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본능, 본능 그 본능의 다양함
생명 창조시대의 자기 경영 25
 
이동연   기사입력  2003/12/15 [12:32]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누구나 자기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비례도 
나는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육체가 전부일까?
육체가 다가 아니라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그가 믿는 그대로이다.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규정들은 모두 하나의 학설이며 이론이며 인간 존재의 조건일 뿐이지 절대적 기초는 아니다.

인간에 대한 어느 학설을 받아들이느냐는 개인의 선택 사양이지만 일단 어느 학설이든 받아 들이면 그 논리의 한계에 묶인다.
 
흔히 인간 이해는 현대로 올수록 복잡해졌다고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해다 오히려 고대로 올라 갈 수록 인간은 매우 난해한 존재로 여겼다.

여러 원시 사회들을 종합해 보면 세 부류 - 광인(狂人)을 포함해 정신이 박약한 사람. 천진 난만히 방실대는 갓난아이, 영매 - 의 사람들에게 불가사의한 신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다.  

즉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보이는 사람들을 전부 신기(神氣)가 깃들어 있다고 보고 그 사람들을 신을 만족시키는 최상의 제물 여겨 바치기도 하였다.  점차 근대로 근접해 올 수록 이 세 부류 중에서 영매(靈媒)만이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면서 더 이상 신기가 깃든 사람들이 제물의 대상이 아닌 일종의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었고  영매가 거처하고 활동하는 장소는 성소(聖所)가 되었다.  

이 영매의 고전적 형태가 무당이며 점쟁이이다. 그 다음이 제사장, 그리고 근대적 형태를 띤 사람들이 성직자이다. 인류는 초기부터 막연하게나마 영들의 세계에 대해 긍정하고 있었는데 이 막연한 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정립한 사람이 묘하게 영매들이 아니라 희랍의 대 철학자인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영원 불변의 세계인 이데아(EIDOS. IDEA)가 실제의 '원형'이며 이 세계는 그 이데아의 모상(模像)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SOMA)안에 갖혀 있지만 순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의 최고의 덕은 영혼의 자각인 '이성'으로 육체의 자각인 저열한 '욕망'을 잠  재우는 데 있다.  

플라톤에게 바람직한 삶은 '냉철한 통찰의 물 속에서 쾌락의 꿀을 먹는'것이다.  선에 대한 이성적 봉사안에서만 쾌락을 용인하고 있다.
인간은 영과 육의 합성체라는 플라톤의 실재론(Platonic realism)에 균열을 낸 사람은 생물학과 동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사물의 본질은 오직 사물 그 자체'라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을 주장했다. 사물과 동떨어져 저 멀리에 따로 존재하는이데아니  선(善)이니 영혼등의 말들은 그야말로 이름뿐이지 실재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입장은 스승인 플라톤의 이원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데아를 형상(forma)으로 체인지해 버렸다. 사물은 그 본래의 이데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내의 질료와 형상의 두 가지 뿐이다. 예를 들어 책상은 책상이라는 형상과 책상의 원 질료인 나무가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사후에 대해서도 스승과는 다른 입장을 갖는다. 플라톤은 사후에 육체에 갖혀 있던 영혼이 풀려 난다고 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사후의 인간에게는 더 이상 개별적 정신은 없다.
 
실재하는 것은 개별적 사물밖에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화(mythos)속에 살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크게 파급되지 못하고 플라톤의 사상이 주류로 받아 들여 졌다. 이원론을 극복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이후에 아랍 세계에 수용되어 다시 중세말 쯤 유럽에 스며들어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는 영양소가 된다.   

세계를 순수한 세계와 눈에 보이는 세계로 나눈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에 계승되어 영혼 불멸과 천국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화이트헤드의 지적처럼 서구사상사는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플라톤처럼 인류의 사상을 집요하게 지배한 사람도 드물다.      

플라톤의 인간관에 결정적 파열을 낸 사람이 프로이드(1856-1923)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을 무의식(id), 의식(ego) 그리고 초 의식(super ego)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존재로 본다.  무의식은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에 따라 움직이는 본능과 충동및 정신 에너지의 저장소이다. 의식은 생후 6개월 부터 발달하며 '현실 원칙(reality priciple)'을 따른다. 초자아는 '이상원칙(ideal principle)'의 지배를 받는데 주로 부모나 교사 등 권위있는 어른들의 가르침에 의해 형성된다. 

프로이드는 특히 무의식의 성 본능(sexual instint)이 가장 중요한 본능으로 인격의 성장과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미친다고 말한다.

물론 프로이드가 말하고자 하는 '성'은 남녀간의 교접만을 말하지 않고 '불쾌한 느낌과 반대'되는 상태를 가르킨다. 

프로이드는 플라톤의 이데아적 인간 이해를 완전히 생물학적 인간 이해로 바꾸어 놓았다. 플라톤에 의해 영혼의 지배를 받던 인간은 프로이드에 의해 무 의식의 충동, 그중 특히 성적충동에 의해 지배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반면 융(1875-1961)은 무 의식을 집단 무의식과 개인 무의식으로 세분화했다. 자아에의해 인정받지 못한 경험들이 개인 무의식에 저장되어 컴플렉스 - 사고와 감정, 기억의 연합체 - 가 된다. 

칼 융은 컴플렉스를 분석하면서 켐플렉스의 기원을 집단 무의식으로 상정하였다. 집단 무의식은 일명 '원시적 이미지'라고도 부른다. 인간은 과거 조상의 족적과 인류이전의 진화단계의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대대로의 흔적을 집단 무 의식속에 가지고 있다.  

이 집단 무의식으로 인간은 세계를 경험하고 세계에 반응하는 잠재적 소질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명인가? 문명충돌, 문화 차이 등의 사회학적 용어들도 융의 집단무의식이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융은 인간을 문화적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위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이드, 융 등 네 사람의 인간 정의에 대해 살펴 보았다.  당신은 어느 인간관을 따르는가?   

플라톤을 따르는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기 때문에 절대 선을 추구하며 이데아 세계를 앙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사람은 분석적이며 과학적 사고를 한다.   인간의 본질은 자기 안에 있으므로 자기를 알고 사물을 궁구해 새로운 지식을 쌓아 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융의 이론을 받아 들이면 문화 인류학적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본질은 자기 위의 지나온계보의 흐름속에 있기 때문에 삶의 자리를 소중히 여긴다.  

프로이드를 쫒아 가면 아무래도 성적 에너르기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무의식적 충동속에 성욕이 있으므로 성욕의 분출이야 말로 인간답다. 오늘의 성 문화는 프로이드적 통찰과 궁합이 맞는다.

이런 성 집착형 문화는 프로이드식 인간관이 힘을 잃으면서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더 자세히 살펴 본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3/12/15 [12:32]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