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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제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3] 징병제는 제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지배의 도구
 
최재희   기사입력  2005/07/25 [18:55]
징병제와 민주주의
 
“귀족의 아들이건, 대장장이의 아들이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배움이 높건 배우지 못했건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젊은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국방이라는 숭고한 의무에 동참하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평등과 민주주의의 본뜻이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징병제의 도입을 주장하던 어떤 영국 지식인의 호소이다. 참으로 올바른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우리는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병역비리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한 해외 출산에 대한 기사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은 바로 병역의무의 평등성을 위반한 것에 대한 질타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하필 국방의 의무에만 평등이 적용되어야 할까? 학교, 기업, 가정 등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는 엄청난 경쟁과 차별이 엄연하게 존재하는데, 왜 국방의 영역에만 평등과 민주주의가 강조되어야 하는가? 형제애에 기반 한 평등한 사회구현은 인류의 오랜 이상이요 꿈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이상은 더욱 멀어져가고 있는데 왜 병역의 의무에는 형제애와 평등이 그렇게 강조되는가? 이상하고 모순되지 않은가?
 
질문을 계속해보자. 평등하게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은 군대 생활에서 평등과 민주주의, 그리고 형제애를 배우는가? 그리고 국방의 의무를 마친 후 이들은 군대에서 배운 평등과 민주주의를 사회에 확산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구현하는가? 군에서 평등과 형제애를 익히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도록 한 제도를 50여년이나 금과옥조처럼 지켜온 우리 사회는 평등과 형제애에 기반 한 민주사회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지역이나 학벌, 빈부의 구분 없이 형제가 된, 더군다나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민족이 지역감정에 그토록 골머리를 썩히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요즘 유행어처럼, “희한하네.” “모르겠다. 모르겠어.”
 
논리상 대답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징병제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도지만, 일부 잘못된 사례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 첫 번째 대답이다. 따라서 제도를 개선하고 교육을 강화하면 징병제는 그 본연의 의미를 충실히 반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럴까? 백 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럼 군대에서는 평등한 형제애를 익히고, 제대하는 바로 그 날부터 모든 과거를 잊고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에 매진할 것인가.
 
이러한 대답은 위선에 불과하다. 국방부는 군대에서 학점을 이수하게 하고 컴퓨터 등 장병들에게 사회에서 필요한 각종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각종 교육 기회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장병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그럴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다. 정부는 일상적으로 이러한 정책을 확대해야 할 뿐이다. 장병들의 처우개선이라는 미봉책으로 징병제의 위선적인 논리를 호도하지 않아야 한다.
 
징병제는 평등, 또는 평등에 기반 한 민주주의의 원칙과는 별개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전회에서 누누이 밝혔듯이, 징병제는 제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지배의 도구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군대에서 배우는 것은 평등과 형제애가 아니다.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20대 초반의 군대 생활에서 각인되는 것은 차별과 서열화, 그리고 복종과 폭력일 뿐이다. 그리고 적자생존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열함과 비굴함을 배운다. 그리고 가정, 학교, 기업, 남녀관계, 정치, 사회 각 분야에 군대에서 각인된 이러한 모든 것들이 확산된다.
 
민주주의를 위한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은 기껏 불안정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걸음마단계에 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자랑하고 대통령에게도 쉽게 육두문자를 날리지만, 우리의 생활공간에서 과연 얼마만큼 민주주의의 원칙이 통용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국방의무의 연령을 20대 초로 설정한 이유는 바로 징병제가 제국주의와 전쟁, 지배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이 신체적으로 가장 활력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이는 아주 부분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30대에 징병된다고 가정해보자. 적어도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비극은 쉽게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징병이 정말 불가피한 제도라면, 10대 말이나 20대 초반이 아니라 30대나 40대를 징병하라. 평등은 실현하지 못할 지라도 이들은 폭력과 굴종을 배우지는 않을 것이며 지배집단의 도구는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각설하고, 오늘도 징병제를 둘러싼 역사적 경험을 하나 소개한다. 1차 대전 당시 캐나다의 경험이다. 먼저 주지할 것은 앞으로 소개할 역사적 사례가 전부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국가에서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억압적인 정치사회문화를 가진 국가의 국민은 국가의 명령인 징병제에 항거할 수가 없었다. 단지 징병 사유를 찾아 손가락을 자르던지 도피하는 것으로 저항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징병제 논의가 거의 전무했던 것은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사회·에서 살아왔었던가를 반증한다.
 
캐나다는 영국 출신과 퀘벡 주 중심의 프랑스 출신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민자의 국가이다. 1차 대전 당시 완전한 독립국은 아니었지만, 영국의 자치령(Dominion)으로 의회 제도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다소의 갈등은 존재했지만, 의회를 중심으로 영국 출신과 프랑스 출신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때 유럽대륙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서, 돌발 퀴즈 하나. 1차 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공식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일은 영국에 적대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및 러시아와의 협상조약에 따르면,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한다 하더라도 전쟁에 뛰어들 의무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였다. 영국이 참전한 이유는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했고, 영국은 국제조약에 의해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국제조약은 70여 년 전인 1839년에 체결된 것이었다. 세계 최대의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은 그 동안 수많은 약소국을 짓밟았고 국제조약을 무시해왔었다.
 
