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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기억, 자책과 분노 사이에서
사회적 통념에 발목잡힌 여성, 피해자 두번 죽이는 가해자들
 
정문순   기사입력  2003/08/11 [11:54]

햇빛 아래
 
▲대학교수의 성희롱에 대해 항의시위하는 모습
최근 들어 대학가나 직장에서 성폭력 사건이 공개되는 일이 매우 빈번해지고 있다. 신문 지면이나 인터넷을 뒤져 보면 어느 대학이, 어느 사업체가 성폭력으로 물의를 빚고 있더라는 기사는 쉽게 눈에 뛴다. 특히 대학가의 경우 성폭력 논란이 없는 곳이 몇 군데나 될까 의문이 들 정도로 쉴 새 없이 사건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성폭력 사건의 빈발한 공개가 곧 성폭력의 급증을 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용케 은폐되거나 그냥 묻혀 버렸을 사건들이 이제는 햇빛 아래 속속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리라. 그런데도 그나마 성폭력 사건을 숱하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자신이 당한 피해를 떳떳이 말하고 공론화시킨 피해 당사자들 덕분이라는 점은 그다지 주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성폭력 사건들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없던 일인 양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한 피해자는 감당하지 못할 불이익을 겪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건을 공개한 후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가 궁지에 몰리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직장이나 학교 등에서 발생하는 위계 관계에 의한 성폭력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가해자가 직장 상사나 동료일 경우 피해자는 근무 환경이나 고용상의 불이익을 염려해야 하며, 대학원의 논문지도 교수가 가해자로 등장할 경우 피해 학생은 학문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른다. 그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사건 공개를 결심하는 순간 자신이 싸워야 할 성폭력 가해자는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두둔하는 그 주변 또는 뿌리 깊은 사회적 통념에 의해 저질러지는 '2차 성폭력'이라 할 만한 공격으로부터 거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접적 성폭력 못지않은 이런 침해 때문에 피해자는 두 번 울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이런 걸림돌들이 치워질 수만 있다면 입을 여는 피해자들이 봇물 터지듯 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장애는 가해자 측의 보복 등 눈에 드러나는 외부적인 것들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사건이 공개되어 해결된다 하더라도 피해자들이 성폭력에서 얻은 충격과 상처는 쉽게 아물어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입을 다문다고 하여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말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말해서 겪는 것보다 결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아무리 큰 고통을 무릅쓰고서라도 피해자 스스로 성폭력의 피해를 수용하게 만들기도 하는 기제가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든 것은 왜일까. 앞에서 성폭력 공개의 불이익 운운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피해 사실을 공론화시킨 피해자의 아픔을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입을 열지 못하는 피해자의 사정이라면 경우가 다르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눌한 재생
 
무언가를 써야 하는데 뜻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만큼 딱한 일도 없을 것이다. 밥을 먹다가도, 잠에서 깨어날 때도 수시로 쳐들어와 평온한 일상을 비웃던 기억을 막상 문자로 옮겨 놓으려니 이런 고역도 없을 성싶다. 입안에 맴도는 말을 겨우 붙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오려 하면 어디론가 꼬리를 감추기 일쑤였다. 하도 글이 굼뜨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다가 돌연 일상을 흔들어 놓던 그림자는 혹시 실체가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자꾸만 기운다. 어쩌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집착한다고. 그래서 내 뇌리를 쉬이 떠나지 않는 이 불편한 기분에서 놓여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믿어 버리고 싶다.       
성폭력 피해의 후유증이랄까, 그것과 관련된 감정 상태를 몇 마디 어눌한 언어로 늘어 놓는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기억하기 힘들 만큼 무수한 생각이 내 안에서 난립과 명멸을 거듭해 왔다. 묵은 감정이 반복되거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느낌들이 서로 충돌하며 싸웠다. 그 과정에서 지쳐가는 것은 나였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떠오르는 대로 몇 마디 말을 주워 섬겨 보자면, 적지 않은 피해자들의 경우엔 분노와 자책이라는 심리가 동반되지 않을까 한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그 상황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충돌한다고 말하면 터무니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의 경우에도 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살의 한 쪽은 나 자신에게 꽂히고 나머지는 가해자를 향해 날아갔다. 가해자에게 미처 발산하지 못한 분노는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아왔다. 무엇보다 나의 자괴감은 성폭력을 입었다는 데서 오는 수치심보다, 피해를 당하고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태도에 있었다. 항변하고 따져야 하지만 입을 열지 못하는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었고, 가해자에게 당신이 내게 피해를 주지 않았느냐는 의사 표현도 전혀 하지 못하는 참담함이 나를 짓눌렀다. 사건을 공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상대에게 나의 뜻을 전달하는 한 마디조차 그렇게 하기 힘든 일이었을까? 그랬다. 나를 고민에 빠뜨린 것은 이미 세월 저편의 과거에서 불러낸 기억이었다. 십수 년 전의 성추행을 가해자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건 나로서는 어떤 일보다 독한 마음을 품어야 하는 일이었다. 누가 보아도 어처구니없다 할 것이다. 대학 초년생 시절 교수에게 추행을 당하고도 그 당시는 물론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것을 성폭력으로 인지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납득될 수 있을까. 
