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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포퓰리즘이다
생명 창조시대의 자기경영21
 
이동연   기사입력  2003/11/15 [10:49]

이제는 포퓰리즘(Populism)이다. 아직 이 포풀리즘에 대해 무조건적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과 집단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포퓰리즘은 누구도 거스릴 수 없는 시대적 대세가 되고 있다. 

포퓰리즘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굳이 여기서 교과서적인 포퓰리즘의 역사를 들먹이는 이유는 포퓰리즘에 대해 반대하는 일부 식자층들이 그 연원(淵源)을 예로 들기 때문이다. 사실 연원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보다는 오늘의 쓰임새가 중요하지만 인문학적 학습이라는 것의 대부분이 연원을 파헤치는 작업들이 많기 때문에 소위 학자들 중에는 연원없이는 못 살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1931년도부터 학생 하기 방학때 브나로드 운동이 시작됐다.     ©goha.or.kr
포퓰리즘!  대중영합주의, 민중 영합주의- 필자는 이 해석에 반대하며 대중주의라 칭한다-라는 딱지를 붙인 이 포퓰리즘은 1870년대 러시아의 일부 청년귀족들과 학생들이 급진적 정치 이데올로기를 품고서 농민을 주체로 하는 사회 개혁운동을 시도한 브나로드(Vnaroad)운  동에서 비롯되었다.

1890년 포퓰리즘의 연원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 미국에서 터졌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 지배에 대항하여 인민당(Populist party)이 결성되었다. 

포퓰리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주로 인민당이 단지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가히위해 합리적 정책의 대안을 도외시했다고 폄하한다. 

당시 미국 농민연맹(Far mer’s Alliance)의 여성지도자인 메리 에렌리즈의 연설문중의 일 부분에는 다음의  격정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나라는 월가(WALL STREET)가 전부 소유하고 있다. 이제 정부는 더 이상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 월가의, 월가에 의한, 월가를 위한 정부일 뿐이다.   해마다 1만여 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죽고 대도시의 여성들은 몸을 팔아야 빵을 먹는 현실인데도, 정치인 들은 과잉생산이 근본적 문제라고만 말한다.'

이런 문제 의식의 발로에서 시작된 인민당은 당시 미국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루스벨트는 백악관 역사상 처음으로 노조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회담을 가졌고 인민당의 혁신적 제안인 거대 독점자본의 트러스트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미국에서의 대중들에 의한 포퓰리즘 열기는 루스벨트의 재치로 가라 앉았으나 20세기에 들어 와  남미에서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 등, 지도자들의 대중 선심정책으로 포퓰리즘에대한 관심이 다시 점화되었다. 그러나  이때 포퓰리즘은 남미의 일부 지도자들 때문에  엄청난 오해를 받게 된다.

마치 포퓰리즘은 경제를 망치는 주범으로 오해를 받게 되었다.  남미의 포률리스트적 지도자들은  문맹률은 높고 천연 자원은 풍부한 남미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 생산적 복지개념이 아니라 모든 집단에게 골고루 단순 실업 수당으로 분배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 결과  생산성은 갈수록 저하되어 만성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남미식의 대중화(Popula)에 초점을 맞춘 포퓰리즘은 대중을 어디까지나 계몽대상으로 삼고 이용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진정한 포퓰리즘은 포퓰레이스(Populace)를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동반자로 본다. 그래서 진정한 포퓰리즘은 대중의 자각(自覺)을 전제로 한다. 대중의 자각이 없는 포퓰리즘은 또 다시 포퓰리즘을 교묘히 이용하는 지도자들에게 농락 당한다.

따라서 대중을 구성하고있는 개 개인들의 주체적 자아 확립이야 말로 건전하고 바람직한 포퓰리즘 실현의 필수요소이다. 주체적 자아는 소위 '....카더라'에 대해 의문 부호를 붙이면서 시작된다.

누가 뭐라 카더라.  모 교수가 뭐라 카더라. 우리 목사가 뭐라 카더라. 어느 신문이 이렇다 더라. 프로이드.. 칼융,..갈 브레이스, 아담 스미스 따위 등 등.
 
그 누군가의 '카더라'가 전혀 쓸모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참조 수준의 쓰임새는 인정하지만 일단 의문 부호를 붙이고 검증작업을 거친 다음에야 진리로 받아들일지 아닐지를 결정한다.

특히 '카더라'라고 말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수준, 정치적 입지를 충분히 고려한다음에 그의 발언에 덧붙여진 사적 편견을 걷어 내야한다.

이제 민중도 개인의 의식과 가치관은 결코 그 자신의 사회적 자리와 동 떨어져서 객관성을 지니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 쯤은 안다. 

특히 미국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우리 지도층 인사는 더할 것이다. 구라파에서는 지성의 의미가 자기의 자리를 떠나 객관적으로 사물과 상황을 볼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라도 있으나 북미에서의 지성은 더 많이 배운 사람이라는 뜻만 더 강하다.

자기 자리를 떠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정치와 사회, 경제 현실을 볼 줄 아는 정치인, 교수, 관료, 언론인, 성직자과 과연 몇명이나 될까?
 
진정한 포퓰리즘은 개인들이 학습과 경험을 당장 진리(眞理)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의 일리(一理)로만 받아들여 나의 주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영양소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주체적 자아와 신기루는 같이 갈 수없다. 일시적 동반은 가능하나 곧 신기루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다시 신기루 너머의 참 오아시스를 찾아 길을 떠난다.

지난주에  노무현 대통령을 환상을 깨는 미래인이라는 의미의 글도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폭로와 열어 젖히는 정치는 적어도 시대적 대세와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와 여러 여건이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식 정치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있다.

▲박스에 담겨있는 돈다발     ©SBS
왜? 21세기는 그동안 '가라사대 족'들의 마법에 걸려 신기루를 좆았던 환상에서 소시민들이 깨어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오늘아침에 차마 믿고 싶지 않은 검찰의 발표를 읽었다. 한나라당 제정 위원장 실에서 A 4용지 박스와 라면 박스속에 수백억원의 현금을 가득 담아 4단으로 쌓아 두었다는 것이다.

아!... 바닥에 쌓아둔 돈 박스로 사무실 출입이 어려운 정도라니.
이런 분들이 우리의 지도자였나? 우리 국민들은 이 분들을 선량(選良)이라고 따라 왔었나?

한 나라당만 비난하자고 이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디 민주당이나 열린 우리당등 정치인치고 누구하나 불법 정치자금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우리가 오매불망 지도자로 추종하고 맹목으로 밀었던 '가라사대'족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신기루였음을 깨달으면서부터 진정한 포퓰리즘의 시대는 열린다.

자!!! 우리 이 가슴 벅찬 포퓰리즘 시대의 개막에 대해 다음주에 더살펴 보자.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강화도 : 미래신화의 원형]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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