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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떠난 강속구, 빛도 없이 거름만 남아
[정문순 칼럼] 프로야구 600만 관중에 묻힌 고 최동원 투수의 희생
 
정문순   기사입력  2011/09/15 [17:49]
무쇠팔, 황금의 오른팔, 불세출의 투수라 불리던 이가 세상을 떠났다. 고 최동원 전 한화야구단 2군 감독은 선수로서 전성기를 보내던 70-80년대에 야구만화의 단골 모델이었다. 실제로 마운드 위에 선 그의 모습은 만화 주인공에 맞아떨어지는 풍모였다. 출중한 실력은 물론이고 위기가 닥치면 더욱 강해지는 승부사 기질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 타자를 압도하는 강렬한 개성은 만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희귀한 캐릭터였다. 공 던지는 일을 전투하듯이 했던 그는 전생에 아무래도 날렵한 협객이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만화와 똑떨어지게 닮은 것은 그라운드 밖의 파란만장한 그의 삶이었다.

나의 경우 아마야구와 국가대표 시절 고인의 전설적인 활약은 풍문으로 듣거나 아동잡지 사은품으로 딸려왔던 야구공이나 사진으로 기억하지만, 1984년 한국시리즈 7경기 중 혼자서 4승을 이룩했던 '말도 안되는' 활약을 포함하여 그의 프로선수 시절은 브라운관에서 친숙히 접할 수 있었다. 야구를 모르는 엄마도 금테안경이 빛나는 사나이의 이름 석 자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야구에 울고 웃는 부산 사람들에게 고인은 언제나 '우리 (최)동원이'었고, 억세고 거친 경상도 사람들의 안면에 웃음을 머금게 해주는 존재였다.

고인은 당시로서는 희귀한 억대 연봉의 최고 선수로 대우 받으며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편하고 쉬운 길을 가지 않았고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로서 사회적 책임감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 점은 실력에서는 자신과 막상막하 쌍벽을 이뤄 지금도 야구 게시판에서 둘 중 누가 낫냐며 야구팬들이 갑론을박하게 만드는 라이벌이지만, 훗날 한국야구위원회에 있던 시절 선수권익단체 결성으로 고초를 겪고 있던 후배들을 방관했고 그 자신은 프로야구단 감독까지 승승장구했던 선동렬 전 투수와 어쩔 수 없이 대비되었다.

80년대 후반 프로야구가 1‧2군 체제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절, 고인은 생활임금도 못받고 계약서 한 장도 없이 언제든 나가라는 말 한마디면 옷을 벗어야 하는 파리목숨 2군 선수나 연습생들의 피눈물 나는 처지를 수수방관하지 않았고, 제왕적인 재벌 야구단은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라도 연봉 협상에서 구단이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금액에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으면 옷 벗는 것을 각오해야 했던 시절에 구단의 일방적 횡포에 대응하기 위해 선수 모임을 꾸리는 것은 구단주의 입장에서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인은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하자 아마에서 프로까지 줄곧 자신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롯데 구단으로부터 내쳐짐을 당해야 했다. 그나마 최동원이었기에 방출되지 않고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형식이 취해졌지만, 유니폼을 바꿔 입은 후 선수 생활도 곧 종지부를 찍었다. 서른 살을 조금 넘은 나이에 남은 것은, 지금처럼 투수 분업 체계가 없던 탓에 선수 생활 내내 어깨를 쉴 틈도 없이 하루 걸러 마운드에 오르며 이 악물고 통증을 버티고 공을 던지느라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다.

은퇴 후의 삶도 고인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대로 흘러갔다. 팀에 공헌한 선수는 은퇴 후에도 해당 구단에서 코치로 채용되거나 지도자의 길을 밟는 데 도움을 받는 것이 관례이다. 최동원 같은 이라면 마운드를 떠난 뒤에 지도자 수업을 오래 받지 않고 당장 감독으로 온다고 해도 팬들이 열렬히 환영했겠지만, 구단에 밉보인 최고 선수는 청춘을 오롯이 바친 고향 팀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다른 팀의 코치나 2군 감독을 간혹 맡으면서 야구계의 주변인으로 맴돌아야 했다.
 
정치에 뜻을 두었던지 3당 합당 이후 보수세력의 텃밭으로 전락한 부산에서 민주당에 입당하여 시의원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강속구 같은 정치를 하겠다고 선거 홍보물에 포부를 새겼다. 그러나 세상은 타협을 모르는 고인에게 선수 시절 같은 강속구의 위엄을 발휘할 기회를 쉽사리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한동안은 텔레비전 오락프로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방송에서 본 고인은 유쾌하고 말재간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쪽에 재능이 있어서 방송을 타는 줄 알았지만, 고인은 훗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으려고 방송에 출연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의 끓는 속도 모르고 사람들은 야구인이 오락 프로그램에 나온다고 손가락질을 했고 그런 대접이 그를 힘들게 했다고 한다. 선수로서 모든 영예를 일구었던 고향에서 하늘색 유니폼(롯데 자이언츠)을 다시 입고 팬들 앞에 나타나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거창할 것 없는 소박한 꿈이었지만, 영영 이룰 수 없는 한으로 남았다.
 
선수 시절 세상의 찬사를 독점했던 화려한 영광과 대비되는,  그 자신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은퇴 후의 소외와 외로움이 그의 건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몇 십년 간 운동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이 많지도 않은 나이에 병마로 스러지기까지 그동안 겪은 고초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몸을 갉아먹었을지 모른다.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한 날 신문은 올해 프로야구 관중 600만 명 돌파를 알렸다. 프로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공헌한 이를 뽑는다면 고인은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시대를 앞서 간 고인의 선구적인 희생은 헛되지만은 않아서 훗날 프로야구선수협의회가 다시 출범하는 밑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600만이라는 숫자에 선수의 고혈을 빨아 잇속을 채워왔던 프로야구 구단의 독선적 행정과 선수들의 희생이 덮어진다면 여간 공평한 일이 아니다. 최동원 선수 같은 이의 희생으로 쌓아올린 프로야구의 인기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선수가, 구단만 있고 선수는 없는 야구판의 희생양이 되는 일이 없도록 고인을 제대로 기리는 방법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이들의 몫임을 강조하며, 그의 안식을 빈다. 고인을 잊지 못할 존재로 만들어준 한국시리즈 경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여의치 않다. 그나마 아마야구 시절 활약은 몇 장 사진이 전부이다. 우리 시대가 의미 있는 삶을 남기고 간 이를 기억하는 방식은 이렇게 천박하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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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9/15 [17:4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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