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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은 테크니션인가 이코노미스트인가?
[비나리의 초록공명] 대한민국에서 진짜 괜찮은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우석훈   기사입력  2007/05/01 [13:06]
테크니션과 이코노미스트
 
내 대학교 때 학점은 상당히 우습다. 제일 높았던 게 3.5였고, 낮을 때는 2점 대 후반도 몇 번 있다. 그래도 운동권 학점 치고는 상당히 높은 편이라서, 거의 수업 안 들어가고 시험만 대충 쳤던 거 치고는 선방한 셈이다. 그 시절에 학기말 고사를 딱 두 번치고, 거의 매번 시험거부가 생겨서 꼬박꼬박 시험을 안 봤다. 요즘하고 비교하면 정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중간고사 점수로 대충 아름해서 학점을 주는데, 그래도 A 주었던 선생들이 참 마음이 넓기도 하다. 요즘 같이 출석 꼬박꼬박 불러서 칼 같이 F 주라고 하던 시기면 택도 없는 일이다. 그 시절에 수업이래봐야 개강하는 날 한 번, 잘 해야 한 번 더 들어가고, 친구들이 챙겨줘야 겨우 중간고사날 시험이나 보러 가는 정도라...
 
제일 기억나는게 수리통계학 중간고사였다. 죽어라고 문제 풀어야 하는 시험인데 시험 장소가 바뀌어서 20분 남겨놓고 겨우 찾아 들어갔다. 그 시절에 핸펀은 커녕 삐삐도 없으니... 시험도 못보고 그냥 담배 피고 잔디밭에 있는데, 마침 아는 대학원 선배가 알려줘서 겨우 시험을 봤다. 요즘은 모르겠는데, 그 시절에 수리통계학을 물통이라고 불렀다. 필수과목은 아니고 대학원 진학할 사람들이나 보는 공부하는 과목이다. 그래도 그 학기에 그 과목에 A가 나왔다.
 
나처럼 대충 시험만 보고 때우는 경우에는 문제가 엄청나게 어려운게 나오는게 유리하다. 별 이유는 아니고, 어려워서 다 풀 수가 없어야 공부 안한게 티가 안 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유학 간 다음에 정말 내 세상을 맞았다. 프랑스는 대학원부터는 수업 시간에 배운 거는 시험에 안 나온다. 물론 가끔 젊은 교수들 수업들 들으면 배운 거에서 문제를 내는 사람이 있기도 한데, 보통은... 배운 거는 너네 알잖아? 두 문제를 내는데, 한 문제는 한 학기에 배운 걸 대충 응용해서 아무 거나 쓰는 문제와 정확하게 써야하는 문제, 예를 들면 A4 2장짜리 계산하는 문제... 그렇게 나온다. 어느 편을 쓰거나 평균 점수는 비슷하게 하는데, 정확한 쪽 문제는 조금이라도 틀리면 점수가 아주 나빠지고 정확하게 쓰더라도 최고점이 나오지는 않는다. 길게 서술하는 문제는 잘 쓰면 거의 만점을 받지만, 방향을 잘못잡으면 A4 몇 장을 쓰더라도 점수가 하나도 안 나온다.
 
박사과정 때의 시험은 오픈 북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는데, 보통 4시간을 시험을 본다. 칠판에 간단하게 문제를 적어놓으면 알아서 쓰는 시험인데, 중간에 화장실을 갔다와도 되고, 나가서 커피 마시고 들어와도 된다. 커피 마시다가 컨닝하면 어떻게 해? 별로 상관하지는 않는다. 토론을 하고 싶으면 하고... 어차피 모르는 문제라서 토론해봐야 오해만 깊어지지 문제 푸는데는 별 도움 안된다. 프랑스 교수, 즉 대문자 P로 시작하는 Professor는 시험 봐서 종신교수가 된 사람들이다. 가난하지만 명예가 높은 사람들이라서 컨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거나 토론해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명예에 손상이 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기본 실력으로 시험 보게 만들어 놓은, 20점 만점에 18점이 내가 제일 높게 받아본 점수였는데, 이게 완전히 절대평가라서 내가 유명해졌던 시험은 12점 받았던 시험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부아이에와 오를레랑이 공통으로 진행하는 통계학교 - 우리나라에서 그랑제꼴이라고 부르는 - 와 파리 10대학 그리고 9대학이 공통으로 진행했던 수업인데, 10대학과 9대학, 즉 국립학교에서 에꼴로 수업들으러 갔다가 10점, 즉 '통과가능 점수' passable을 2명 받았는데 - 이 때 12점을 받았다고 상당히 유명해졌던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난다. ESS를 계산해서 아마 식칼 만드는 회사가 새로운 식칼을 만들게 될 가능성을 찾아내는 그런 문제였던 것 같다. Evolutionary Stable Strategy, 요즘은 고등학생들이 보는 생물학책에도 이 내용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91년도만 해도 이게 뭐였나... 하는 시기였다.
 