  
*******을 가르치는 *** 교수의 수업 시간은 많은 여학생들 앞에서 예사로 성적 희언이 질펀히 쏟아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학생이었다. 교수의 일을 도와준다고 한동안 빈번히 연구실에 들른 이후에 일어난 일에서도 그랬다. '빈번히'라는 말에서 나는 평정을 잃기 쉬운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그것은 내 몸에 가해진 최소한의 성희롱의 수치와 일치한다. 몸의 접촉은 연구실에 들를 때마다 반복된 일이었다. 포옹을 당할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어이없게도 그때 내 몸의 반응은 불쾌함이나 거부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교수님이 내가 좋아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을까? 그 상황을 떠올리면 몸에 뱀이 훑고 가는 느낌을 견딜 수 없는 지금의 나와, 그때 숱한 포옹을 당하면서도 모욕을 느꼈다는 기억이 없는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인 건 마찬가지였다. 졸립다며 연구실 구석의 침상에서 잠이 든 교수를 깨우러 가는 참이었다. 그때 눈을 뜬 교수는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사탕 빨 듯하던 그 교수. 그 상황에서도 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교수는 아무 일도 없는 듯한 무심한 시선을 내게 던졌고, 나는 손을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내가 성에 대해 그리도 캄캄했을까.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보아도 그때 불쾌했다거나 하는 기억이 없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성적 접촉은 유아라도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때 내가‘더러움이 묻은 손을 훔치지도 못했다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에 반발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였는지 모른다. 혹여라도 성폭력 피해를 스스로 인정하기를 거부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교수가 설마 내게 나쁜 마음을 먹을 리 있겠느냐고 생각해 버렸던 것일까. 믿고 싶지 않지만, 만약 교수가 제 실수를 깨닫고 미안해할지 모르는 불편한 상황을 내가 피하고자 한 행동이라면. 노예의 도덕이라도 이런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 나이 때 나는 유순하다는 말을 가끔 들었던 것 같다. 어른이 시키는 일 앞에 이견을 달 생각을 하지 못했고, 칭찬이라도 받으면 좋아했던 것이 그 무렵 내 모습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교수 역시 나한테야 '어른'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수업까지 기꺼이 결석한 적도 있다. 훗날 만났을 때 교수가 나를 '착한 여학생'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도 빈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건 나만의 경우가 아니라 대개의 학생들도 교수에게는 말 잘 듣는 제자일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교수의 행동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눌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학생에게 교수라는 존재는 하늘이나 다름없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의 드높은 권위라면 어린 여학생을 희롱하고도 반발은커녕 의심을 사지 않는 일조차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생에 대한 교수의 힘은 상식적인 판단조차 얼어붙게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면 그건 내 변명이나 합리화에 불과한가. 
성적 무지 때문이든 '어른'이 베푸는 호의로 받아들인 것이든, 그 아무렇지도 않은 감정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내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몸의 기억을 언제까지나 부정하고 망각할 수는 없었나 보다. 몸이 정직하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릴 때 성폭력을 당하고 피해자가 충격으로 잊어버리는 경우, 성장한 후 이성을 알게 될 때 기억이 되살아나는 수가 있다고 한다. 내 몸에 가해진 예사롭지 않은 일을 각성하는 계기 역시 그와 비슷했다. 적어도 그 교수와의 몸 접촉은 내가 이성에게서 느끼는 친밀함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몸에 손을 대도 좋다고 그 교수에게 동의해 준 적이 없으며 더구나 성적인 교감 따위를 느낀 적은 추호도 없다. 내 몸에 가한 교수의 행동이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없다는 자각이 그제야 수면에 떠올랐고, 농락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자 그때부터 견디기 힘들어졌다.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내게 어렴풋해져가는 기억 저편의 일은 더 이상 과거가 될 수 없었다.
