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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아내에서 운동가로, 투사로 서다
삼성SDI복직투쟁중인 송수근의 아내 박미경씨를 아십니까?
 
정문순   기사입력  2003/06/30 [09:22]

디지털 식 해고 시대?

▲송수근씨     ©송수근 홈페이지
삼성SDI 해고 노동자 송수근씨 홈페이지(http://say.pe.ky/)에는 투쟁 천 칠백 몇 십일 째라고 쓰인 일자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연수로 치면 5년여, 2차례에 걸친 구속에다 총 2년에 가까운 세월을 영어의 몸으로 보낸 노동자의 복직 운동을 말해주는 기간이다. 하루가 열흘 같을 해고자와 그 가족에겐 그 시간은 그대로 고통의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삼성재벌과 싸우는 노동자라면 ‘고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마저 조심스럽지 않을까.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때조차 자신의 사업장의 노동자들만큼은 노조 결성을 꿈도 꿀 수 없게 했던 악명 높은 노무 관리의 역사를 자랑하는 굴지의 공룡 재벌과,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노동 현실이라는 겹겹의 적과 싸워야 하는 해고 노동자의 처지. 그의 아내 박미경씨의 표현대로라면 그건 그냥 고통도, 눈물도 아닌 ‘피눈물’이다.    

98년 당시 삼성SDI 노사협의회 위원이던 송수근씨는 회사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알아보러 몇 차례 외출한 것 등이 무단결근으로 낙인찍혔고 그대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해고 후 집회에서 부당함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더니 이번엔 그것이 명예훼손죄로 두 번 구속되는 빌미가 되었고 실형 선고로 이어졌다. 해고와 구속이 그저 일사천리이다. 꿈의 디지털 세상을 선도한다는 기업답게 노동자 관리도 최첨단으로 한다고 할까. 노조 결성은 고사하고 노동자로서 자율적인 목소리를 내려 하거나 경영방침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기미를 보이는 사람에게 회사측이 어떻게 대접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삼성SDI는 노사협의회 선거에 개입하는 바람에 노동자 4명이 분신을 시도한 극단적인 상황까지 낳았다. 창업주의 유훈인 무노조 경영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삼성재벌의 인사 관리는 한 나라의 정보기구를 방불할 만큼 치밀하고 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노동자 개개인의 동태를 샅샅이 꿰고 있는 놀라운 정보수집력은 물론이고 효과적인 노동 통제를 위해서라면 납치와 감금, 회유, 협박 등 인권 유린까지 불사하는 모습에 이르면 옛 안기부의 행태와 맞먹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송수근씨의 경우도 해고 직후 회사 직원과 폭력배까지 포함된 사람들에 의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 경찰에 신고하고서야 풀려난 적이 있다. 심지어 구속 후 회사는 송씨가 돈을 받고 고향을 떠난다는 일방적인 합의서를 작성해와 내밀기도 했다. 그것을 거부한 대가는 실형 선고였고, 그가 갇혀 있는 동안 노무관리의 ‘혜택’은 남편의 복직 싸움에 뛰어든 박미경씨의 몫으로 돌아왔다.  

분노와 성찰

▲ 박미경씨가 1인시위하러 갈때 타고 다니는 탑차
박미경씨는 남편의 구속 이후 자신의 심경과 악덕 기업을 고발하는 글을 남편 이름의 홈페이지를 비롯한 인터넷 공간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그 글에는, 남편의 해고와 구속에 대한 억울함,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눈물을 보는 안타까움, 시위하는 남편을 아는 척 했다는 이유로 동료직원들을 인사과로 부르고, 수시로 자신의 일터에까지 노무관리과 직원들이 들이닥치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회사측의 처사와, 최소한의 상식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노여움이 넘쳐나고 있다. 그녀의 글은 악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삼성의 노동 탄압에 새삼 혀를 차게 하면서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거듭 반문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노동귀족’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일부 노동자들은 살 만해진 것도 같고 세상이 달라진 듯한 세상에서 아직도 개발독재 시대의 가혹한 노동 통제가 버젓이 횡행할 수 있으며, 불같은 결의를 다지는 80년대 노동 전사의 목소리를 해고 노동자 아내의 글에서 읽어야 하는 현실은 기이하고도 서글프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시대를 뒷걸음질치는 듯한 현실에 개탄하는 나처럼 한가롭지 않은 것 같다. 박미경씨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시대에 맞게,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포효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맨몸으로 광야에 선 이 노동자 가족에게서 나는 흘러간 시대나 떠올리고 있었는데 본인은 그런 치열한 자세가 오히려 이 “시대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의 싸움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더 다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라도 승산이 보이지 않는 도전을 감행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데, 이런 ‘시대착오적’인 결의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솟구치는 분노의 힘이다. 그녀의 글은 곧 분노요 불칼이다. 바른 말 했다고 사람을 잡아 가두고 한 가족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어야 하는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소박한 사람일수록, 일그러진 현실에 대한 가장 정직한 반응을 분노로 표출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자신마저 휘감길 듯한 적의에 가까운 분노는 뒤틀린 현실에 맞서려는 의지를 키우는 힘으로 고스란히 전화될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적대 의식은 때로는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하는 결과를 빚기도 한다. 이를 악물고 싸울수록 이쪽에서 먼저 지치기도 하며 증오를 키울수록 자신의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 박미경씨가, 자신의 뒤를 밟거나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한 노무관리자들이 결국은 “조직의 불쌍한 희생양”일 뿐이라는 인식에 이르는 건, 증오가 오히려 자신을 겨누고 있는 데 대한 반성적 성찰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제가 그들에게 미움의 화살을 던지면 던질수록,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제 자신을 괴롭히더군요.” 

이러한 성찰적 자세는, 딸을 위해 풀꽃을 꺾어주려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저들을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약자에 대한 배려를 낳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성찰은 또한 싸우는 대상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킨다. 독점재벌은 이제 그녀에게 그저 증오의 악일 뿐이 아니다. 

“삼성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 나라에 억울하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제 가족의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을 텐데” 

가족주의적 삶에서 벗어나도록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해준 삼성에게 역설적으로 ‘고마움’이 느껴지기도 한단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녀에게 세상을 보는 창을 열어준 것은 남편의 구속이라고 한다. 바르게 산다는 것의 고통,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을 비로소 알게 되는 계기였다고 말한다. 그 인식이 그녀에게 노동자의 아내로서가 아닌 운동가의 삶을 가능하게 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러나 박미경씨가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운동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자기 성찰을 두려워하지 않는 운동가다. 자신보다 더 낮은 처지의 약자를 돌아볼 줄 아는 윤리 의식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여성 운동가들을 자신의 동료나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대기업 노동자와 남성 운동가들의 인식에 대한 아쉬움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박미경씨가, 그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아픔과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자신과 세상을 성찰할 수 있는 역량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한 약자를 찾을 수 없는 여성이기에 가능한 일인지. 

어쨌든 그녀는 승리자다. 남편의 복직 싸움에 얼마나 험난한 행로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무노조가 기업으로서 얼마나 수치인지 모르는 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당근과 채찍으로 노동자들의 입을 언제까지나 틀어막을 수 있다고 믿는 공룡이 그 앞에 버티고 있다 하더라도, 박미경씨는 이미 승부가 끝난 싸움을 하고 있다. 해고 후 천 칠백 일이 넘는 기간은 투사로 거듭나기 위해 단련되는 과정이 오롯이 담긴 세월이리라. 이 가족의 건투와 안녕을 빈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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