그런 영국이 이제 약소국 벨기에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는 가증스러운 이유를 대며 전쟁에 나선 것이다. 어찌 되었건, 전쟁의 와중에 민주주의 대 전제군주국의 전쟁이라는 명분이 추가되었고,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1차 대전은 민주주의의 승리로 기록되게 된다. 그런데 영국의 동맹국이던 제정러시아가 카이저의 독일보다 더 민주적이었을까?
 
하여간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캐나다도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을 결정했다. 앵글로-색슨의 전통에 따라 캐나다의 군제도 지원병 제도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이 전해지고 지원병의 수가 줄어 병력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캐나다 정부는 징병법의 도입을 시도했다. 수상이던 보수당의 보덴(R. Borden)은 1917년 8월 29일 의회에서 25-45세 사이의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프랑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퀘벡 중심의 자유당은 징병법에 반대했다. 투표결과를 보게 되면, 퀘벡 이외 지역 출신의 자유당의원 25명이 탈당해 징병찬성으로 돌아섰고, 보수당에서는 프랑스 어권 출신의 의원 9명이 징병에 반대했다. 이에 따라 자유당과 퀘벡에 대한 국수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공격이 자행되었고, 퀘벡의 중심도시 몬트리올은 거의 폭동 상태에 빠졌다. 징병문제로 캐나다는 민족 간 대립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관련해 더 중요한 것은 징병제 이후에 통과된 일련의 후속법률들이다. 1917년 9월에 통과된 병사투표법(Military Voters' Act)은 병사들에게 투표권을 확대해 주었다. 이제 나이, 성, 주거기간에 상관없이 전투에 참전하는 사람은 모두 투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종교, 양심, 도덕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은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이 법은 해외파병 병사의 투표는 정부가 마음대로 선거구를 배정해 할당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같은 게리맨더링은 유권자가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유권자를 선택하는 것이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징병제를 이용했다는 비판을 불러왔다.
 
같은 해 통과된 전시선거법(Wartime Election Act)에 의해 1902년 이후 적국에서 이민 온 사람도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가족 내 군복무자 없는 경우도 투표권을 상실했다. 대신 남편, 자식, 형제가 복무하는 경우, 그 가정의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이는 잠재적 징병 반대자를 배제하고 징병찬성을 높이려는 시도였으며 곧 치러질 연방선거의 승리를 위한 조치였다.
 
1917년 12월의 선거에서 병영의 병사들은 각종 협박과 폭행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부지지를 강요당했다. 하사관이 투표를 관람하는 반 공개 투표가 자행되었으며, 그 결과 병사들의 투표는 92%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정부의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따라 징병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선거권의 박탈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징병대상의 캐나다인들은 징병을 회피했다. 총 404,395명의 징병대상자 중 92.7%에 달하는 380,510명이 면제 사유를 제출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다음 해 4월에 모든 면제사항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선거 직전에 정부는 “실제 농업에 종사하고 농작물을 생산하는 농민의 아들들은 징병에서 제외”할 것을 여러 차례 확약해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었다. 그렇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옥을 경험한 병사들은 정치인을 혐오하게 되었고 군사적인 모든 것을 증오했다. 전쟁 이후 캐나다에서 징병제는 저주받은 말이 되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야당이던 보수당은 징병제의 재실시를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자유당 출신 수상 킹(M. King)은 1942년 4월 27일에 징병제의 도입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했다. 퀘벡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찬성해 징병법이 통과되었지만, 수상은 징병제의 실시와 군대 파병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했다. 2차 대전 당시 캐나다에서 약 12,000명이 징병대신 수용소의 강제노동을 선택했다.
 
이상 캐나다의 경우처럼, 징병제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병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평등한 권리와 자유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한 징병을 당연히 반대한다.
 
캐나다정부는 ‘피의 평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어떤 징병 반대자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전쟁에서 돈을 버는 사람이 있는 반면, 농민들의 땅은 황폐해져간다. 우리에게 ‘피의 평등’을 요구하기 전에 ‘재산의 평등’을 실시하라.” 우리는 2년여 간의 군대 복무를 징병의 전부로 생각한다. 아니다. 징병의 본질은 전쟁이다. 그리고 징병이 요구하는 것은 피다. 우리 사회를 지키는 힘은 강요된 ‘피의 평등’이 아니라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그러한 ‘평등한 사회’의 구현이다.
 



글싣는 순서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1) - 징병제와 군대문화 (지난호)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2) - 징병제와 프랑스혁명 (지난호)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3) - 징병제에 의한 민주주의의 파괴 (이번호)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4) - 민주주의를 통한 징병제 저지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5) - 식민지에서의 징병제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6) - 양심적 징병거부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7) - 보이스카우트와 징병제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8) - 징병제의 경제적 의미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9) - 징병제와 사회주의
징병제의 역사와 신화(10) - 징병제와 평화운동
 
* 필자는 고려대 일본학 연구센터의 연구교수이다.
* 본 기사는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평화전문 인터넷신문 <평화만들기> http://www.peacemaking.co.kr/ 제공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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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7/25 [18:5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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