그 시절에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대형강의실에서 진행하는 <경제와 사회>라는 수업에서 들었던 얘기 하나가 갑자기 불현듯 기억이 난다. 대학원 시절의 2학기 수업이었을 거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3권짜리 <후기구조주의자의 역사>에 이름이 올라있는 환갑을 좀 넘은 사람들이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니체와 프로이드를 주로 배우는 수업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수업은 아주 인기가 높았던 과목이고, 점수가 짜기로 유명한 수업이다. 오랄 테스트라고 하는, 선생님 앞에서 구술하는 시험을 친다.
 
프랑스의 구술시험은 문제를 적어놓은 카드를 섞어놓고 그 중에서 한 장을 집는다. 만약 정말 모르는 문제라면 한 장을 더 집을 수 있게 해준다. "손이 원망스럽다"는 프랑스식 표현은 이 시험에서 나왔다고 한다. 나도 늘 손이 원망스러웠다. 나중에 시험 본 친구들하고 문제를 더해보면, 황당하게 어려운 문제만 집어드는 내 손이 얼마나 고맙던지... 나는 불어를 잘 못하니까, 내 입에서 떠듬거리고 답변을 들어야 하는 선생들이 더 고생을 했을 거다. 보통 외국인들은 작문시험을 구술시험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차라리 구술시험이 점수가 훨씬 높았다. 선생들은 내가 내용은 잘 아는데, 외국인이라서 말을 잘 못한다고 오해한 것 같다 (작문에는 오해가 아니라 내가 원래 잘 모른다는게 너무 명확히 나타난다.)
 
아마 그 학기의 경제와 사회에는 "프로이드의 세계에서 국가의 출현 과정"이라는 문제가 나왔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들들이 모여서 아버지를 죽이고, 그 살을 나누어서 먹고... 하여간 이런 게 정답인 문제이다. "법"이라는 단어까지 나와야 정답인데, 결국 답답해하던 선생이 "국회에서 뭘 하지?"라고 힌트까지 줘서 결국 내 입에서 법률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던 일이 있다.
 
니체에서 시작해서 프로이드에서 끝나는 이 수업에 수리경제학 분과의 학생들이 특히 많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이 과목이 왜 수학 전공하던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는지 그 기원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그 수업의 첫 시간이 끝나고 두 번째 시간에 나도 처음 본 수리전공하는 두 명이 내 뒷자리에서 10분 동안 얘기하는 걸 들었던게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는다.
 
얘기는, 한 명은 이 수업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싫어도 이걸 들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때 들어야 한다고 설명하던 친구가 했던 얘기가...
 
“이런 걸 안 들으면 너는 평생 테크니션으로 살아가게 되고, 이걸 들어야 비로소 이코노미스트가 되는 거다..”.
 
경제학 내에서는 테크니션이라는 얘기는, 간단하게 욕이다.
 
그는 멋진 테크니션이었다... 이런 거 논문에다 쓰면 학회에서 추방당한다.  그러나 그는 경제학은 하나도 모른다... 이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는 경제학자로서 기본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나도 10년 동안 테크니션으로 살아왔다. 통계를 맵시있게 다루고, 추세를 뽑아내어서 전망치를 뽑거나 수 억원짜리 연구용역 결과를 몇 개 발주해서 그 결과로 최종 결론을 내리는 일들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대체적으로 테크니션들이 하는 일들을 10년이나 했던 셈이다...

크루그먼이나 스트글리치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이코노미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이다. 크루그먼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에는 유능한 테크니션이기도 했다.
 
15년 전에 들었던 이 얘기가 불현듯 기억에 떠오른 것은 최근 드레스덴 출신의 피터 뢰젤의 피아노 연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매우 뛰어난 테크니션이기는 하지만, 그의 연주에서는 테크닉 보다는, 인생의 황혼에 절정에 달한 예술적 부드러움... 감동이었다. 벤자민 브리튼의 피아노 협주곡 13번, 원래도 브리튼을 좋아하지만, KBS 교향악단의 연주, 진짜 감동이었다 (전신이 국립교향악단이다...)
 
가끔 엔지니어와 사이언티스트 사이의 논쟁을 근접거리에서 볼 경우가 있다. 과학자와 공학자...
 
