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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박종우와 일본순사 쓰다 산조의 애국심
[논단] 이명박 정부와 국민보다 사법부가 귀감으로 삼아야 될 사건
 
김소봉   기사입력  2012/08/14 [08:51]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숙적 일본을 물리치고 난 뒤 응원하는 관중이 건네 준 ‘독도는 우리 땅’이란 즉석 스케치페이퍼를 받아 들고 경기장을 질주한 박종우 선수의 세리머니를 놓고  IOC의 메달 보류 결정에 대한 찬. 반론이 국민정서와 국내 정치권은 물론 국제적 이슈로 떠올랐다.
 
박 선수가 한. 일간의 우호를 저해한 국적으로 둔갑할지 아니면 우국지사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지는 아직 미지수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오비이락(烏飛梨落)이란 고사처럼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의 유일무이한(?)통치행위와 맞물려 일본 열도 역시 우리네만큼이나 들끓고 있고 자칫하면 피차간에 인내와 자제로 일관해왔던 양국 간의 표리외교(表裏外交)도 마침표를 찍게 될지 모를 일이다.

개인적 영웅 심리를 앞세우는 한국인과 국가적 영웅 심리를 먼저 앞세우는 일본인들의 애국관은 그 본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국제적 문제로 비화됐을 때 우리가 얻는 실익이 무언지 국민들도 이성을 되찾아야 할 문제이며 ‘독도는 우리 땅’ 이라고만 무조건 외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성 싶다.

 이미 일본정부는 독도는 물론 중. 일간의 영토분쟁으로 비화하고 있는 센가꾸 열도와 병합해 이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영토침해로 규정짓고 있고 일본인들의 반한 감정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성 잃은 성토보다는 차분한 이성적 대응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박종우 선수의 세리머니는 박 선수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해방 뒤부터 대한민국을 통치해 왔던 위정자들과 지식인들의 대책 없는 관용론이 파생시킨 참사(慘史)로 규정돼야 한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표방한 정책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일본에게 빌붙어 부귀영화와 권력을 휘두른 친일분자들을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복권시킨 것과 경제개발을 핑계 삼아 36년 동안의 국치(國恥)를 청구권자금이라는 엔화 몇 푼으로 화해협상에 서명한 과거 정권의 실책이 밑바탕에 깔린 통제될 수 없는 국민감정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1891년이니 지금으로 치면 121년 전, 당시 세계지도의 6분의1을 차지한 강대국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친선국인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의 분위기도 200년 동안의 쇄국정책을 풀었을 때이니만큼 일본인들의 정서 역시 강대국인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없을 리 없었다. 황태자가 의기양양하게 지금의 교토 부근을 지날 무렵 경호에 차출된 일본제국의 말단순사(경찰관)인 쓰다 산조라는 순사가 느닷없이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일본도를 빼들고 돌진해 머리를 내리쳤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황태자의 모자테두리를 가르고 후두부에 9cm정도의 찰과상을 입히는 것으로 사건은 끝났다. 일본 역사서는 이 사건을 우리의 안중근 의사의 애국철학처럼 우상화하여 장소가 교토의 오쓰 지방이었으므로 ‘오쓰 사건' 으로 기록해 일본정신의 귀감으로 삼고 있으나 사건 초기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쓰다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러시아 조정과 러시아전역은 일본타도의 냉랭한 기류가 압도적이었고 일본 조야 역시 비상이 걸리고 명치 왕이 직접 주제하는 어전회의가 열려 일왕은 즉각 죄송하고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는 통석(痛惜)의 념(念)으로 시작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게 하고 쓰다는 애국열사가 아닌 국가이익을 저해한 육시처참 해야 할 중죄인으로 취급해 구속됐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당시 황제의 칙서를 받아 계엄령을 선포한 일본 내무장관은 이등박문이었다.


 

중국과 일본이 자국영토라며 분쟁 중인 센가꾸열도(동그라미 지역)

이토는 일본최고의 정략가답게 전쟁즉발의 이 위기를 산술적 개념이 아닌 상대의 마음을 녹이는 인과적 개념으로 해결했다. 사고 현장 부근에 사는 글을 쓸 줄 아는 어린 학생들부터 관료는 물론 승려들까지 동원해 위문편지를 쓰도록 해 황태자가 입원한 병실은 물론 복도와 병원 앞 정원까지 사죄편지는 산사태를 이루고 관청은 쓰다라는 성과 산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모두 개명시키고 ‘유코’ 라는 아낙네는 황태자에게 사죄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일왕은 이것도 모자라 직접 내외가 문병에 나섰으며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바 있는 친러파의 수장인 에노모토를 진사 사절단장으로 내세워 러시아 알렉산더 1세에게 보내려했으나 러시아 황제와 러시아 조정은 일본인들의 충심어린 사죄와 사과에 오히려 감동해 사절단의 입국을 정중히 거절하고 대국다운 아량을 베풀어 이 문제를 종결했다. 

통석의 념이란 명치 황제의 성명서는 그 이후에도 다목적으로 사용돼 일본 수뇌부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두고 쓰는 문자가 됐는데 일본인들의 이중적인 자세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무자비한 일본인의 국민성은 제쳐두고라도 쓰다 산조의 재판에서 배울 점은 있다. 니콜라이 황태자가 방한할 때 양국은 협정체결을 통해 황태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일본의 황태자에 대한 위해범과 똑같이 형법 116조로 다루게 하겠다고 서명했고 당시 아오키 외상은 골치 아픈 범인을 죽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해 러시아 측에 문서로 쓰다 산조의 사형을 요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고지마 일본대법원장은’ 형법 116조는 국내법이라며 외국인 살해미수범인 산조를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에 처했다. 쓰다 산조의 구속이 길어지자 처음은 쓰다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며 길길이 뛰던 일본인들은 태도를 바꿔 산조를 열혈우국지사로 칭송했고 고지마 대법원장 역시 일본을 외세로부터 지킨 우국지사로 둔갑했다.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국민의 인권을 지킨 고지마는 지금도 일본인들에는 ‘법의 신’으로 통한다. 고문과 조작으로 구속된 민족주의자들과 민주화투사들에게 검찰의 기소대로 무자비하게 사형이나 종신형을 집행한 자유당정권과 군사정권 시절의 대한민국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와 하급심과 상고심의 법관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대목이다.

 쓰다 산조는 원인 모르게 복역 4개월 만에 병사했는데 이는 양국 간의 우호를 저해하는 범인을 살려둬선 안 된다는 일본공안기관의 묵시된 타살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14년 뒤 일본은 쓰다 산조의 복수를 러일전쟁의 승전을 통해 통쾌하게 갚았고 북동아세아의 맹주로 자리 잡았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국제정세에서 한. 일간의 외교는 수면하의 전쟁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나 항상 당하는 쪽은 우리였고 일본의 입지는 국제적으로 더 강화됐다.

이번 박종우 선수 문제와 이 대통령 독도방문을 놓고 우리 영토, 우리 주권에 대한 일본의 간섭과 관여는 묵살할 일이지 대응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일본은 대륙침략의 일환으로 조선을 합병하고 세계의 맹주를 자처했지만 당시 일. 소간의 우호조약에도 불구하고 1941년 소련의 스탈린은 사할린을 비롯한 북방열도를 소련으로 복속시키고 말았다. 

 이번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비온 뒤 우산을 잊는 것처럼 금세 잊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 젊은 운동선수의 순간적 애국심이 정치쟁점화돼 메달이 취소되는 불행한 사태로 번지지 않도록 모두 힘을 모을 때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와 국민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칼럼니스트 /경남연합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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