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陣) 짜는 법 공성이든 수성이든 진을 형성하면 훨씬 수월하고, 소위 '개싸움'으로 전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단독 출격도 일종의 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짜로 논의가 재미있게 되기 위해서는 진을 결국에는 짜게 된다. 3년 전, 내가 아직 하늘이 내려준 건강이라는 몸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내가 직접 움직이면서 진을 짰고, 대형을 갖추어서 질서 있게 움직이는 일을 아주 좋아했다. 진법이 흐트러지면 논쟁은 곧잘 개싸움이 되고, 서로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논쟁을 하면서 져도 이쪽에 뭔가가 도움이 되고, 이겨도 상대편에서도 뭔가 명예롭거나 지혜가 생길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건전하다는 것이 내 기본적인 생각이다. 큰 싸움이 시작되면 - 이명박의 경부운하가 좀 그렇다 - 서로 상대방이 누구고, 누가 주력군인지 알게 된다. 너무 친하게 되면 서로 곤란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너무 서로 모른다면 얘기가 겉돌아서 힘 빠지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공방전이 벌어지면 상당히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이 공방전으로 계속 난타전을 벌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저쪽을 이쪽의 함정으로 몰아가는 방향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서로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진용을 갖춘 논쟁에서는 서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 자기는 함정으로 안 들어가고 상대방을 함정으로 들어오게 하는, 그런 멋진 논쟁들은 몇 달간 지속되기도 한다. 진을 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포를 하나로 놓을 것이냐, 쌍포 체계로 갈거냐, 아니면 수많은 소총부대들로 갈 것이냐, 이런게 고민스러워지는 순간이 온다. 때때로 공갈포를 배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동안 농업 논쟁을 할 때 - 한미 FTA도 비슷했다 - 송기호 변호사와 박상표 수의사와 내가 몇 번에 걸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FTA 문제는 아니고 보건 체계 형성과 관련된 논의할 때의 일이다. 이 경우에는 송포, 박포 이렇게 쌍포가 앞에 나서는 주포들이고, 나는 박격포 - 난 좀 헛방을 잘 치는 경우가 많아서 - 로 원거리 지원을 하는, 그런 대형이 형성되었었다 (그 때마다 나는 내가 쏘는 원거리포에 아군이 맞지 않기를 빈다). 일부러 짠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진형이 형성되었었다. 유명한 이순신의 학익진은 대형 전함인 판옥선을 중심으로 화망을 구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생겼고, 이동할 때에는 장사진 같은 것을 사용한다. 나도 학익진 같은 거 한 번 펼쳐보면 좋겠다는 아련한 꿈이 있지만, 대개 단독 출격하고, 많아야 쌍포 이상 동원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소대병력으로 움직이는 셈이라서... 가끔 스나이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성격과 기질상 나는 스나이퍼가 잘 안 맞는다. 한미FTA의 경우로 보자면 사실 진짜 스나이퍼는 홍기빈 박사다. 레닌그라드 전투가 자꾸 떠올른다 (영화 <Ennemy at the Gate>의 쥬드 로는 너무 멋졌다.) 나나 정태인 선배는 너무 노출되어서 어떤 얘기를 할지, 뭘 주력 무기로 가지고 나올지 뻔한 상태다 (대충 이런 생각에 당분간 머리 박고 있으려고 하는데 그나마도 잘 안된다.) 원문 공개는 반전의 실마리 결국 한미FTA의 경우는 협정문, 보통은 프리앰블 아니면 협상가들끼리 은어로 cover letter라고 부르는 것 외에 아넥스까지 전부 공개하겠다고 한 것이, 1년 넘게 끌어온 FTA 싸움의 가장 큰 성과이다. 나도 제대로 된 협상문을 한 번도 못봤는데, 집중타가 결국 "알았어, 보여주면 될 거 아냐..." 이건 큰 성과다. 아넥스에 양허안이 들어가 있는데, 전에 김종훈하고 국회에서 논쟁했을 때에는 OECD 기준으로 직업별 개방 일정과 미래유보안 같은 것을 전수 조사했고, 그 체계에 맞춰서 들어간다고 그랬었다. (사회가 송영길이라서 나에게 더 발언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때부터 이 게임은 아넥스를 열거냐 열지 않을 것이냐에서 갈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넥스를 열면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직업과 자신이 하는 일이 어느 분류체계에서 어떻게 되어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에서 한 영어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그 아넥스를 뒤지지 않을까... 막상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협상가들 손에서 결정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 본다면, 기분 묘해질 사람들 많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앰버 박스니 블루 박스니 하는 얘기들이 아직 내가 꺼내들지 않았던 카드 중의 하나인데, 이것도 오늘 펴들었다. 이제 현 상태로서 아넥스를 직접 보기 전까지 내가 한미 FTA에 대해서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없다. 자중자애하며 은둔지를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내가 아넥스가 공개되기 전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기본 전략이다. 아마 아넥스가 열리면 쌍포니 주력포니 하는 진법에서 단발총을 가지고 각개약진하는 병사들의 돌격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진법의 양상이 크게 바뀐다. 저쪽에서는 경제5단체를 포함해서 큰 단체들을 움직인다. 기마병에 해당한다. 이쪽 진영에는 기마병은 없다. 격돌은 결국 7월 중순에 벌어질 것 같다. 발지대전투 같은 마지막 역전극은 8월에서 9월 사이? 그 시간 동안에 기마병이 준비가 될까, 그리고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넥스를 뒤져보고 자신의 발언을 시작하게 될 것인가? 책을 쓰고 나서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메이저 체인지에 해당하는 일은 바로 원문을 공개하겠다는 일이다. 여기에 6개월이라는 시간이라는 자산이 있다.
반대 18%, 희망은 여전히 크다 이 게임은 아직 모른다. 퍼스트 임팩트는 컸지만, 궤멸적 타격을 입지는 않은 상태이다. 박상표는 마음의 상처를 깊게 입고 연락을 끊고 은둔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옆에서 보는 마음은 좋지는 않다. 반대 18%... 이 정도면 해볼만하다. 황우석 2% 때에도 버텼었는데, 진이 잘 형성되면 정말로 해볼만할 것 같다. 민중, 이 경우에는 지휘관이 따로 없어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들이라고 그들을 정의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지휘본부 없이, 그리고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순간, 그런 2007년 7월이 올 것 같다는 자그마한 소망이 있다. 4.19에서 5.18까지 20년이 약간 안되었다. 5.18에서 6.10까지는 7년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6.10에서 2007년 7월까지는 다시 20년이 흘렀다. 4.19가 계기가 되어 5.18이 생기고, 그런 징검다리 형태로 20년 정도를 격차로 두는 한국 사회에 큰 변화들이 가끔 온다. 새로운 기념일은 한 달씩 늦어진다. 도대체 노무현은 4.19에서 6.10까지 이어지는 그 수많은 민중항쟁의 기념일, 그 겁나는 2007년의 대파동을 공무원들만을 데리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남북 정상회담을 8.15에 하면서 대반전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그 국면까지 넘어갈지, 2007년 7월에 뭔가 새로운 기념일이 생기게 될 것인지, 아직은 확률은 절반이다. 노대통령, 무엇을 믿고 있나 20년을 숨죽이고 있던 대한민국 민중에게 2007년 6월과 7월은 어떤 날들이 될런지, 그 역사의 대변동 속에서 나는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다. 지금 앞에선 사람들에게는 진 짜는 법에 대한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순간이기는 하지만, 사실 민중의 움직임은 진법 같은 것이나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파토스... 이번 흐름의 키워드는 파토스이다. 민중의 파토스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참 어려운 질문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파토스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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