 통한 병력의 안정적인 확보였다. 유럽정복을 위해 징병법을 다시 발동했던 나폴레옹황제는 1813년 당시 이론적으로 무려 250만 명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징병제는 근대국가 및 시민사회의 성립과 맥을 같이 하며, 모든 시민은 권리와 함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 의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방의 의무이며,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가장 공정하고 정당한 방식은 징병제를 통한 모든 건강한 성인 남성의 군역”이라는 신화는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혁명의 징병제는 모든 시민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 전제군주의 억압과 봉건제의 굴레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을 지켜낸 상징물이었다. 혁명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혁명의 징병제는 외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유럽을 정복해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하게 해준 견인차였다. 혁명에 대한 판단여부와는 별개로 거의 모든 이들이 프랑스혁명의 징병제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인가? 혁명에 대한 양 진영의 인식이 상이하고, 징병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 또한 상이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징병제가 발표되었을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1793년 2월의 1차 동원령이 발동된 이후 1개월이 되지 않아 프랑스 서부의 방데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농민들은 구체제의 지지자도 아니었고 왕당파도 아니었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의 의사와는 달리 강제적으로 입대해 고향을 떠나는 것을 싫어했을 뿐이었다. 방데 봉기는 거의 3년 동안 지속되었다. 방데 반란의 영향으로 브르타뉴, 노르망디, 앙주 등에서도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이들의 저항을 게릴라전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서부지방 농민의 항거에 대해 국민공회는 단호하게 대처한다. 혁명의 도구였던 군대의 총부리가 이제 국민들을 향한 것이다. 당시는 자코뱅에 의한 ‘공포정치’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의해 수많은 희생자가 양산되었다.
 
“국민공회의 명령에 따라 방데의 아이들은 우리 군의 말발굽에 짓밟혔고 여자들은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 따라서 더 이상 반란은 일어날 수 없다. 나를 비난할 단 한명의 포로도 없다. 나는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켰다. 길에는 시체가 널려있다. 도적떼들은 항복을 애걸했지만 우리는 주저 없이 그들에게 사격을 퍼부었다…자비는 혁명의 정서가 아니다.”
 
이상은 진압군 사령관의 보고서의 일부 내용이다. 방데의 봉기는 대량학살의 끔찍한 이야기와 함께 프랑스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되었다.
방데의 비극은 자코뱅 공포정치의 극단적 광기가 극에 달한 시점에 무기를 든 것 때문이었다. 공포정치는 혁명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자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공포와 불확실성의 분위기를 조성해 반혁명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공포정치의 핵심 도구는 용의자 법과 혁명재판소였다. 주로 약식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언도했던 혁명재판소는 무고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단두대로 보냈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은 파리에서만 수만 명에 달했다.
 