모욕을 당해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굴욕을 느끼게 하는지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대로 수모를 참고 넘어가야 하나 생각이 들면 무너질 듯한 무력감이 엄습해 왔다. 일찌감치 했어야 할 고민에 뒤늦게 붙들리는 건 내가 보기에도 우습기는 했다. 그러나 몸에 대한 침해를 영영 용인할 만큼 내 몸은 아무렇게나 다루어져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내 존엄성을 결코 부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지금이라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물론 이제 와서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오랫동안 망설임을 낳았다. 남에게 어려운 말을 잘 꺼내지 못하는 나다. 나의 소극성과 아둔함, 성폭력도 인지 못한 어리석음이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가해자에 대한 분노는 결코 억누를 수 없었고, 찾아가 담판을 내지 않으면 해소될 것 같지 않았다. 만나기만 하면 일이 시원하게 풀리리라 기대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준비가 소홀했다. 오랜만에 자신을 찾으러 온 제자를 '은사'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돌다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 뒤로 몇 차례 더 찾아갔으나, 돌아오는 길은 번번이 빈손이었다. 그렇게 보낸 세월만 10여 년이다. 사과해달라는 말은 최근에야 입에서 떨어졌다.
그만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굴뚝 같았으나 몸에 새겨진 불쾌한 기억은 지우고 싶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성폭력의 교과서적인 정의로는 나의 피해 정도를 온전히 설명해 낼 수 없다는 답답함에 숨막히기도 했다. 대놓고 말해 내 몸은 노리개 취급을 당한 것이 아닌가. 당신은 왜 나를 그렇게밖에 대우하지 못했느냐고 당장이라도 멱살을 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성적 침해를 받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고 힘없는 여자라는 것밖에는 없다. 그것은 나의 여성성, 여성적 자질에 대한 훼손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의 문턱에 들어설 나이에 나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그것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부인 당한 셈이 아니겠는가.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우월한 남성성을 과시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밖에 치부되지 않은 것일까.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그런 식으로 왜곡을 가하려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면 들끓어 오르는 마음과 극심한 모멸감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치솟는 울분을 감당할 수 없더라도, 가해자에 대해 사람도 아닌, 인간도 아닌, 등의 극단적인 표현을 동원하여 내가 당한 일이 더없이 모욕적인 일이라고 규정해 보아도, 내가 휘둘린 건 결코 적의에 가까운 분노만이 아니었다. 교수는 나를 반가워했고 낯빛이 밝지 않아 보인다고 안쓰러워했다. 교수의 환대에 눈 녹듯 풀리고 있는 마음을 나는 어쩌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교수에게 나는 함부로 대해도 좋은 어린 여학생이었다. 그 자리에서조차 성희롱적 언사가 내 귀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맥이 풀렸다. 저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면 그때 일은 마음으로 용서해도 좋지 않느냐는 생각이 몰려왔다. 까마득한 일을 꺼내면 교수가 얼마나 당혹할까 염려까지 해줄 지경이었다.
내가 가해자를 동정하는 피해자가 되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상에서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마음이 약해졌다.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은 차마 그럴 수 있느냐는 생각을 넘으려다 추락하기 일쑤였다. 정작 가해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를 놓고 혼자서 분노와 연민으로 널뛰기하다 몸이 축날 듯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피해자의 고통은 별로다         
 
사과를 받으려고 간 자리에서 되려 가해자가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했다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조차 알 수 없게 하는 행동일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의 상처를 무위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일 뿐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이상하게도, 피해를 당한 이후로 가해자에게 줄곧 매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당하지 못한 내 태도를 나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제 와서 내가 그런 문제를 들추었다 하여 무슨 불이익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피해자답지 않은 내 태도는 나의 소극성이랄까 개인적 성향 탓일 수도 있지만,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라는 늪에서 피해자인 나 자신도 헤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가해자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대처한다고 할 수 없는 다른 피해자들의 경우도 나와 같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 해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성폭력 가해자를 노골적으로 두둔하다 물의를 일으킨 발언에서, 나는 적지 않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망설이고 고통을 혼자 감수하는 길을 택하는 심정의 일단을 읽을 수 있었다.
