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권력으로부터 국민의 헌법상의 기본권이 침해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구제해 주기 위한 기관이다. 인권기관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 온 만큼, 소수나 약자의 정의도 법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다수의 정의만 고려하거나, 여론재판을 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우리 현실에서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가?
정의란 개념은 평등관념을 기본 원소로 하고 있다. 반면에 법은 그 사회의 상식이다. 상식은 사회의식이며, 사회 권력층의 의식이기도 하다. 약자가 법에 참여하려면 세력을 키워서 법이라는 종을 울릴 수 있도록 끄나풀이라도 잡아야 된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법관행은 어떠한가 하면, 다수 혹은 강자의 편에서 판결이 내려져 왔다. 인간의 역사가 그러했기에. 성문법이 있지만, 성문법이 얼마큼 '정의'를 내포하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세력을 키우지 못한 약자는 법이 요원하다. 법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이상국가일 것이다. 민주국가가 정의에 가까이 가기 위해 인권이란 개념을 개발시키고 심화시켜 왔다. 헌법재판소의 존재 의의도 여기에 있는 셈이다.
이번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 대상이 과연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당해서 제기한 소'일까? 그건 소를 제기한 청구권자와 피청구권자의 주장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피청구권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지 못함에 따라 청구권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 청구권자의 주장은 대한민국의 다수의 관념과 이익에 호소하여 법의 맹점을 잘 이용했다.
우리 법 체계 하의 다수나 강자가 승소하는 이런 관행이 법이 추구하는 사회 정의에 배치될 때는 어떻게 판결되어져야 하는 걸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사회 정의는 미래적인 관점이고, 법이란 보수성을 띠고 있다.
한편, 그동안 헌법재판소가 내렸던 판결들이 국민 여론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국민들은 영향을 받았다. 여론을 지배하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여론싸움을 부추기고 세력싸움을 부치기는 역할을 하게 된 데에는 '법의 정의'에 대한 민주사회의 심도 있는 접근의 부족함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이제 '법의 정의'와 '사회 정의'에 대해 국민 모두가 합의점을 연구해 내야 할 것이다.
나는 헌법재판소에서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는 관념은 헌법적 판단 사항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국민적 합의 사항이다로 판단하여 각하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습헌법이란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가 너무도 협소하고 애매 모호하므로 차라리 관습헌법 개념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헌법적 판단 사항이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사회 정의 문제에 개입하여 판단을 내리려다보니 법관들의 몸에 배인 법적 관념에 의거해 '법이란 그 사회의 상식이다'로 귀결하고, 나아가 강자, 다수자 혹은 가진 자의 편인 법 정신이 판결을 만들어 온 전통대로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법이 사회 정의를 실현해 주지 못하고 있는데 대해서 우리 사회의 깊은 반성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을 역동적인 사회라고 정의한다. 법이 사회의 상식이라면, 역동적인 사회의 정의도 끊임없이 향상되고 있다는 것을 법적 상식이 수용해야 한다. 법이 사회 정의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법학 전문가들의 변화가 요구되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읽어 본 후에 글을 쓰려고 하는데, <오마이뉴스>에 김용옥 씨 글이 올라와서 읽어보았다. 지금이 왕권주의 시대도 아니고, 북한의 김일성 체제 하도 아닌데, 그런 글이 유행하는데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남북한 공히 '개인숭배사상'이 사회의 성숙을 방해하고 있는 마당에, 공자 바이러스가 민주주의 옷을 입고 사회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 건 몰염치이다.
공자야말로 헌법재판소보다 더한 우리 사회 정의 실현에 걸림돌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사법체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사법기관의 법집행이 문제가 있는 것인가, 법이론 자체에서 '사회 정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나가 문제되는 것인가? 현재 우리나라는 법 이론 자체가 큰 문제이다. 학자들이 사법시험 통과자 양산에 신경 쓰느라, 민주 사회의 '정의' 문제를 어떻게 법에 실현시키느냐에 고민이라도 깊이 해봤는가 말이다.
그 증거로 관습헌법이란 말이 이슈화하자 너도나도 무뇌적인 발상으로 '호주제 폐지도 관습헌법 위반, 성매매 처벌법도 관습헌법 위반'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이런 발상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의 부당성을 입증하기는커녕 오히려 헌법재판소가 입법권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잘못된 관념을 낳을 뿐이다. 왜냐면 헌법 제 11조 평등권 조항에 반하는 호주제를 폐지하는 것이 관습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면서 헌법소원하면 성문헌법 위반으로 기각될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성매매는 정당한 관습이 아니라 범죄의 관습이므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 정신에 반하여 기각된다. 이런 식의 기각될 것이 뻔한 헌법 소원을 하겠다는 발상은 헌법재판소의 '관습 헌법' 이란 오류에도 책임이 약간은 있다. 그러나 이번 헌재 판결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법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가 이다. 이것이 중요한 핵심 사항이다.
사법 기관이 법의 정의로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해 왔다면 상황이 다르다. 그렇다면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이 헌소 제기를 선동하는 무뇌적인 언론과 그 언론의 속임수에 선동되어 한 몫 챙기려는 불한당 무리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시키지는 못하리라.
헌법재판소가 법리상 오류를 범한 것은 있을 수 있는 문제이다. 법조계에서 법리 논쟁으로 수정될 수 있다. 그러나 '법의 정의'가 도외시되는 법 관행은 심각한 한국적 현실이며 반드시 이 관행은 점차로 민주주의 사회의 정의에 접근해야만 한다. 사법부 독립이 이 문제에 걸려 있다.
* 필자는 페미니즘 연구서 '공자를 울린 여자', 동화 '내 마음의 미운 오리'의 저자입니다. 필자의 홈페이지 신정모라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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