나도 테크니션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실 현실의 모습은 테크니션에 가깝다. 명제를 놓고 오랫동안 이리저리 폼을 바꾸면서 조율을 하고 조정을 하다가, 실제로 작업하는 순간이면 통계표를 사방에서 구해다가 결국 숫자들을 읽어내고 다시 새로운 숫자를 만드는게 주로 내가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원하는 숫자를 조사시키던 시절에서 요즘은 찾아야 하는 걸로 상황이 바뀌어서 어쩔 수 없이 있는 숫자에 내가 적응하려고 하는 편이다.
 
경제학은 양의 학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오랫동안 이 표현을 참 싫어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까 나도 양에 관한 것들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게 잘못된 건지, 맞는 건지, 한 3년 정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요즘 생각 같아서는 자신의 철학을 양을 중심으로 정리하는게 경제학으로서는 맞는 것 같다. 사람은 머리 수로, 능력은 숫자로, 그리고 아름다움은 돈으로 환산하게 된다.
 
정운찬 선생은 테크니션일까 이코노미스트일까? 솔직한 내 생각으로는 양쪽 다 아니다. 그는 교수다. 요즘은 470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열심히 계산하는 것 같다. 대선 출마 법정비용이 470억원인데, 이걸 어떻게 만드나? 계산해볼까? 누가 이 돈을 댈 것인가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한화그룹 김승연이 낼 거라고 했다. 그런데 한화의 김승연 회장이 조폭 사건으로 검찰에 갔잖아? 그럼 돈은 누가 대나? 아니, 그러니까 그 정도 더 돈을 댈 필요가 있지... (약 10년 전에 한화 콘도에서 경제학자들끼리 모여서 IMF 경제위기의 의미에 대해서 토론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나도 그 때 산업정책 가지고 발표를 한 적이 있다... 이 콘도 비용도 김승연이 댔다는 소문이...)
 
따져보면 모든 학문에서 테크니션과 이코노미스트 같은 논쟁이 있을 법하다. 똑같은 논쟁은 아니지만 생태학에서는 field study와 analysis 사이에서 유사한 논쟁이 있기는 하다. 결국 누군가는 필드에 나가서 데이타를 구해와야 하는데, 요즘은 생태학자라는 사람들이 연구실에 앉아서 이빨이나 까구... (뭐 이런 얘기를 종종 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론 연구를 이코노미스트라고 해서 약간 존중해주는 분위기이지만, 현장 연구가 강한 분과에서는 이건 순 ‘이빨이나’ 까는 얘기다. 심하면 남들 데이타를 베껴먹는다고 욕이나 먹기 딱 좋은 분위기...
 
직장에서도 유사한 논쟁이 있을 법하다. 아니 돈은 누가 벌어오는데, 지들은 데스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야... 이 갈등을 좀 멋지게 표현하면 라인조직과 스탭 조직의 갈등이라고 조직론에서는 표현한다.
 
그렇지만 한 개인 안에서도 이런 갈등이 있을 수 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거야, 손으로 하는 거야, 아니면 발로 하는 거야? 발로 뛴 자료를 손으로 계산하고, 결국 머리로 생각하고... 그렇다면 빅 마우스는? 걔가 공부 제일 잘 하는 얘야?
 
큰 연구(실) 시스템이 되면 이런 갈등이 상당히 골 아파진다. 황우석은 아무래도 머리의 기능보다는 마우스의 기능으로 특화된 전문 매니저에 가까왔던 것 같다.
 
서울대 경제학과에는 정말 이코노미스트라고 해도 괜찮은 선생이 한 분 계시고, 이코노미스트 말고는 할 게 없는 분이 또 한 분 계시다. 그리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불행한 것은 내가 유일하게 이코노미스트라고 생각하는 선생이 학생들 사이에서 평이 안 좋고, 그 수업은 잘 안 들으려고 한다.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좀 황당하다. 내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 가끔 조심스럽게 자문을 받거나 그 양반이 다른 곳에 써놓은 것을 읽고서 내 생각이 틀린 걸 교정하는... (우리나라에서 내가 나의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귀하들 보다는 훨씬 잘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이게 대학원생들이나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뜻이 잘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도 대충 입을 다물기는 한다.
 
테크니션이든 이코노미스트이든 진짜 괜찮은 사람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두운 한 구석에서 천대받고 구박받고 사는 경향이...
 
(에전에 10년 전에 시인들한테 이 테크니션과 이코노미스트 얘기를 한 번 했다가 새벽 4시까지 집에 못가고 붙잡혀서 고생했던 슬픈 추억이...)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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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5/01 [13:0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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