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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교회와 기독교학교는 이제 선교방법 재검토해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3/04/20 [11:47]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 기독교에 입문했던 초창기 제 마음에 큰 부담을 주었던 성서 본문을 선택하여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교우님들께서 너무나도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25~37, 공동번역)

1.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비유인가 예화인가?

성서에는 비유, 특히 직유와 은유가 많이 등장합니다. 직유는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원관념(천국)과 보조관념(겨자씨)을 명확히 드러내어 대비시키고 ‘~와 같다’ ‘~처럼’ 등 비유임을 나타내는 서술어가 포함되어 그 뜻을 이해하기에 비교적 쉽습니다.

하지만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원관념(내 마음)과 보조관념(호수)을 연결시켜주는 서술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상관관계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직유에 비해 그 뜻을 이해하기가 조금 더 어렵고 때로는 오해를 빗기도 합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은유가 특히 오해를 많이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내 마음은) 호수’와 같이 원관념이 생략된 채 보조관념만 남아 이것이 은유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원관념은 감추어지거나 생략되고 보조관념만 문장 안에 남아있는 은유를 ‘메타포’라고 하며, 우리말로는 ‘암시적 은유’ 또는 ‘암유’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 나타나는 여러 단어들을 메타포로 이해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도 주로 이 이야기를 비유로 이해하였습니다. 본문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관례적으로 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비유로 이해하느냐 예화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결론은 매우 달라집니다.

본문을 비유로 이해하는 분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는 교회 강단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구약의 율법과 전통을, 그리고 예루살렘은 교회, 예리고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못하고 세상과 벗하다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고통을 받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본문을 풀어가는 설교자를 몇 번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분들은 본문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뜻하며, 사마리아인이 나타나 강도만난 사람을 구해주고 치료해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비유로 해석해도 복음의 정신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주고 치료하여 생명을 되찾아주듯이,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길에서 건져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고백은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신앙이며, 신약성서 전체를 흐르는 큰 줄기이니까요.

하지만 본문의 결론 부분을 보면, 이 말씀이 비유가 아니라 이웃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예화임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일차적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이웃은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 매일 만나더라도 뜻을 함께 하지 않으면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웃은 그 모든 이유를 뛰어넘어 그냥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주목해야할 점은, 예수께서 왜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냥 ‘착한 유대인’을 등장시키셔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종교와 혈통, 신분제도 등에 대한 당시 사회의 편견을 단번에 부정하고 넘어서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강도에게 당한 피해자를 대면한 사람은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입니다. 사제는 종교지도자이고 레위인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이며 폭넓게 존경받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와는 정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이방인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여 율법교사가 이런 사마리아인을 자기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교사와 생각이 통하고 신분과 계급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 경멸해도 시원치 않을 천하고 멸시받을만한 사람을 이웃사랑의 모델로 제시하셨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접근했으며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도전적인 질문을 했지만 다행히 이전의 전제에 매이지 않는 열린 종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웃의 개념을 뒤집는 예수님으로부터 율법교사가 받은 충격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율법교사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저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자신도 없었고, 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교사의 도전적인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이야기를 들려주심으로 그가 고정관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내 기준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여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이웃사랑의 모델로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들쳐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 정성껏 치료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주머니를 털어 차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까지 세심히 보살펴주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한 편의 이야기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문의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저는 마음에 큰 부담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이 본문이 불편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본받으려는 생각보다 오히려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갔던 사제와 레위인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들도 급히 가야할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강도사건이 발생한 위험한 현장에서 급히 벗어나고 싶은 두렵고 다급한 마음도, 거기서 얼쩡거렸다가는 똑같은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니 나부터 살고보자는 비겁한 마음도 일정 부분 이해하고 싶습니다.

더구나 우리 주위에서 이런 식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인가요? 강도 만난 사람, 사기 당한 사람, 왕따 당한 사람 등, 예수님께서 설정하신 이런 상황은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너무도 흔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사람들을 이웃으로 삼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저는 본문의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의 삶과 제 가족의 행복도 중요하니까요.” 어느 날 저의 마음에 찾아오신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가 네 혼자 힘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더냐? 너의 자매형제들이 있지 않으냐? 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나의 사람들과 힘을 모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 공경과 이웃사랑이 성서의 중심 가르침이라는 점에 이의를 다는 교우님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며, 또한 성서가 제시하는 이웃사랑의 기준이 ‘네 몸 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누구나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느낄 것 같습니다.

하여 주님의 이 엄한 명령(?)을 개인이 실천하기에는 ‘아름답지만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지금도 여전히 듭니다. 하지만 “벽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우리의 옛 격언처럼, 개인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힘을 모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신 이유도, 또한 오늘날 교회의 존재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4. 개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는 어렵지만 교회가 힘을 모으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제가 1983~4년에 교구전도사로 일했던 영락교회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습니다. 대형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저에게 1983년 여름, 갑자기 사직하게 된 분을 대신해 영락교회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대형교회, 아니 영락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제 마음에서 걷어내는 데는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영락교회는 대광중고등학교와 영락중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을 지원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교구별로 가난한 교우를 파악하여 가구당 20kg들이 쌀 한 부대를 매월 지원하였습니다. 저는 당시 구역장님과 함께 어려운 형편에 계신 교우님을 선정하고, 실사를 나가고, 쌀부대를 전해드리며 느꼈던 감동과 기쁨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락교회는 고아원과 양노원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아원과 양노원이라는 일반적인 이름 대신 당시에는 낯선 보린원(이웃을 보호하는 집)과 경로원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어려운 이웃이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한 흔적입니다. 또한 영락교회는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모자원도 운영했습니다.

영락교회 은퇴권사이신 저의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영락교회는 매주 수요일마다 연세 드신 교우님들에게 만남의 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위로하며, 점심식사를 대접하여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는 교우님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제공하는 복지혜택을 누리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영락교회에 대한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만일 영락교회가 기독교학교를 지원하되 학교운영에 대해 간섭하거나 기독교신앙을 강요하지 않고, 기독교의 보편정신인 사랑과 정의의 가치에 입각하여 순수 교육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한다면, 사회로부터 더욱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기독교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시행되는 예배는 목사에게도, 또한 교사나 학생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문제일 수 있습니다. 종교의식임에도 불구하고 선택권이 없이 억지로 끌려온 학생들은 내내 졸거나 소란을 피워, 거룩하게 드려져야 할 예배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학생들에게는 기독교를 더욱 멀리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학교의 운영자들은 예배에 대한 선택권을 결정할 권한이 자신들에게는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와 기독교학교는 이제 수십 년간 이어져온 선교방법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제도로 강제하지 말고 내용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의무참석제도 대신 오히려 엄격한 기준을 마련하여 준비가 안 된 학생은 원하더라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간절히 참여하기를 바라는 학생들에게만 예배의 의미를 잘 가르쳐 선택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길게 보면 더욱 효율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중고등학교 뿐 아니라 초등학교와 대학교까지 포함하여 모든 기독교학교가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어 제도로 강요하지 않고 내용으로 다가가면, 예배가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전통에 매여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면 기독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학교는 예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하고, 교회는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교회 다니라고 소리쳐 외치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주님 말씀처럼 그저 말없이 섬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도움이 필요한 누구에게나 다가가 그분들의 아픔을 싸매어주고 위로하며 희망을 주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개인이 하기는 힘들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의 교우님들이 힘을 모아 참여하면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금 사회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며, 교회를 외면했던 분들도 다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고 참여하는 데 앞장서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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