문제가 된 정 총장의 발언만큼 성폭력과 관련하여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의 속내가 물처럼 투명하게 노출된 것도 드물 것이다. 정 총장은 당시 여성부 장관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10여 년 전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법정에서 다루어졌던 '신 교수-우 조교 사건'에 관한 언급이 나오자, 가해자와의 친분을 거론하면서 사건이 '과장'되었고, 신 교수가 가해자로 억울하게 몰렸다는 사견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성폭력은 "운동 차원에서 당연히 해결돼야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아주 죽을 맛이고 매장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그에게 가해자 신 교수는 가해 여부나 그 정도를 떠나 '사회 정의'와 '운동'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건 집단(여성단체)에 희생된 무력한 개인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졸지에 피해 여성은 목소리 큰 '집단'의 일원이 되어 가해자를 압박하는 공룡이 되어버린다. 물론 그의 발언은 근거 없이 가해자를 편듦으로써 피해자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2차 성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말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흘려 버리기에는 가슴을 찌르는 바가 없지 않다. 피해자에게 냉소적이다 못해 오히려 그를 매도하기까지 하는 정 총장의 발언이 그만의 특유한 사고방식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가 입을 닫기를 원하는 사회의 지배적인 성 인식을 매우 솔직하게 드러낸 것에 불과한 것이라면, 피해자라도 그런 지배적 통념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가해자와 그 가족이 당하는 고통이 보기 안타까웠다는 정운찬 총장에게 그 반대편에 있는 "상대 여성의 고통은… 별로다". 피해자의 고통은 가해자가 겪은 것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발언이 가해자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느냐 하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것 못지않게 피해 여성들이 가해자를 대하는 심정의 한 자락이 반영된 것으로 읽혀질 여지가 있다. 나 역시 그 교수에게 자신이 성추행을 범했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할 경우 그가 입게 될 상처가 눈에 아른거렸다. 가해자를 할퀴게 될지 모를 상처에 집착하는 순간만큼은 나의 고초는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이 되어 뒷전으로 밀쳐지고 있었다.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닐 텐데. 실수일 수도 있고,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호랑이 담배 필 적 일을 되새기는 건 내가 과민한 탓은 아닌지. 내 몸이 그리도 귀하며 금덩이라도 되느냐는 생각까지 스쳐갔다. 이처럼 고작 사과를 요구하는 문제를 두고도 가해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잡힐 정도라면, 사건을 공론에 부쳐야 할지 여부를 고심하는 피해자의 경우라면 더 큰 걸림돌을 만날지 모른다. 성폭력 문제 해결에서 "개인의 권위가 너무 추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며 정운찬 총장이 가해자를 걱정해 주지 않아도, 피해 여성은 자신으로 인해 사회적 권위를 가진 가해자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거나 '매장'당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거나,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남의 권위를 손상시켜도 좋은가 하는 생각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은 소설
어쩌면 내가 싸워야 할 가장 큰 岵?가해자라기보다 내 발목을 잡고 있는, 태어난 이후 수십 년 동안 내면화되어 내 사고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통념이었는지 모른다. 그 통념과 잠시나마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이 가능할 때는 숱한 생채기로 너덜너덜해진 내면을 더 감당할 힘이 없을 때였다. 사과는 제쳐두고라도 어쨌든 가해자가 알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편지를 부쳤다. 내 불편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한동안은 털어 놓은 것으로도 족하려고 했으나 오지 않는 대답에 마음이 쓰였다. 그 뒤로 전자 메일이 두어 번 갔을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예의마저 상대방은 헤아려 주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육성으로 말해 주기 위해 전화 통화를 하자 교수는 대뜸 자신을 괴롭히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소설'을 쓰지 말라고 했다. 숫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취급이었다. 사과가 없으면 나만 알고 있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해 주자 협박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찾아가겠다는 내 말은 거절당했다. 그 통화 이후로 나는 아직 저를 '괴롭히지' 않고 조용히 있으니 교수는 안심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게 사과할 일이 무어냐고 그가 말했을 때 사과의 사유를 내 입으로 자세히 읊어주지 않았다고, 거친 욕이라도 한 마디 해주었어야 하는데 공손히 굴었다고 나 혼자 분을 삭인 것은 알 리 없을 것이다.
학교와 여성단체에 도움을 청해 봤지만 기대하기는 힘들었고 온전히 나 스스로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당당해져야 한다. 나는 그의 면전에서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사과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했다면, 모욕당한 몸의 기억을 완전히 과거로 보낼 수는 없더라도 내 곁에 여전히 잠복하고 있다 불시에 나를 붙들 것 같은 어두운 그림자로부터는 놓여날지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인처럼 남은 기억이 일상을 언제 다시 침해할지 모르는 두려움과, 삶의 낙을 접고 싶은 무력감이 언제라도 치밀어 오를 것 같은 초조함을 나는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당당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언제 나를 다시 흔들어놓을 만큼 커질지, 그때 기억이 얼마만한 강도로 나를 포박해 올지 짐작하기 힘들다. 그때 교수가 내게 던지던 무심한 시선은 아직 내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다. 내 소극성과 피해자로서 줏대 없음에 대한 대가를 이제는 그만 치르고 싶다는 생각, 과분한 것일까.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 본문은 격월간 아웃사이더(http://eoutsider.co.kr) 14호에 게재된 글을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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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8/11 [11:5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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