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출산은 여성 몸에게 물어보라
[정문순 칼럼] 아이 낳을 권리마저 막는 MB정부의 출산 정책
 
정문순   기사입력  2009/12/20 [20:20]
최근 일군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적이 있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 수술로 먹고살더라는 풍문을 생각하면 자못 뜻밖이기는 하다. 그러나 해당 의사들의 개인적 동기야 휴머니즘에서 싹 텄다고 하더라도 그 이면을 떠받치는 것은 제 살 깎아먹기 짓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내몰릴 정도로 절박한 의사들의 처지다. 저출산 현상 때문에 병원에 오는 환자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의료 산업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의료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출생률 감소로부터 무풍지대에 놓인 산업은 없다.  

해마다 OECD 국가들의 출산율 순위만 발표되면 나라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한동안 떠들썩해진다. 정부의 진정성 없는 출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오르는 시기다. 그러나 세계 최저의 출산율에 골머리를 앓는 정부든, 가임기 여성과 육아에 대한 지원을 게을리 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이든, 출산을 관리하는 주체가 여성 자신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여성이 아이를 많이 낳도록 정부 지원이 많아져야 한다는 목소리는, 아이 낳기는 여성의 당연한 일이요, 출산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정부의 역할도 정당한 것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출산은 언제나 국가경쟁력이니 국익이니 하는 차원에서만 언급될 뿐 여성 몸의 자율적 권리와 관련지어 파악하는 시각은 애써 무시되고 있다. 여성 몸에 일어나는 현상을 여성의 권리에 속한 영역으로 인정하기보다 국가적 이익에 귀속시키는 한, 산아 제한이든 출산 촉진이든 여성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정부의 권력 행위는 쉽게 정당성을 얻는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교육처럼 백년지대계를 거스르는 것도 없다는 역설을 입증한다. 교육 정책 못지않게 백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은 정부의 출산 정책이다. 백년은커녕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정부 정책은 일관성 없는 갈지자 행보를 펼치고 있지만, 정부는 여성 몸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일관성만큼은 포기한 적이 없다.  
 
▲ (자료사진)     © CBS노컷뉴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신물나게 들으며 성장했던 나는 정부 정책의 일관성 없는 일관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세대다. 또래 중에서 평균보다 식구가 많은 축에 속했던 나는 어릴 때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누가 형제자매 숫자를 묻는 것이 싫었다.  부모님은 나만 해도 늦은 출산이었지만 아들을 낳고 싶은 소망이 일그러지자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단산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던 때는 전후 베이비붐으로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던 정부가, 한창 출산을 억누르기 위해 피임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피임 도구가 국가적으로 보급되었고, 낙태마저 출산 억제의 일종으로 묵인되었다. 출산을 정부 차원에서 억지로 통제한다는 것부터가 군사정권다운 발상이었다. 군사정부는 여성이 아이를 낳을 권리마저 간섭하고 몸을 지배하려고 들었고, 고속도로에 국토가 난도질당하듯 자궁은 생명을 빼앗기고 황폐화를 강요당했다.

다출산이 시대착오적이고 낙후한 이미지로 낙인찍힌 것이 이 시기다. 그러다 남한 인구가 4000만 명을 돌파하자 둘도 많으니 하나만 낳자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한다. 둘도 많이 낳는 것이 돼버리니 아들 선호 심리와 여아 낙태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고 다음 해에는 태어나는 아이의 성비불균형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소동이 불과 25년 전의 일이다.  

아이 많이 낳는 것이 국가정책에 위배되는 행위에서 삼십 년도 못되어 역전되는 한 정부 정책은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아이 낳자는 말을 아무리 떠들어도 통하지 않으니 이제는 출산이 여성의 의무요,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건 여자도 아니라는 '이념' 공세까지 가해진다.  

여자라면 덮어놓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출산은 모든 여성이 해야 하는 일도, 모두에게 즐거운 일도 결코 아니다. 출산을 겪으면서 내 몸에 남은 기억은 유쾌한 것이 별로 없다. 아이를 낳은 직후부터 몇 년 동안은 치과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치아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수유를 하면서 일어난 신체 변형은 원상회복이 불가했다. 몸의 영구 변형을 안타까워하는 내게 모성 찬양의 목소리는 가소롭기까지 하다.  

본디 자본과 저출산은 서로 상극에 자리한다. 세계 최저 출산율 통계 따위에 동요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인구가 많아야 한다는 건 환경을 무지막지하게 파괴하면서까지 고속 성장해야 사는 산업 논리를 전제로 하는 주장일 뿐이다. 인구가 감소하면 자원을 쓰고 버리는 데 걸신이 들린 지금까지와는 자연히 다른 방식의 삶과 체제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출산율에 동요하지 않는 태도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체제, 다른 세상을 고민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국가의 인구 증가 정책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내 몸을 국가 정책의 도구로 내어주지 않은 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10개월 동안 몸속에 배태하고 있어야 할 여성 몸에 물어보라. 출산의 주인은 여성 그 자신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9/12/20 [20:2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나그네 2010/02/25 [03:08] 수정 | 삭제
  • 문순씨, 당신이 여성운동가라면 저출산의 문제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출산의 문제에 대해서 왜 아이를 적게 낳을 수 밖에 없는가라는 식으로 위에 분의 말씀처럼 육아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과 육아의 중요성과 고됨에 대한 인식의 재고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글쓴이가 말하는 것처럼 출산은 여성의 선택이니 입닫고 있어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 같군요.
    그리고 한가지만 더 다소 거칠게 이야기합시다. 당신은 어머니가 키워주지 않으시고 하늘에서 똑똑한 상태로 떨어졌습니까? 어머니의 희생을 생각한다면 어머니께 은혜를 보답은 못하더라도 자식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만히 놔두면 크는 것이 자식입니까? 수유를 통한 신체변형을 걱정하는 글쓴님의 말은 진짜 정이 안가는군요. 자식도 낳으셨다는 분이 어찌 그리 말씀을 하시는지요?
  • 독자 2009/12/25 [08:19] 수정 | 삭제
  • 애를 낳고 말고는 자신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애를 낳은 이후의 문제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글이 한쪽 얘기만 전달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문제가 아니라 애기를 낳아도 편하게 키울 수 없는 의 문제가 더 크다고 봅니다. 육아의 문제는 개인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에도 이를 숨기고 은폐하며 언론도 무개념으로 이를 접근합니다. 일테면 MBC의 한 보도를 보면 '국공립 보육원은 인기가 높아서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개념없는 기자의 멘트입니다. '인기가 높아서 들어가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쥐구멍하게 만들어 놓고 들어가라고 하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죠. 저출산의 한 원인과 육아빈곤은 국가범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