지방에서의 공포정치는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었다. 방데지방의 사망자는 파리의 희생자 수의 10배를 넘는다고 추산한다. 용의자 법은 모든 시민이 당국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고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용의자 법에 의해 프랑스의 모든 가정은 언제라도 순식간에 재앙에 직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나아가 모든 시민은 자신이 혁명을 지지한다는 것을 능동적으로 증명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이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반혁명분자로 몰릴 수 있었다. 혁명의 지지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시민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징병을 포함한 정부의 총동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이제 공포정치 하에서 모든 프랑스인은 자유를 상실했다. 혁명을 지지했던 민중의 자발성은 사라지고 강요된 의무만이 부과되었다. 혁명의 진로를 둘러싼 갈등으로 지도부의 입지는 줄어들어 갔다. 혁명의 이러한 변화 과정을 징병제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삼색기를 휘날리고 라마르세예즈를 부르며 혁명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던 국민방위군과 강제적으로 동원된 징병군대를 대비해 보자.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나폴레옹의 독재로 혁명이 변질되고, 종국에는 혁명이 붕괴되어 부르봉왕조가 복원되고 극단적 반동체제인 비인체제가 성립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공포정치와 징병제의 실시에서 충분히 예견될 수 있었다. 긴 관점에서 고찰한다면, 혁명지지자들이 주장과는 달리 징병제는 자유와 평등을 지켜낸 것이 아니라 혁명을 안으로부터 곪게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유를 위한 혁명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그 혁명을 유지할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의 또 하나의 이상은 ‘우애(fraternity)’이다. 이것은 프랑스인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왕정의 억압에 신음하는 유럽의 민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프랑스 국민방위군이 프랑스 국경 너머로 진격한 것은 다른 나라의 민중도 프랑스인과 같은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왜곡되어 가면서,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던 프랑스혁명군은 이제 침략군이 되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친족을 각국의 왕과 제후로 분봉했다. 유럽 각국은 전제군주 대신 프랑스 징병군대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황제의 독재에 신음해야 했다. 혁명의 이상 ‘우애’는 사라지고, 각국의 배타적인 ‘민족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혁명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징병제를 옹호하는 이유는 징병제가 자유와 평등이 아닌 지배와 정복, 그리고 배타적인 민족의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지지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징병제의 신화 구축에 기여했다. 이전에 지적했듯이, 혁명 이후 징병제는 시민사회나 국민의 권리와는 무관한 억압적인 정치사회적 구조를 가진 프로이센이나 러시아 같은 국가들에서 실시되었다. 프랑스혁명을 분쇄했던 이들 국가들은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프랑스혁명에서의 징병제를 애국적이고 평등한 제도로 찬사를 보냈다. 지난 200년 동안 그 의미는 왜곡되고 곡해되어 왔었다.
 
징병제를 통해 평화를 위협하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려던 체제는 모두, 프랑스혁명과는 별개로, 혁명 당시의 징병제를 모범적인 역사적 사례로 제시했다. 프랑스혁명은 징병제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글실는 순서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1) - 징병제와 군대문화 (지난호)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2) - 징병제와 프랑스혁명 (이번호)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3) - 징병제에 의한 민주주의의 파괴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4) - 민주주의를 통한 징병제 저지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5) - 식민지에서의 징병제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6) - 양심적 징병거부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7) - 보이스카우트와 징병제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8) - 징병제의 경제적 의미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9) - 징병제와 사회주의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10) - 징병제와 평화운동


* 필자는 고려대 일본학 연구센터의 연구교수이다.
* 본 기사는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평화전문 인터넷신문 <평화만들기> http://www.peacemaking.co.kr/ 제공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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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7/14 [01: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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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 2005/07/14 [12:49] 수정 | 삭제
  • 우리나라의 병농일치의 징병은 근대적인 징병제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비군과 비슷하지요...(스위스같은...)
  • 역사학도 2005/07/14 [03:10] 수정 | 삭제
  • 징병제 폐지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프랑스혁명과 자코뱅당을 폄하하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의 소치요. 현대에 들어와서 "군사만능주의"로 폄하되었던 보나파르트주의(나폴레옹주의)도 당시 봉건적이었던 반동적인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훨씬 진보적이었다고 학계에서 인정되는 추세요. 일단 프랑스군이 들어가는 나라에서는 봉건적인 관계가 철폐되고 교회의 지배가 끝장났거든. 독일인 헤겔조차도 제나라를 침략한 나폴레옹을 가리켜 "시대정신의 화신"이라고 찬사를 보낼정도였으니까. 그리고 프랑스혁명의용군은 징병제로만 쌓아올린것도 아니오. 반동국가들이 혁명에 개입을 선언한 순간부터 의용군이 모이기 시작했으니까. 현재 프랑스 국가인 "라마르세이예즈"는 의용군들이 부르던 노래였소. 그리고 우리나라의 징병제는 서구의 예를 들것도 없이 고대부터(삼국시절부터) 이루어진 그 역사적 전통이 있소. 그리고 더 거슬러올라가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미 병농일치의 징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말이오. 징병제 폐지의 대의는 알겠는데, 굳이 우리나라에 있는 전통을 다른나라에서 찾지 말기 바라오. 그리고 프랑스혁명의용군과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최근 논문을 읽어보기 바라오. 극좌세력들이 판치던 시절에 폄하되었지만, 최근에는 굉장히 높이평가되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