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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가 ‘교육자적 자질’ 따질 자격있나
[정문순 칼럼] ‘석궁’ 사건의 본질은 사악한 대학과 오만한 사법부 합작
 
정문순   기사입력  2007/03/02 [00:43]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석궁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안타깝다는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은 듯하다. 범죄 피의자에게 여론이 분개할 줄 알았던 사법부로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울 만하다. 담당 재판부는 "김 전 교수가 오죽하면 그랬겠느냐"며 피해자격인 자신들에게 되레 싸늘하기만 한 여론이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법부의 오만과 독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사법부가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다. '석궁'이 말해주는 것은 부당하게 강단 밖으로 내몰린 학자의 억울함이나 불운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틀어쥔 일을 놓고 대학 당국은 사악함으로 일관했고, 사법부는 오만하고 무지했다.
 
법원이 학교 당국의 재임용 탈락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근거로 삼은 김 전 교수의 '교육자적 자질'이라는 건 싱겁게도 아무런 알맹이가 없다. 그러나 남이 가타부타하기 힘든 개인의 취향이나 특성이라도 사법부에게는 '교육자적 자질' 여부를 심판 받아야 하는 것들이 된다.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개인의 '자질'이라는 것에 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근대법 정신의 요체라면, 사법부는 학교 당국이 자의로 만든 엉성한 규정에 눈이 멀어 이를 망각한 셈이다. 교육자의 자질을 그렇게 중요하게 치는 재판부가, 얌전히 지냈으면 다치지 않고 교수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엉터리 시험 출제와 부당한 채점에 반발한 것은 왜 자질로 치지 않았느냐는 어떤 네티즌의 항변이 떠오른다. 
 
학교측이 내세운 대로 김명호 전 교수의 성품을 그려보자면 그는 기질적으로 매우 자유롭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을 감행하면서도 변호사 선임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 확신이 강해 세상과의 좌충우돌도 마다하지 않는 돈키호테 형 인간은 남에게 미움 살 일이 많음을 그는 보여주었다. 그는 재판부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꼬박꼬박 말대답을 해주고, 자신이 얼마나 교육자적 자질이 충만한 사람인가를 거짓말을 보태서라도 웅변해야 교수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문제의 2심 재판에 참여했던 이정렬 판사가 사건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재판부가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김명호 전 교수를 걸고넘어지는 것을 보며, 하루 종일 우울함이 가시지 않았다. 묻는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데 거리낌없을 정도로 오만한 것이 대한민국의 사법부다. 재판부는 김 전 교수에게 예, 아니오 중 하나의 답변만 요구했지, 비겁한 사학의 고무줄 잣대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자신들이 얼마나 공정한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학교가 교원을 마음대로 쫓아내도 재임용은 학교의 재량일 뿐이라는 판결이 나오는 사회, 인간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겠다는 사법부의 오만. 재임용에서 탈락되지 않을 만한 교육자의 자질이란 무엇일까.  만약 여자 제자를 성추행한 교수의 교육자적 자질을 평가한다면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교육자적 자질을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교육자적 자질이 부족한 교수에 의해 심각하게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다. '교수성폭력대책위원회'라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보면 교수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맺힌 절규가 넘쳐흐른다. 피해자가 사실을 햇빛 속에 진실을 드러내는 순간 이중 삼중의 고통이 더 얹혀지며, 어렵게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가해교수는 학교 당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도 않는다. 어린 내 영혼을 할퀸 20년 전의 성추행 교수는 이후에도 버릇을 고치지 못했는데도 가벼운 징계 한 번 먹은 적 없이 잘 먹고 잘 사셨다. 학교 당국만 건드리지 않으면 교육자적 자질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교수라도 정년을 보장받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한 인간의 내면까지 재판하겠다는 사법부의 오만이나,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빼앗았던 긴급조치 시대의 판사들이나 뿌리가 다를 바가 무엇일까. 석궁 사건을 낳은 사법부의 태도를 보건대, 유신 치하 긴급조치 사건에 유죄를 때렸던 판사들이 지금 스스로 내세우는 변명대로 그때 과연 힘이 없어서 마음에도 없는 판결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 초기 직원들에게 국민을 잘 섬길 것을 힘 주어 강조했다. 그의 말이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남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가 그 생각이나 개인적 취향도 심판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판사들의 오만방자함이 묵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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